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모든 것이 거짓처럼 보인다
세이지를 찾는 기업들의 행렬은 계속됐다.
한창실업과 같이 거액을 내놓은 기업도 있었으며 때로는 10억부터 시작하여 분기마다 돈을 내놓겠다는 곳도 나타났다.
위탁 투자에 관심이 있던 기업부터 시작해서 위탁 투자가 있는 줄도 몰랐던 기업까지 많은 기업이 세이지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한진영이 맞아야 할 곳은 직접 한진영이 만나 투자 상담을 나누었으며 한진영이 나서지 않아도 될 곳들은 비서실을 중심으로 투자 상담을 진행했다.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이지를 찾은 기업들의 숫자는 50여 곳이 넘었을 정도로 바쁘게 기업들은 세이지를 찾았다.
조지훈은 한진영 앞에서 보름 동안 있었던 성과를 보고했다.
“방문한 기업의 숫자는 32곳이었으며 우리 쪽에서 출장 나간 기업의 숫자는 22곳이었습니다. 그중 계약을 체결한 회사는 23곳, 계약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 곳은 11곳입니다.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 곳은 지속해서 만남을 이어가 가입을 유도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렇게 13곳으로부터 받은 투자 금액은 약 7,500억입니다.”
“7,500억.”
조지훈은 7,500억이라는 말을 따라 한 한진영을 조심스럽게 살핀 뒤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 곳과 추가 투자 금액이 들어온다면 1조를 유치하는 것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조.”
한진영은 이번에도 조지훈의 말을 따라 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에 조지훈을 향해 물었다.
“개인 고객은 어떻게 되지?”
“지금까지 개인 고객의 가입 금액은…… 2,000억이 채 되지 않습니다.”
기업 고객으로부터 1조를 투자받은 것에 비해 개인 고객의 비중이 현저하게 작은 상태였다.
가입을 받은 기간도 길고 더 많은 채널을 통해 펀드를 노출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2,000억이라는 금액은 초라하다 못해 부끄럽게 여겨질 만한 숫자였다.
조지훈은 마치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를 한 경기증권에 비교하자니 더욱 작게 느껴지는 숫자였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올려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조 비서 잘못이 아닌데 왜 조 비서가 부끄러워해?”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2,000억이라는 숫자가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아니야. 그 정도면 됐어.”
한진영은 오히려 작은 숫자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더 많았으면 골치 아파졌을 뻔했는데 잘 됐어.”
“잘 됐다고요?”
“그래. 우리가 설정한 금액이 3조 아니던가? 그만큼이 딱 우리가 운용하기 좋은 금액이라 나온 숫자인데 그것을 훌쩍 넘겼으면 괜히 운용하다 어려움만 겪게 될 게 뻔해. 그러니 딱 좋아.”
“3조가…….”
“벌써 3조 넘겼잖아. 안 그래?”
“어떻게 3조가…… 아~”
조지훈은 한진영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이미 펀드를 출시하기 전부터 기풍철강 등으로부터 2조의 돈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던 세이지였다.
거기에 더해 기업 투자금으로 1조를 유치했으니 이것만으로도 3조의 돈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개인 투자금 2,000억을 더한다면 한진영의 말이 맞는 것이었다.
세이지는 목표로 했던 금액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한진영은 잠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린 뒤 조지훈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공식적으로 발표해. 이번 펀드는 설정 금액을 다 채워서 마감한다고 말이야.”
“마감이요?”
“그래. 그게 사실이니까.”
설정 금액을 3조로 하여 출시한 상품이었다.
외부로 드러난 가입 금액이 개인들 것만 보여 2,000억이 전부처럼 보이겠지만 한진영의 말대로 설정 금액은 모두 채운 상태였다.
이대로 마감한다고 하여 이상할 필요가 없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이대로 마감한다고 하면 일각에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요.”
“그렇겠지. 그러니 사실을 이야기하도록 해. 우리는 진짜로 3조 2,000억을 유치했고 이로써 마감하겠다고 말이야.”
“전부 다 말입니까?”
“어~ 우리 마음대로 기업을 공개한다면 고객 입장에서 기분 나쁠 수 있으니까 먼저 공개해도 괜찮은지 문의하고 여차하면 공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놓도록 해. 그다음에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공개하면 이상한 말들도 단번에 잠재울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뭐 다 들어줄 거야. 그들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는 이야기니까.”
한진영은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는 조지훈을 향해 웃었다.
***
세이지의 3호 펀드 마감 발표는 사람들 사이에 의외로 다가왔다.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공개된 펀드의 가입 규모가 2,000억을 겨우 넘어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세이지는 3조를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마감 발표 바로 전까지 2,000억이었던 금액이 어떻게 갑자기 3조로 늘어날 수 있는지 사람들은 의심의 눈으로 세이지를 바라봤다.
그러나 곧이어 발표한 세이지의 설명에 사람들은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펀드 판매 전에 2조의 자금을 유치한 상황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개인 고객들의 가입 추이가 현저히 느린 것에 시선이 쏠려 2조의 자금을 유치한 상태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세이지의 발표를 보고 알게 됐다.
그리고 이어 기업 고객들을 통해 1조의 자금을 더 유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게 됐다.
개인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한정된 공간에 기업들이 치고 들어가 앉아 버렸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허탈한 눈으로 세이지를 바라봤다.
기업들이 3조나 되는 금액을 집어넣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시장이 횡보장에 들어가며 투자처를 찾지 못하게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선택이 더욱 좋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허탈한 마음을 뒤로하고 대경TV를 무섭게 노려봤다.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고 기업에 먼저 기회를 준 것이 대경TV의 농락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경TV를 향해 사람들은 분노에 가까운 불만을 내보였다.
전화와 메일로 항의하는 것은 당연했으며 몇몇은 대경TV 본사로까지 찾아가 불만을 직접 이야기했다.
대경TV는 이렇게 불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변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잘못을 인정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세이지가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분노가 세이지로 향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세이지가 목표로 했던 3조의 설정액을 모두 채웠다며 펀드 판매를 조기 마감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건 사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기요?
-그렇습니다.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까요.
스튜디오에 나와 세이지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기자가 이제는 세이지를 향해 노골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세이지가 펀드 판매 마감을 발표하며 사람들에게 시달렸던 것의 반작용이 터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나운서의 눈빛을 못 본 체하며 계속 이야기했다.
-마감 발표 전까지 2,000억을 이야기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3조를 유치했다며 마감을 발표했습니다. 이건 사기를 넘어 시장 참여자들을 조롱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이미 펀드 출시 전에 2조의 자금을 유치했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기자님께서는 그 기사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거짓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조차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단호해 보이기까지 한 기자의 모습에 아나운서는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이지의 말은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뿐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다면 3조를 조기 마감했다는 것과 2조를 출시 전에 유치했다는 것 모두 세이지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증거가 없으니까요. 3조가 아니라 10조를 유치했다고 하더라도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기자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찍어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경기증권에 밀려 펀드 판매에 실패할 것처럼 보이자 세이지가 시장을 교란하는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됩니다. 금융감독원은 물론이고 거래소와 정부에서도 이번 사건을 묵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강도 높은 기자의 비판에 아나운서는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돌려 제작진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괜찮은지 물어보기 위한 시선이었다.
아나운서의 시선을 받은 제작진 그중에서도 PD는 오히려 기자의 발언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선을 보내는 아나운서를 향해 어서 진행하라는 손짓을 보내었다.
“장 PD님. 괜찮을까요?”
총괄 담당자인 장 PD는 걱정하는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조연출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모니터나 잘 봐.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PD님. 그래도…….”
“그래도는 뭐? 왜? 네가 연출하는 거야? 아니면 그냥 조용히 화면이나 쳐다봐. 건방 떨지 말고.”
장 PD의 서슬 퍼런 말에 날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띠리리.
장 PD는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고 급히 두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아 네. 네. 보셨습니까?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셨습니까?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한다고 한 건데……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조연출은 예의를 차리다 못해 극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조심하는 장 PD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 PD가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다음에도 꼭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지고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장 PD는 큰 소리로 말하고는 보이지도 않는 상대를 향해 허리까지 굽혀가며 인사했다.
조연출은 그런 장 PD의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모르긴 몰라도 한동안 오늘과도 같은 방송이 계속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한진영은 현황판을 잠시 바라봤다.
지수는 한 달이 지났건만 2,000을 기준으로 하여 2,100과 1,900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이렇게 지루한 시장의 횡보장 속에서도 나름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는 종목도 있었다.
바로 세이지가 대량으로 매수한 대서양화장품이 중국에서 한류 열풍을 타고 엄청난 실적 성장세를 보인다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25만 원에 매수한 50만 주의 대서양화장품의 주식이 단숨에 50만 원을 넘기고도 모자라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대서양 화장품의 실적 성장세는 서프라이즈를 넘어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만한 기록적인 성장세였다.
기관의 예측치에 두 배에 가까운 분기 실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음 분기 실적 예측치는 작년 말에 세웠던 연간 계획을 송두리째 뒤집게 만들기에 충분한 실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서양 화장품에 대한 기관과 외국인의 구애는 횡보장과는 무관하게 흘러갔다.
“내년까지 계속 들고 가라고 해.”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대서양화장품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한진영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대서양화장품의 가격은 여기서도 더 위에 자리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김준하 팀장이 프로그램에 의해 나온 예측가격이 너무 높다며 대표님께 여쭈어보라고 부탁했었습니다. 혹시 프로그램이 오류가 난 것이 아닌가 걱정하면서 말입니다.”
한진영은 빙그레 웃으며 조지훈에게 물었다.
“컴퓨터는 얼마를 이야기 했다는데?”
“중립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250만 원이 적정가격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만약 시장이 탐욕에 빠지게 된다면 350만 원까지 갈 수도 있지만 이는 5%가 안 되는 확률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시장이 중간에 급격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가정이 있는데 그렇더라도 대서양화장품은 200만 원 이상의 가격대를 지킬 것으로 예상됐다고 합니다.
조지훈은 김준하의 말을 전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25만 원짜리 주식이 서프라이즈 실적을 발표하며 50만 원을 돌파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혼란이 와도 200만 원은 무난하며 350만 원까지도 오른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조지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서양화장품은 1호 펀드와 2호 펀드 그리고 세이지 자산의 이름으로 운용하는 여러 펀드를 통해 도합 50만 주의 주식을 매수해놓은 상황이었다.
일절 운용팀의 전략에 터치하지 않는 한진영이 대서양화장품만은 직접 관여하여 수량과 가격대까지 컨트롤한 것이었다.
그런 대서양화장품이 10배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1,200억의 돈이 단번에 1조 2,000억이 된다는 이야기에 퀀트 프로그램을 설계한 김준하조차도 오류가 아닌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거 보면 김 팀장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
“대서양화장품에 대한 현재까지 나온 자료를 가지고 정확한 가격을 유추해 냈잖아. 참 대단해.”
한진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가 기억하는 대서양화장품의 고가는 정확히 300만 원이었다.
중간중간 조정이 나오기는 했지만 2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 상승에 상승을 이어가 결국 300만 원을 돌파하는 괴력을 보여주기까지 했다는 것을 한진영은 지난 시절을 통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폭등이 나오기 전에 바로 잡으라고 이야기한 것이었고 다른 것은 정리하더라도 대서양화장품만은 자기의 지시하에서만 움직이도록 못을 박아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김준하의 프로그램은 예측하여 대략적인 상승라인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중국에서 크나큰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과 그에 따른 실적 성장세 그리고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같은 것을 가지고 나온 결괏값에 한진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김준하 팀장에게 이상이 있는 게 아니니까 그대로 계속 진행해도 된다고 이야기해. 그리고 프로그램을 통해 나온 결괏값을 운용팀에게 전해주라고 하고…… 특별히 내 코멘트도 첨부하도록 해.”
한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조지훈이 똑똑히 기억할 수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기의 뜻을 전했다.
“컴퓨터가 계산한 것을 바탕으로 의심 없이 진행하기를 내가 원한다고 전해. 컴퓨터는 감정이 없는 만큼 논리적으로 생각하여 가장 합리적인 값을 유추해낸 것으로 보인다는 말도 함께 더하고…… 300만 원. 나 또한 300만 원을 생각했다는 말을 더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야 한 톨의 의심도 하지 않을 테니까.”
25만 원짜리를 잡고 300만 원을 기대했다는 한진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