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창이 마련됐다
세이지 자산운용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태훈 로펌의 대표변호사이자 태훈 로펌의 설립자인 조준범 변호사가 세이지 자산운용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한진영과 마주 앉아 한진영이 내민 서류를 함께 온 파트너 변호사들과 검토했다.
그리고 눈에 걸쳐진 안경을 접어 안경집에 넣으며 말했다.
“문제없어 보입니다. 업무상에 선의로 한 행동이 회사에 피해를 입혔을 때 법원에서는 직원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판례가 다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창운 씨의 경우에는 이번 건 외에 회사에 많은 도움을 줬던 사례들이 있는 만큼 고의로 회사에 손해를 입히려 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힘을 실을 수 있습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염려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조준범 대표는 서류를 함께 온 변호사에게 챙기도록 한 후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이제 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조준범은 한진영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한진영을 살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우리입니까?”
“뭐가 말씀입니까?”
“왜 우리에게 의뢰하신 겁니까?”
조준범의 표정에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웃는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모습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묻고 있었다.
그런 조준범과 달리 한진영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한진영은 가만히 웃으며 조준범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세이지와 동우는 파트너 이상의 끈끈한 관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업무적으로도 그렇고 사적으로도 그렇고…… 동우의 멤버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조준범은 조금 전 이야기했던 서류가 들어있는 파트너 변호사의 가방을 손으로 두드리고 말했다.
“이런 류의 사건은 당연히 동우에게 건너가야 할 것이지요. 특별히 한 대표님이 신경을 쓰는 직원을 영입해오는 데 걸림돌이 될만한 사건이었으니 더 믿을만한 곳에 맡겨야 정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준범은 한진영을 향해 경계하는 눈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처음 새롭게 인연의 물꼬를 틔어보자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동우와 세이지 간에 무언가 일이 크게 틀어진 게 있는지 의심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런데…….”
“알아보니 아무 일도 없었지요?”
한진영이 웃으며 오랜만에 맞장구를 치자 조준범이 큰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뭡니까? 왜 저희에게 의뢰한 겁니까?”
“그래서 직접 오신 겁니까? 보통 이런 일에는 시니어급을 내보내실 텐데 말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기업 간에 분쟁이나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칠만한 혹은 우리 로펌의 미래와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 실무자를 내보내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런 일에까지 제가 나서지는 않습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시군요.”
“제가 잘못 알고 있다고요?”
“네.”
한진영은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로 말했다.
“이번 건이 기업 간의 분쟁이나 나라에 영향을 미칠만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태훈 로펌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건입니다.”
“이번 건이 말입니까?”
조준범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함께 온 파트너 변호사를 돌아봤다.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에서 무언가가 빠져있는 게 있느냐는 표정의 조준범이었다.
그러나 파트너 변호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준범은 고개를 젓는 파트너 변호사에게서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다시 보고 물었다.
“우리 로펌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세이지와 파트너쉽을 맺을 수 있는 물꼬를 틘 사건이니까요.”
조준범은 한진영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농담을 하신 겁니까?”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태훈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조준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몸은 뒤로 물러났지만, 눈은 한진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짐작조차 하지 못한 한진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시선을 한진영에게 고정해 놓고 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준범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말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순수하게 앞으로 태훈과 함께하고 싶어 사건을 의뢰한 겁니다.”
“동우와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한진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준범은 단호한 말투로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뒤로 물렸던 몸을 앞으로 내밀며 이야기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도대체 ‘왜?’ 우리에게 사건을 의뢰했냐는 것을 알아보자는 의미가 첫 번째고 두 번째로 더는 장난치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겁니다.”
“제가 장난으로 느껴지셨습니까?”
“아닙니까?”
조준범은 한진영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준범을 향해 아니라는 말없이 가만히 조준범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준범은 그런 한진영의 시선을 쏘아보며 말했다.
“동우와 우리의 관계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알고 계시면서 저희에게 의뢰했다 이 말입니까? 설마…… 동우에서 시킨 겁니까?”
“하하하.”
조준범의 말에 한진영은 크게 웃고는 조준범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조준범은 함께 온 파트너 변호사들을 향해 잠시 나가서 기다리라는 뜻을 전했다.
한진영도 조지훈을 비롯한 비서들에게 나갈 것을 이야기했다.
사무실을 채우고 있던 태훈의 변호사들과 한진영의 비서들이 모두 자리를 떠나자 회의실에는 한진영과 조준범만이 남게 됐다.
조준범은 썰렁하게 느껴질 것만 간은 회의실을 둘러본 후 한진영에게 말했다.
“이제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의뢰한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 그대로입니다. 태훈과 함께하고 싶어 의뢰한 겁니다.”
“한 대표. 장난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사람들을 내보내고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장난이 아닙니다. 조금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는 진지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인상을 쓰던 조준범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을 가늘게 떴다.
한진영은 따가운 시선의 조준범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태훈과 동우가 앙금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동우와 인연이 깊은 우리가 의뢰한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진심은 이겁니다. 태훈과 함께하고 싶다. 동우가 아닌…….”
“그 말은…… 동우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겁니까?”
“바로 알아들으셨군요. 맞습니다. 동우와의 관계를 끊을 작정입니다.”
“왜?”
가늘게 떠져 있던 조준범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한진영이 말한 태훈과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조준범은 이곳에 오기 전만 해도 한진영이 동우와 태훈을 양손에 쥐고 흔들려 하는 게 아니냐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동우가 세이지를 시켜 태훈에게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게 분명하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세이지의 한진영은 동우를 내려놓고 태훈과만 손을 잡겠다고 하니 조준범의 머리는 복잡하게 엉키기만 했다.
한진영의 의도가 무엇인지 하나도 가늠하지 못하게는 조준범을 향해 한진영이 대답했다.
“동우와는 함께 가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리스크요? 어떤 리스크를 말씀하는 겁니까?”
여전히 조준범은 이해하지 못하게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오히려 좋은 것 아닙니까? 지금같이 동우에 호의적인 정권 아래에서는 동우라는 거대한 친구가 있는 것만큼 든든한 게 없을 텐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우의 탑층에 괜히 올라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동종업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우와 파트너쉽을 맺는 것이 곧 성공이 보장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리스크라니요? 저는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한진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현 정권이 동우에 호의적인 것을 이용하여 동우가 무리하려 하고 있습니다.”
“동우가 무리한다고요? 구체적으로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설마 인사권을 가지고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언제나 승리 뒤에는 인사권이라는 결과물이 따라오고는 했습니다. 동우 전에도 그랬고 훨씬 이전인 왕조시대에도 항상 승리한 곳은 인사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 인사권을 휘두르는 건 저희가 보기에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할 말은 한 조준범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준범을 바라보고 빙그레 웃었다.
조준범은 한진영의 미소를 보고 자기가 잘못 짚었음을 알게 됐다.
“인사권이 아니었군요. 그러면 또 다른…….”
조준범은 말을 하다 말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근 동우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회전문 인사의 중심지로 지목되어 인사권도 요직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제한된 인사권이 총리를 비롯하여 알짜배기 장관직과 대통령 비서실이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없는 자제였지만 어쨌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에 사람들은 동우 로펌이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동우가 무리한다고 이야기한 한진영이었다.
조준범은 동우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한진영이 무언가를 알고 있어서 동우와의 관계를 잘라내려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조준범은 신중한 표정으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동우가 무슨 안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까?”
“거기까지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혹시 동우와 사이를 정리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겁니까? 예를 들어…… 세이지까지도 휩쓸릴 수 있는…….”
말을 아끼는 듯한 한진영의 모습에 조준범이 조심스럽게 돌려 이야기했다.
하지만 돌려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안에 내용은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한진영은 잔뜩 기대에 찬 표정을 하는 조준범을 향해 살며시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라고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비슷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잔뜩 한진영 쪽으로 몸을 수그리고 있던 조준범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는 기쁨에 겨워했다.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면 어쩌면 조준범의 입에서 환호가 터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기뻐했다.
조준범은 잠시 온몸을 비틀고 난 후 한진영을 향해 사과의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잠시 추태를 보였습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동우와는 깊은 악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악연이 있지요.”
잠시 말을 멈춘 조준범은 고개를 크게 끄덕인 후 이야기했다.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앞으로 세이지와의 좋은 관계를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도 태훈과의 좋은 관계를 기대하겠습니다.”
한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준범도 자리에서 따라 일어나 한진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앞으로 해외 쪽과 관련된 업무도 다수 진행할 예정입니다. 인수 계약부터 시작해서 소송까지 많은 법률적인 부분을 태훈에 의지할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해외파트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국 쪽은 물론이고 호주와 일본 그리고 유럽 쪽까지 파트너쉽을 맺은 로컬 로펌들이 다수 있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한진영과 조준범은 가볍게 마무리 인사를 나눴다.
조준범은 우선 의뢰한 일부터 시작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이지를 떠났다.
한진영은 떠나는 조준범의 뒤를 바라보고 혼잣말했다.
“동우를 찌를 창이 마련이 되었네.”
한진영과 함께 태훈 로펌 사람들을 배웅하던 조지훈은 한진영의 혼잣말에 조심스럽게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태훈 로펌을 이용해서 동우 로펌을 공격할 생각이십니까?”
“공격은 내가 아니라 태훈이 하겠지. 나는 약점만 알려줄 뿐이야.”
“경기증권 이야기를 태훈 측에 이야기하신 겁니까?”
조지훈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어깨를 손으로 토닥인 후 몸을 돌렸다.
“경기증권 이야기를 뭐 하러 벌써 하나?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노골적으로 하는 게 아니야. 뉘앙스만 전해줘도 충분해.”
“뉘앙스만요?”
“그래. 그런 게 있으니 찾아보라 하면서 툭 하고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태훈과 동우의 관계는 그렇거든.”
“그 정도로 사이가 안 좋습니까?”
“안 좋다는 거로 표현이 어려운 사이? 뭐 그래.”
한진영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조지훈은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에도 걱정이 됐다.
“대표님. 그럼 동우에는 뭐라고 설명하실 생각이십니까? 태훈에게 이번 건을 의뢰한 것을 동우가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몰랐다고 하면 되지.”
“네?”
조지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조지훈에게 이야기했다.
“때로는 뻔뻔하게 나가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어. 이번이 그런 때이고…… 몰랐다고 하고 다음부터는 태훈에게 의뢰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면 돼.”
“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조지훈의 모습에 한진영은 웃으며 옷을 손으로 털어냈다.
그리고 높아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펀드 출시가 언제라고?”
한진영의 말에 정신을 차린 조지훈이 대답했다.
“다음 주 화요일부터입니다.”
“경기증권 쪽 펀드는 성적이 어때?”
“지금까지 3조 가까운 자금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 페이스대로 진행이 된다면 5조를 모으겠다는 목표는 무난하게 달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5조…… 신나겠네.”
보고를 마친 조지훈이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우리에게도 경기증권 펀드의 성공이 영향을 미칠까요?”
“영향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신경 쓰지 마. 절대 경기증권에 뒤처질 일이 없으니까.”
“5조를 넘길 것으로 예상하신 겁니까?”
“내 목표는 5조가 아니야. 오히려 들어오겠다는 자금을 선별해야 할지도 몰라.”
“선별…… 이요?”
조지훈은 어떤 의미의 선별을 한진영이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가입하겠다고 판매처를 통해 신청한 고객을 어떻게 선별하겠다는 것인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