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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343화 (343/650)

343화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됐다

한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창운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나창운 씨에게 필요한 건 돈입니다. 보십시오.”

한진영은 손을 들어 나창운을 가리켰다.

“이곳에 오기 위해 거울을 보고 옷을 차려입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제가 과거의 나창운 씨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창운은 한진영의 말에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만졌다.

덥수룩한 머리였다.

수염도 깎는다고 깎았는데 꼼꼼히 깎지는 못했다.

오랜만의 외출이기에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했지만 구겨진 외투와 언제 빨았는지 모를 셔츠를 입은 채 맞지 않는 넥타이를 하고 이곳에 찾아왔다.

계약서에 온정신이 팔려 정신없이 이곳에 오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고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비루한 차림이었다.

한진영은 민망해하는 나창운을 바라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난이 무서운 건 사람 자체를 갉아먹는다는 것이지요. 특히 가장 밝았던 부분만 골라서 말입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다시 나창운을 향해 손을 들어 그의 몸을 훑었다.

“분명 나창운 씨는 외모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셨겠지요. 하지만 지금 보십시오. 지금 나창운 씨의 모습은 단정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이렇듯 가난은 나창운 씨의 가장 밝았던 부분부터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자신 있었던 곳부터 무너뜨려 시궁창으로 나창운 씨를 빠뜨리는 중이지요.”

나창운은 한진영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한진영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나창운 앞에 놓여있는 계약서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사실 보장 연봉보다 인센티브를 붙이는 편이 금전적으로는 나창운 씨에게 더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 직원들 같은 경우에는 인센티브로 받아 가는 돈이 상당하기 때문이지요. 올해 나창운 씨와 같은 급의 직원이 받아 가는 돈이 약 30~40억쯤 되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나창운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30~40억의 인센티브는 우리나라 스타 매니저도 받아 가기 어려운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진영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나창운을 바라보고 웃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나창운 씨에게 보장 연봉 20억을 제안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나창운 씨 같은 경우에는 당장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적을 올려 나중에 돈을 받는 것보다 지금 당장 주머니에 돈이 필요하신 상태일 테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나창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자기 상태를 잘 알고 있는 한진영의 모습에 나창운은 허탈한 마음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어머니를 좋은 요양원에 보내드리는 것으로 나창운 씨의 마음을 흔들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것도 그냥 돈으로 드리도록 결정했습니다. 사실 돈만 있으면 나창운 씨가 원하는 요양원과 보호사를 구하고도 남을 테니까요. 정보도 돈으로 사는 지금 시기에는 돈만 있으면 모든 일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지난번에 찾아뵀을 때도 말씀드렸지만 소송 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우리가 알아서 처리해 드릴 테니 말입니다. 어떤 판결이 나더라도 그것도 우리 쪽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손해배상 판결이 나오면 저희가 책임질 테니 나창운 씨는 그런 사소한 것은 회사에 맡기고 일만 하시면 됩니다.”

한진영의 말에 나창운이 긴장했던 어깨를 늘어뜨리고 물었다.

“이렇게까지 저에게 잘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진영은 나창운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잘해드린다니요? 저는 잘해드린 게 없습니다.”

한진영은 계약서를 잠시 내려다보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이 나창운 씨에게 파격적으로 느껴져서 그러시는 겁니까?”

“네. 파격적이다 못해 당황스러울 지경입니다.”

한진영은 나창운의 대답에 웃음을 흘렸다.

“나창운 씨나 저나 그리고 우리 세이지 자산운용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곳에서 돈을 허투루 쓰는 일이 일어나던가요?”

나창운은 한진영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한진영은 그런 나창운을 바라보고 웃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제가 세후 20억을 제안했다는 것은 그만큼 나창운 씨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1년에 20억을 보장하더라도 회사에는 이득이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창운 씨께서는 회사에서 받은 돈으로 몸을 뒤덮는 가난이라는 천막만 걷어내시면 됩니다. 그리고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와 나창운 씨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다시 계약서를 나창운 쪽으로 밀었다.

어서 이 자리에서 계약하자는 뜻을 나창운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나창운은 잠시 계약서를 내려보다 앞에 놓인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사인했다.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창운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창운이 사인을 한 계약서를 전달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적힌 대로 20억이 오늘 오후 무렵 통장에 바로 입금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제가 오히려 감사드려야죠. 20억이라는 싼값에 나창운 씨를 얻게 된 것이니까요.”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저는 나창운 씨를 믿어요.”

한진영은 믿는다는 말을 두 번이나 건넨 뒤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나창운의 힘찬 사인이 들어있는 서명란을 바라보고 말없이 미소 지었다.

‘싸게 얻었어.’

지난 시절 나창운이 올린 실적을 알고 있었기에 세후 20억이라는 금액이 결코 비싸게 느껴지지 않았던 한진영이었다.

나창운이 처한 상황이 지금과 같지 않아 인센티브 계약을 넣었다면 20억이 아니라 100억도 우습게 벌었을 나창운이었다.

실제로 실버만삭스에서는 매년 나창운에게 수백억의 인센티브를 지불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한진영이었다.

그런 인물을 당장 돈이 급한 덕분에 20억이라는 푼돈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진영 입장에서는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였다.

한진영은 뒤편에 서 있던 조지훈에게 계약서를 넘겼다.

“바로 진행하도록 해.”

조지훈에게 짧은 지시를 내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나창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 팀장님.”

“네. 대표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 팀장님께서는 열심히 잘하실 거라는 것을 말입니다.”

한진영은 가볍게 악수한 뒤 본격적으로 출근을 하게 되는 한 달 뒤에 보자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떠나는 나창운을 밖에까지 따라 나가 배웅했다.

한진영은 떠나는 나창운을 향해 손까지 흔든 뒤 조지훈을 불렀다.

“은행들에 바로 시작해도 되겠다고 이야기해. 그리고 태훈 로펌에도 연락 넣어. 내가 보고 싶다고 말이야.”

“태훈이요?”

조지훈은 은행들에 시작하라는 지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새롭게 설계한 펀드를 이제 대중에게 공개하여 모집하자는 이야기였다.

펀드를 운용할 사람을 구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어도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태훈 로펌에 연락을 넣으라는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태훈과는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유를 묻는 듯한 얼굴을 하는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 팀장 문제 해결해 줘야지.”

“아~ 그것 때문에요. 그런데…… 동우를 통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동우를 통한다면 일이 더욱 쉬워질 텐데 말입니다.”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세이지의 법률 조언을 해주는 곳이 바로 동우였다.

현 정부에 미치는 힘도 막강했고, 한진영과의 관계도 좋았다.

조지훈은 소송을 진행한다면 동우여야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앞으로 동우하고는 거리를 둘 거야.”

“동우와요?”

“그래. 태훈 쪽하고 가까이 지낼 생각이니 이참에 라인을 뚫는다는 생각으로 연락을 넣어.”

“이번 건만으로 끝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번만으로 끝내지 않을 거야. 이제 동우와는 헤어져야 할 때가 왔어.”

한진영은 코웃음에 가까운 말을 던지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

지수는 1,900을 기준으로 세이지의 말 대로 횡보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2,000을 넘길 것처럼 움직이다가도 1,900을 깨고 내려가 1,800대를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하락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승으로 돌아서 1,900에 지수를 가져다 놓고는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박스권에서 움직이는 것이 세이지의 말대로 지루한 횡보장의 초입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했다.

지수가 횡보를 이어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다시 세이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혹시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몇 년에 걸친 횡보장이 이어지는 것인지 세이지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이지의 최석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 곳에서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출연 제의를 넣었음에도 세이지는 방송국의 출연을 거절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최석영의 모습이 화면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지난 방송에서 이야기한 것과 상황이 바뀐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다.

이미 이야기했는데 굳이 또다시 방송에 나와 할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맞았음을 방송이 아닌 다른 곳을 통해 확인됐다.

서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석영이 출연을 자제하는 이유를 언급한 것이었다.

[……세이지의 최석영 차장은 최소 3년에 걸친 횡보장이 나올 것을 이야기했던 지난 주장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더 좁은 바운더리 내에서 움직임이 제한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세이지는 이미 개별주식으로의 투자 방향을 바꾸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이미 예고했던 대로 신생기업에 투자하는 펀드를 출시하여 직접투자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거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펀드의…….]

최석영의 이야기가 신문을 통해 나오자 사람들은 더는 희망을 품지 않았다.

시장은 횡보장세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시장을 기웃거리며 참여하려고 하던 이들은 직접투자의 욕심을 버리게 됐다.

횡보장이 초보들에게 더 쉬운 시장이기는 했지만, 그 지겨움을 직접적으로 견딘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직접투자에서 간접투자로 시선을 돌렸다.

특히 세이지가 이런 시장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펀드를 출시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서 빨리 내놓으라며 독촉하기에 이르렀다.

경기증권에도 마찬가지 요청이 쏟아져 들어갔다.

세이지를 믿지 못하게는 사람들은 경기증권의 상품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세이지가 아무리 유명하다고 하지만 증권사라는 장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증권사와 자산운용사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게다가 경기증권의 경우에는 정부의 뒷배가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며 꽤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세이지와 경기증권.

두 곳의 펀드가 출시만 된다면 시중자금을 쭉 빨아 먹을 거라는 것이 시장에 널리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런 소문 속에서 먼저 펀드의 포문을 연 곳은 경기증권이었다.

경기증권은 두리은행을 통해 펀드 20개를 동시에 오픈했다.

채권형 펀드, 주식형 펀드, 혼합형 펀드 등등 고객의 입맛에 맞게끔 각각의 상품을 설계하여 투자의 선택 폭을 넓혔다는 의미로 20개의 펀드를 동시 공개했다.

사람들은 이런 경기증권의 상품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기존의 상품들과 달리 너무 많은 상품 가짓수에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리은행이 특별히 전담 직원을 꾸려 펀드 가입자들에게 꼭 맞는 펀드를 골라 설계해주는 시스템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경기증권 펀드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받았다.

“두리은행의 어느 지점에 가든지 간에 경기증권의 펀드를 설명 들을 수 있는 직원이 상주해 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들을 수 있다고?”

“네. 고객의 재정 상황과 목표로 하는 것 등을 잘 따져 20개의 펀드 중에 가장 어울리는 펀드를 골라준다고 합니다.”

“하하하.”

한진영은 큰소리로 웃었다.

“미친놈들 진짜 대단하구나.”

“네?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그런 게 있어.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그래서 펀드는 어떤 것들이야?”

“기존에 시중에 많이 팔렸던 것들로 짜여 있습니다. 특별하다고 할 것은 없고 대부분이 개방형 상품으로 원할 때 환매하여 현금화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개방형’이라고?”

“네. 뭐가 잘못됐습니까?”

보고하던 조지훈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의 목소리 속에서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이렇게 하자. 조 비서가 지금 보고하는 내용들은 대부분 경기증권하고 두리은행이 언론에 배포한 것들이지?”

“네. 홍보 자료에 있는 것들을 기준으로 하여 모은 것들입니다.”

“그래. 그런 것 같았어.”

“혹시 홍보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잘못되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이건 법적 처벌을 받을 사안입니다. 홍보 자료에 잘못된 내용을 적는 것은 위법행위니까요.”

한진영은 호들갑을 떠는 조지훈을 진정시켰다.

“그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러니 흥분 좀 가라앉혀.”

한진영은 조지훈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홍보 자료에 잘못된 내용을 담지는 않지. 그 정도로 그놈들이 바보는 아니야. 다만 내용을 담지 않을 수는 있지. 누락은 다른 의미니까.”

“누락이요? 설마 그들이 중요한 내용을 홍보 자료에서 빠뜨렸다는 건가요?”

“이제 그걸 알아보도록 하자.”

“네?”

한진영이 지갑을 열어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진영은 지갑을 닫은 뒤 수표를 내려다보고 있는 조지훈에게 말했다.

“수표 가지고 가서 펀드 가입하고 와봐.”

“네?”

“조 비서가 직접 두리은행에 가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설명을 듣고 와. 그 5백만 원을 들고 가서 말이야.”

한진영은 지갑을 품에 넣으며 웃었다.

“직접 듣고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제일 좋아. 그들이 무엇을 빼먹고 숨기려 하는지 아는데 이만한 게 없지. 지금 바로 가. 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설명 다 듣고 녹음도 해와. 알았지?”

조지훈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수표와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남의 회사 펀드에 가입하라는 이야기를 들을 거로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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