339화 손님이 없으니 장사를 할 이유도 없다
테이퍼링에 관한 이야기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인식이 바뀌어 갔다.
당장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기간 또한 차분히 늘려간다는 사실에 흥분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점차 바뀌어 간 것이었다.
생각이 바뀌자 분위기도 바뀌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과 같은 반응은 과하다는 의견이 시장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락이야 나올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고점 대비 25%가 넘는 하락을 보인 것은 발작에 가까웠다는 것이 시장 참여자들의 바뀐 생각이었다.
과매도에 대한 반발 매수세로 인해 1,700까지 올라왔던 지수는 조금 더 힘을 냈다.
1,750까지 올라간 지수는 이제 하락추세는 끝이 났다는 이야기를 시장에 던져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시장은 다시 2,000을 이야기했고 2,100을 기대했다.
이렇게 시장 분위기가 돌아서자 사람들은 세이지와 최석영을 찾았다.
지난 하락을 정확하게 예측한 세이지와 최석영에게 시장이 돌아선 게 맞는 것인지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한동안 방송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최석영이 오랜만에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사는 대대적으로 최석영의 등장을 광고했고 그렇게 최석영은 화면에 얼굴을 드러냈다.
세이지의 최석영을 어렵게 출연시킨 방송은 지난 토론과 시사 프로그램 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대담 형식의 분위기로 오롯이 최석영에게 모든 초점을 맞춰지도록 방송이 세팅되었다.
지금까지의 시장을 한번 되돌아보고 앞으로를 예측하는 자리로 지난번과 같이 좋은 종목이 있다면 추천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최석영은 그렇게 방송사가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자리에 앉아 아나운서와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정확하게 자리를 예측한 것에 저뿐만 아니라 많은 시청자 여러분들이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방송을 보고 계시는 분들을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무언가를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저희 세이지가 남들보다 자리를 조금 더 잘 보고 그걸 제가 세이지의 모든 직원을 대신하여 이야기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겸손하신 모습에 사람들이 더욱 최석영 차장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요새 인기 좀 실감하고 계시나요?”
“네. 많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과거 오랜 시간 증권방송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나갔지만 사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저희 동네 분들도 모르셨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방송에 나간 첫날부터 저를 알아봐 주시고 아이들도 사인 요청을 하는 것을 보며 인기를 피부로 느끼는 중입니다.”
가벼운 인사와 가벼운 이야기로 자리를 시작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한진영에게로 KBC 방송국의 편성국장과 보도국장을 대동한 KBC 방송국 사장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스튜디오 밖에서 최석영을 바라보던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찾아온 KBC 방송국 사장인 김종성 사장을 바라봤다.
“김종성 사장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손님이 왔으니 당연히 주인이 맞아야지요.”
김종성은 살갑게 한진영에게 인사를 하고는 한진영에게 함께 온 국장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진영과 나란히 서서 최석영이 있는 스튜디오를 바라보고 말했다.
“한 대표님에게 인사하기 위해 이곳에 오기 전에 시청률을 확인했습니다. 상당하던데요?”
“잘 나왔습니까?”
“잘 나온 정도가 아닙니다. 시청률이 15%를 넘겼습니다. 이 시간에 15%를 넘겼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걸 이번 프로그램이 달성했습니다.”
김종성의 말에 곁에 있던 편성국장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평일 밤 시간대는 5%만 나와도 대박이라고 말할만합니다. 15%는 고사하고 10%는 꿈의 숫자라고 이야기할 정도이지요. 그런데 그걸 아득히 뛰어넘는 15%가 나온 겁니다. 그것도 방송 초반에 말입니다. 앞으로 이야기를 계속 풀어나가면 순간 시청률 20%도 가능하다는 것이 저희의 판단입니다.”
“20%는 거의 주말 드라마에서나 나올만한 수치입니다.”
보도국장도 한마디를 첨가했다.
한진영은 그런 방송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최석영과 아나운서는 인사말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 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하락추세를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중이었다.
김종성은 한진영의 표정이 밝은 것을 확인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KBC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제안이요?”
양적완화를 예상했던 지난 순간과 긴축을 예상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를 나누는 최석영을 바라보던 한진영은 김종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김종성은 한진영을 바라보고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규 편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정규 편성이라면…… 매주 나와서 이야기를 하자는 건가요?”
“조금 더 저희가 고민해야겠지만 이런 식의 자리는 아닐 겁니다.”
“그럼 어떤 방식을 생각에 두고 계신 겁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김종성이 편성국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편성국장은 김종성의 시선에 한진영을 향해 설명을 시작했다.
“한 주간의 증시와 경제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신설할 생각입니다. 중요한 이슈가 생길 때는 학계나 정계의 인사를 초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증권방송과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차별점은 확실할 겁니다.”
“어떻게 확실하다는 말씀이시죠?”
“나오는 사람들의 질이 다를 테니까요.”
확신에 찬 편성국장의 모습에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증권방송에서 하던 것과는 확실하게 차별이 되기는 할 거 같습니다. 힘을 쓰신다면 세계적인 석학까지도 섭외를 할 수 있으실 테니 말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석학뿐이 아닙니다. 정부 관계자들을 섭외하는 것도 훨씬 수월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방송의 수준도 한층 레벨업이 되겠죠.”
편성국장이 김종성을 돌아봤다.
김종성도 그런 방송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편성국장은 김종성의 모습에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런 구성은 다른 곳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들입니다. 우리 KBC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지요. 어떻습니까? 관심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편성국장의 말에 한진영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편성국장은 한진영이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한진영을 바라보던 편성국장은 김종성과 보도국장을 한 번 살핀 뒤 한진영을 향해 다시 이야기했다.
“물론 이 방송의 중심에는 세이지의 최석영 차장님이 계실 겁니다. 초대하는 사람은 계속 바뀌어도 메인은 최석영 차장님으로 고정하여 세이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구성할 생각입니다. 괜찮지 않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세이지의 입지도 탄탄해지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듣기로는…….”
편성국장은 한진영을 설득하느라 조금은 커졌던 목소리를 매우 낮게 낮추고는 한진영을 비롯하여 주변에 서 있는 자기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운 펀드를 조성하려고 하신다고요? 저희 방송을 이용한다면 투자자 모집이 더욱 수월할 수 있습니다.”
한진영은 편성국장을 슬쩍 돌아보고는 밝게 웃었다.
편성국장도 그런 한진영의 미소를 보며 따라 웃었다.
한진영이 웃는 것이 아무래도 자기의 설득이 잘 먹혀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던 편성국장이었다.
그러나 편성국장의 생각과 달리 한진영의 웃음은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도움을 주지 않아도 투자자를 모집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오히려 괜히 광고까지 더하여 투자자를 모집했다가는 혼란을 일으킬까 걱정이 되는 정도지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 관심이 없으신 겁니까? 저희로서는 충분히 좋은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십시오.”
김종성이 답답한 나머지 다시 나섰다.
편성국장이 한진영을 설득하는 사이 18%까지 시청률이 치솟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김종성을 비롯한 KBC에서는 세이지를 무조건 잡아야 하는 이유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한진영은 절절한 모습이 보이는 김종성을 바라보고 고개 저었다.
그리고 최석영이 있는 쪽으로 턱짓하고는 말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저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이유는 조금 뒤 저기 있는 최 차장님이 대신 이야기할 테니 KBC 측이야말로 그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생각이 달라진다고요? 무슨 생각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김종성이 한진영에게 물었지만, 한진영은 대답하지 않은 채 최석영이 있는 곳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김종성을 비롯한 두 명의 국장들은 한진영에게서 최석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곳에서는 앞으로의 지수 흐름을 예측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나운서가 먼저 최석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세이지에서는 앞으로 시장이 어떻게 될 것으로 보고 계십니까? 아무래도 바닥이 나온 만큼 상승을 기대해볼 만할까요?”
“바닥이라…….”
최석영은 잠시 턱을 쓰다듬고는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생각을 마친 최석영은 고개를 들어 아나운서를 향해 이야기했다.
“바닥이 나온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상승은…… 기대하는 것만큼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대하는 것 이상이 나오지 않는다면 하락이 나온다는 건가요?”
“아니요. 조금 전 이야기대로 바닥은 나왔습니다. 그러니 하락하더라도 전저점을 깨는 일은 당분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단지?”
“상승 또한 제한이 걸려버렸습니다.”
“제한이 걸렸다고요? 무엇 때문에 제한이 걸렸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테이퍼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최석영은 단호한 음성으로 이야기한 후 카메라를 바라보고 말했다.
“테이퍼링이 엄청난 악재처럼 시장을 짓눌러 폭락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 과한 반응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재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분명 시장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기는 할 테니까요.”
“그럼 상승을 막는 이유가 테이퍼링이 된다는 말씀인 겁니까?”
아나운서의 말에 최석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쨌든 시장에 풀려있는 돈을 거둬들이는 일이니까요. 유동성이 거둬들여지는 상황에서는 상승에도 제한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아나운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최석영에게 물었다.
“바닥은 나와서 하락에도 제한이 걸렸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시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상승에도 제한이 걸리고 하락에도 제한이 걸리면 나올 수 있는 상황은 하나밖에 없겠지요.”
“하나밖에 없다고요?”
“네. 바로 횡보. 지수는 오르지도 떨어지지도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시간조정이 필요하다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유동성 축소로 인한 시장의 매물이 말라가는…… 거래절벽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거래절벽이요?”
“네.”
아나운서는 처음 들어보는 듯한 표현에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했다.
주식시장에서 그것도 개별종목이 아닌 지수를 예상하는 자리에서 거래절벽이라는 표현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나운서가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자 최석영도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아나운서가 어느 부분에서 멈칫한 것인지 최석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석영은 스튜디오 밖에 자리하고 있는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영을 향해 계속 이야기해도 되는지 물어보기 위한 눈빛을 보낸 것이었다.
한진영은 최석영의 시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해도 된다는 뜻을 최석영을 향해 전했고, 최석영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나운서에게 한진영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기 시작했다.
“거둬들여진 돈이 우리나라에서 맴돈다면 다시 시장에 들어올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거둬들여진 돈이 가는 곳은 바다 건너 미국입니다. 유동성 파티를 벌였던 돈이 이제 집으로 완전히 돌아간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시장에 돈이 떠나 버리게 된다면 거래 또한 함께 마르게 될 겁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활발히 거래됐던 시장은 이제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단호한 듯한 최석영의 말에 아나운서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최석영에게 물었다.
“거래절벽으로 인한 지수의 움직임이 제한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물건을 내놓아도 사는 사람이 없다 보니 강제로 가격이 제한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겁니다.”
“말씀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요. 혹시 그런 시장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있을까요? 내년이면 상황이 나아지겠습니까?”
아나운서의 말에 최석영이 얇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테이퍼링의 시작이 내년입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유동성 축소가 이어질 것이고요. 즉, 최소한 내후년 상반기, 길면 그다음 해까지도 시장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일 겁니다. 저희의 판단으로는 앞으로 적어도 3년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년…… 이요?”
“최소 3년입니다. 최소로 했을 때…….”
최석영이 말을 마치자 김종성과 두 명의 국장들이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몸을 반쯤 돌려 엄지손가락으로 최석영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제가 하지 않겠다는 이유를 말입니다.”
한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웃으며 이야기했다.
“만약에 3년 뒤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지금은…….”
한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최석영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손님이 없는데 굳이 장사할 이유는 없으니 말입니다.”
한진영은 말을 하고 김종성 등에 인사를 한 후 먼저 몸을 돌려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
이성우의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기풍철강의 장남이자 기풍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된 이성우와 서준일보의 차녀이자 강력한 후계자로 이야기되는 문서영과의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호텔의 영빈관을 통째로 빌린 예식장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정계와 재계는 물론이고 기풍과 서준일보에서 지원받는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들까지 결혼식장을 찾아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모습을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기서 뭐 하나?”
LZ그룹의 조병수 회장이 조용재와 양준 등을 이끌고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로 강선건설의 천계산 회장과 대한정유의 윤길영 회장도 함께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결혼식장 내에 한진영을 중심으로 자그마한 재계 모임이 열리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