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내 결혼식이라고 이야기해도 되겠다
한진영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 한 명 한 명 인사했다.
조병수 등은 그런 한진영의 인사를 받으며 다들 한마디씩 건넸다.
“이 실장 다음에는 자네가 해야지.”
“짝이 있어야지요.”
“짝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어떤가? 내가 다리 좀 놓아줄까? 어디를 좋아하나? 재계? 정계? 말만 하게. 원하는 쪽으로 줄을 이어줄 테니 말이야.”
한진영은 조병수의 말에 대답 대신 살며시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는 어떤가? 나한테 과년한 조카가 하나 있는데 자네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아.”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니 그럼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볼까?”
윤길영 회장의 말에 이번에도 한진영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몇 차례의 제안에도 한진영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뭐 그건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
딸이라든지 여자 조카가 없던 강선건설의 천계산 회장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새로운 펀드를 조성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네. 들으셨군요.”
“듣다 뿐인가 우리가 이렇게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이겠나?”
천계산은 은근한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번 펀드. 어떤가? 따로 하나 더 조성해보는 것 말일세.”
“따로 하나 더 조성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허. 왜 알면서도 이러나? 우리 사이에 말이야.”
천계산이 한진영과 자기를 손짓하고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한진영을 끌어당겨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있는 회장님들 모두 자네와 깊은 인연이 있지. 특히 저기 계신 LZ의 조 회장님 같은 경우에는 자네가 신소재 사업에 개인적으로 투자까지 했다는 것 알고 있네. 그럼 뭐 거의 동업자 아닌가?”
천계산이 조병수를 돌아보고 자기의 말이 과한 것이 아니었나 확인했다.
그러나 조병수는 오히려 천계산의 이야기를 듣고 흐뭇해하는 것이 동업자라는 표현을 싫어하기보다 좋아하는 것만 같아 보였다.
천계산은 그런 조병수의 모습에 더욱 한진영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말했다.
“보통 인연이 아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조성하는 펀드의 계좌를 이렇게 보통 인연이 아닌 우리에게 따로 터 주는 것은 어떤가? 섭섭하지 않게 들어갈 테니 말이야.”
천계산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보고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투자를 할 곳을 찾고 계시는데 마땅치가 않으신가 보군요.”
“하하. 자네를 속일 수가 없겠어. 자네 말이 맞네. 지금 투자할 곳이 마땅치가 않다네.”
천계산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다들 같은 생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그래서 기풍철강 아들의 결혼식임에도 결혼식은 뒷전으로 둔 채 한진영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따로 한진영과 시간을 내어 만나느니 이참에 그냥 투자 이야기를 매듭짓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윤길영 회장이 이번에는 천계산을 대신해서 나섰다.
“자네도 알다시피 미국이 긴축에 들어갔어. 아직은 테이퍼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상태라네. 자네 직원도 방송에서 나와서 이야기하지 않았나?”
“네. 그렇지요. 현장에 계시니 피부로 더 강하게 느끼고 계시겠네요.”
“자네 말대로야. 피부로 강하게 느끼고 있어.”
윤길영은 고개를 흔들고는 다른 회장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돈은 갈 곳을 잃어버렸다는 거야. 해외자본이 싹 쓸려 나가버리자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어.”
“그래서 생각한 게 자네라네. 자네와 몇 번 거래하면서 쌓은 신뢰도 있고 그동안 보여준 실적도 있고…….”
조병수가 윤길영 회장은 말을 받아 이야기한 뒤 잠시 입맛을 다셨다.
“동우에서 경기증권에서 진행하려는 사업에 투자해보라고 이야기가 들어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동우에서 제안이 왔습니까?”
한진영이 미소를 머금고 조병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계산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나도 제안받았네. 어차피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경기증권이 하려는 사업에 투자해보라고 말이야. 그런데 나도 긴가민가하네.”
천계산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촉이 좋아.’
한진영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평생 돈을 쫓았던 사람답게 이상징후를 촉만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해 동우는 달랐다.
한평생 법을 이용한 권력을 쫓았던 곳이라 돈과 관련된 것에서는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보다 못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서 경기증권에 휘둘리게 된 것이고 최종필에 의해 결정타를 맞으려 하는 것이었다.
천계산은 께름칙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계속 이야기했다.
“뭔 전환사채를 이용한 기업투자라고 하는데…… 우리도 기업 하는 입장에서 전환사채를 이용한 투자가 깔끔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 뭐 말로는 견실한 기업, 흑자도산을 걱정하는 기업 혹은 그에 준하는 탄탄한 기업의 전환사채를 손에 넣은 뒤 바꾼 지분으로 기업을 인수하여 매각하게 된다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비슷한 류의 투자를 진행하는 세이지에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라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같은 생각이라네. 좋은 기업의 전환사채를 취득하여 기업을 회생시킨 후 지분을 취득하여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대표의 눈을 믿고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하는 편이 더 좋지 않겠어? 경기증권은 물론이고 최종필이라는 놈을 믿느니 같이 일해본 한 대표가 훨씬 낫지.”
천계산의 말에 윤길영과 조병수가 모두 같은 대답을 건넸다.
그들이 느끼기에도 비슷한 류의 투자라면 한진영 쪽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들 뭐 하십니까?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오늘 결혼식의 진짜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성우의 아버지이자 기풍그룹의 회장인 이정훈 회장이 하얀 장갑을 끼고 한진영 등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한진영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이정훈 회장의 등장에 급히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아주 보기가 좋습니다.”
“서준일보를 사돈으로 맞으시다니 이제 기풍은 날개까지 얻으신 것 같습니다.”
이정훈 회장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조병수 등을 향해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여기서 뭐 해? 성우가 찾던데.”
“새신랑이 저를 찾으면 뭐 하겠습니까? 새신부를 제일 보고 싶어 할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의 말에 가볍게 웃고는 한진영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야 고맙다고 말하게 된 것 같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정훈 회장의 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정훈 회장은 그런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진영은 손을 꽉 움켜잡았다.
“이번 결혼은 다 자네 덕분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좋아서 하는 결혼인데 제가 무슨 힘을 썼겠습니까?”
“아니야. 자네가 힘을 썼다는 것 잘 알고 있어. 앞으로도 성우와 잘 지내주게. 성우가 자네한테 많이 의지해.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성우의 일을 많이 도와주고…… 안탐 광산처럼 말이야.”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의 말에 얇게 웃었다.
이정훈 회장이 어떤 의미로 지금 자리에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자기와 아들인 이성우의 끈적한 관계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한진영과 이성우는 형제 못지않은 친분을 가지고 있다.
한진영이 이성우의 일을 봐주고 있다.
한진영이 이성우의 결혼까지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줬다.
지금까지의 끈적했던 관계를 알려주고 앞으로도 그 관계는 계속 이어질 거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 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성우의 위치 또한 한진영의 옆자리에 가져다 놓은 이정훈 회장이었다.
이정훈 회장은 오늘 결혼식장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다들 뭐 하고 계셨던 겁니까?”
자기 볼일을 다 보고 난 이후에야 다시 여기서 뭐 하냐는 질문을 건넨 이정훈 회장이었다.
LZ의 조병수 회장은 그런 이정훈 회장에게 조금 전까지 나누었던 이야기를 이정훈 회장에게 설명했다.
이정훈 회장은 설명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나도 동우에서 연락받았어. 도대체 경기증권에서 한다는 게 뭐야? 나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던데…… 그거 정말로 돈이 되는 일이야?”
성격 급한 이정훈 회장이 노골적으로 물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또한 모두 궁금해하던 것으로 어떤 판단을 내릴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과 이제 바뀐 음악이 나오고 있는 예식장을 번갈아 바라본 뒤 말했다.
“회장님. 들어가셔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건 됐으니까 어서 대답이나 해봐. 돈 되는 거 맞기는 해?”
이정훈 회장은 고개를 돌려서 자기를 찾으러 오는 직원을 향해 손짓했다.
“곧 들어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해. 왜 저렇게 독촉해?”
이정훈 회장은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듯한 음악 소리를 향해 신경질을 내고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마치 네가 대답해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던 이정훈 회장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 회장을 향해 살며시 웃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을 빤히 바라봤다.
“돈…… 안 됩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그래. 돈이 될 리가 없지. 그럴 것 같았어.”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거라고.”
한진영의 말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조금 전 원했던 것에 대한 대답을 던졌다.
“펀드 계좌…… 따로 트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외부위탁운용(OCIO) 사업을 진행하려고 했었으니까요.”
“외부위탁운용? 본격적으로 우리 같은 법인들의 투자금을 받아서 운용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조병수의 말에 한진영이 조병수를 비롯하여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물었다.
“어떻습니까? 제가 외부위탁운용 펀드를 조성해서 진행한다고 하면 관심이 있으십니까?”
“관심 당연히 있지.”
“수수료율이 꽤 높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이 사람이 우리를 뭐로 보고 그래? 우리가 설마 그런 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어? 위탁운용은 통상 기대수익률이 10%가 안 되지 않나? 그런데 자네한테 맡기면 수수료로 30%를 내고도 얻는 수익이 10%가 넘을 테니 당연히 이득이지.”
조병수의 말에 윤길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은 장사치들은 계산이 빨라. 수수료보다 이득이 크다면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게 낼 수 있어. 이런 일이 우리와 처음이 아니지 않나? 아직도 우리가 그깟 수수료에 연연할 줄 알았나?”
윤길영까지 동의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한마디씩 더했다.
이정훈은 멀리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직원을 향해 손을 들어 막아 세우고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우선 1차로 2,000억. 1차 실적을 보고 이사회를 설득해서 2차는 더 증액시킬 수 있을 거야. 어떤가? 할 텐가?”
“우리는 바로 5,000억을 내놓도록 하지.”
조병수가 이정훈의 말을 받아 바로 이야기했다.
윤길영은 LZ에게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큰소리로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우린 7,000억을 내놓겠네.”
천계산은 점점 높아져 가는 금액에 급히 곁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는 천정모를 돌아봤다.
천정모는 그런 천계산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버님. 대한정유와 LZ그룹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기풍이 이사회를 설득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안심하고 질러도 된다는 뜻입니다.”
천계산은 천정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느끼기에도 이 일은 되는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곳을 이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낼 수 있을 만큼 내면 됩니다.”
“그럼…… 300억?”
“아버님.”
천정모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린고비 같은 모습을 보이는 천계산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야기가 끝나갑니다. 어서요.”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분위기에 이정훈이 한진영에게 이른 시일 내에 사람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한진영도 그런 이정훈 회장의 모습에 신랑인 이성우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천정모는 이곳에서 어서 이야기하라고 눈으로 천계산을 재촉했다.
따로 만나서 한진영과 이야기를 해도 될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야기할 때와 따로 이야기할 때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바로 이곳에서 이야기한다면 다른 그룹들과 하나의 투자 그룹으로 묶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었다.
천계산도 천정모가 이야기하려는지 알고 있었기에 급히 마음을 정하고 이야기했다.
“나도 2,000억을 내어놓겠네.”
이야기를 끝내려던 한진영과 나머지 사람들은 천계산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천 회장님이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강선건설이 2,000억을 내어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어쨌든 강선건설까지 돈을 내어놓기로 했으니 어떤가? 계좌를 터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넷을 묶어 따로 하나를 만들어주는 것 말이야.”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한정유 윤길영 회장의 제안을 한진영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자리를 마련해서 계약하자는 말을 남기고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조지훈은 뒤에서 조용히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모두 흩어진 뒤 조심스럽게 한진영에게 다가갔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셨나요?”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총수들이 모인 자리라서 조지훈은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은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지 못하는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리고 말했다.
“성우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지 못했을 텐데 성우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이거 내가 예복만 입지 않았을 뿐이지 내 결혼식이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로 큰 선물을 받았어. 성우한테 뭐라도 해줘야겠다. 가자. 신랑이 기다리겠다.”
한진영 입에서 큰 선물을 받았다는 말에 조지훈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수확을 얻었음을 알게 됐다.
조지훈은 즐거운 듯이 앞서 걸어가는 한진영의 뒤를 조용히 따라 이성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