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은 한진영이 하는 말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황당함을 모두 떨쳐내지는 못했다. 348화 도움이 더 되는 사람과 손을 잡겠다
한진영은 가만히 조지훈이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할 때까지 기다렸다.
조지훈은 혼란스러움을 떨쳐내고 한진영이 이야기한 것과 뜻하는 바를 기억하고는 모든 것을 외웠다는 뜻을 한진영에게 내비쳤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한가지 확인할 사항을 물었다.
“대표님.”
“어. 말해.”
“대경TV에서 아직도 비난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이쯤에서 기업 고객들의 명단을 공개할까요?”
“많이 심해?”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은 낮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지난번만큼은 아니지만 지속해서 비난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3호 펀드에 의심의 시선을 보내며 1호와 2호도 함께 묶어서 의심을 보이기도 하고요.”
“흐음~”
“이미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입니다. 공개를 꺼리는 곳도 없었고요. 명단만 공개하고 고객들이 확인해주기만 한다면 대경TV 쪽의 문제는 단숨에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지훈은 점점 언성을 높여가며 이야기했다.
“도대체 대경TV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공중파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대경TV와 관계를 끊어내고 다시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조지훈이 말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껴지는 것이 지금까지 대경TV와 이루었던 모든 관계가 부정되는 듯한 느낌까지 받은 조지훈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흥분할 필요 없어. 그리고 고객 리스트 공개하는 건 조금 더 지켜보자고.”
“더 말입니까?”
“아직은 아니야. 굳이 지금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조지훈은 한진영이 대경TV를 확인하지 못해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한진영을 설득하려 했다.
“대표님. 대경TV에서…….”
“조 비서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을 막아 세웠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한진영이 모르지 않다는 것이 표정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다시 한번 조지훈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놔둬. 뭐라고 하든지 반응하지 마. 반응할 때는 대경TV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 때야.”
“다른 곳이요?”
“그래. 다른 곳에서 이야기 나올 때까지는 그냥 놔둬. 어차피 대경TV가 아무리 떠든다고 바뀌는 건 없으니까.”
조지훈은 다른 곳이 어디를 이야기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거냐는 것도 묻고 싶은 조지훈이었다.
그러나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난 듯한 한진영의 모습에 조지훈은 가만히 한진영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저 한진영의 지시를 따라 다른 곳에서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한진영은 가만히 흥분을 가라앉히는 조지훈을 바라보고는 화제를 바꿨다.
“나 팀장은 어때? 잘 적응하는 것 같아?”
조지훈은 한진영의 질문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오자마자 바로 스타트업 리스트를 정리하는 모습입니다.”
“뭐 벌써 일해? 천천히 적응 좀 해가면서 해도 되는데.”
“생각보다 빨리 설정 금액이 모인 것에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 부담감이 아니라 책임감이 생기는 것이라면 좋은 일이지.”
“그리고 다음 주에 바로 미국에 넘어갈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미국?”
한진영은 나창운의 움직임에 흥미를 느꼈다.
그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한진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생겼다.
“과연 첫 번째 투자회사로 무얼 가지고 올까?”
한진영이 관심이 높아진 듯한 모습을 보이자 조지훈이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제가 물어볼까요?”
“아니야. 그러면 재미없지.”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급히 손을 휘젓고는 뒷짐을 지었다.
“궁금증은 참고 마지막에 해답을 얻었을 때 가장 큰 쾌감을 얻는 법이야. 궁금하다고 먼저 알게 되면 재미가 반감이 돼. 그러니 놔둬.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재미니까.”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다시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뒤를 따르며 조금 전 한진영이 이야기했던 다른 곳에서 이야기 나올 때가 어디인지 고민했다.
한진영의 말대로 직접 물어 해답을 얻기보다 고민하여 해답을 찾았을 때의 쾌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조지훈의 바람과는 달리 해답은 다른 곳에서 조지훈에게 다가왔다.
“실장님.”
비서실 직원이 급히 조지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조지훈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동우에서 대표님을 뵙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이번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동우에서…… 이번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네.”
조지훈은 비서실 직원의 말을 듣고 그제야 한진영이 말한 다른 곳에서 이야기가 나온다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됐다.
***
오랜만에 도착한 동우에 조지훈은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안에 들어가는 것은 한진영이건만 긴장은 밖에서 기다릴 조지훈이 더 많이 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조지훈의 긴장은 이제 곧 꼭대기 층으로 올라갈 한진영에게까지 전해졌다.
한진영은 동우 법률사무소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조지훈의 긴장을 풀어줬다.
“별일 없을 테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마.”
“대표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죽으러 들어가는 줄 알겠어. 괜찮아. 안에 들어가면 오히려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려 할 테니까.”
“위로요?”
“그래.”
바짝 긴장해있던 조지훈의 어깨는 한진영의 말에 단번에 풀어졌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한진영을 왜 위로하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한 조지훈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에게 미소만 띤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진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동우의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bar에 들어가자 밖에서부터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bar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조금 늦으셨습니다.”
한창 웃던 소리가 한진영의 등장과 함께 조용해졌다.
자리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들어온 한진영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예전만 못했다.
오히려 어색한 기류가 느껴지는 것이 한진영의 등장을 부담스러워하는 것만 같은 모습을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진영은 평소 이곳에서 보지 못하던 인물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최 부사장님도 오셨습니까?”
“하하하.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시고 김교철 대표님께서 허락하여 오게 됐습니다. 제가 온 게 의외인 것 같습니다.”
“어…… 좀 의외입니다.”
한진영이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박지훈 사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교철 대표님께서 보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함께 왔습니다. 아마 앞으로 함께 어울리게 될 것 같습니다.”
“함께요?”
한진영이 이번에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최종필과 박지훈 모두 이런 결정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역시…….’
한진영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애초에 최종필을 박지훈에게 가져다 대면서 이런 상황이 나올 것을 예상한 한진영이었다.
박지훈이 모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머지않아 최종필도 곧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생각한 대로 상황이 펼쳐지자 한진영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했다.
이다음의 상황까지도 자연스럽게 예상이 됐기 때문이다.
“VIP께서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안혁규 대통령 비서실장의 말에 한진영을 바라보던 박지훈과 최종필이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감읍하다는 표정으로 안혁규를 향해 연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안혁규는 그런 박지훈과 최종필을 향해 앞으로도 큰 일꾼이 되어 달라는 말을 전한 후 한진영을 곁으로 불렀다.
“와서 앉으시지요.”
“네.”
한진영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자기를 향해 시선을 보내는 박지훈과 최종필을 뒤로하고 안혁규의 곁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한 대표님.”
안혁규는 잠시 한진영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를 향해 고개 숙여 대답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안혁규는 잠시 한진영을 바라본 뒤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의 표정에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흠…….”
안혁규는 자기가 불러놓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기만 할 뿐 누구도 안혁규를 대신하여 한진영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한진영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자기를 대신하여 경기증권의 박지훈과 최종필을 모임에 끼워 넣으려 하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진영의 의도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진영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것이 한진영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에 한진영은 이들이 이러는 모습이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한진영은 민망해하는 사람들을 모르는 척 돌아보고는 안혁규를 향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기에 그러십니까? 마치 이곳에 더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정말로 그 말씀을 하려고 그러신 것은 아니시지요?”
“크흠. 아니. 그게…… 흠흠.”
괜히 헛기침을 내뱉은 안혁규는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는 뜻을 보냈다.
그러나 누구도 안혁규를 대신하여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한진영을 향해 안 좋은 말을 안혁규를 대신하여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혁규는 주변을 둘러보다 박지훈과 최종필을 바라봤다.
그들조차 한진영에게 말하기에는 곤란한 처지라는 것을 깨달은 안혁규는 다시 한번 큰 한숨을 내쉬고는 한진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휴우~ 한 대표. 한 대표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어떤 걸 이해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우리 모임에는 자리가 한정되어 있어요.”
안혁규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본 후 이야기했다.
“김 대표님이 모임을 만들 때부터 일을 집중하여 처리하기 위해서는 한정된 인원이 유리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한 대표.”
안혁규는 한진영의 손을 잡았다.
“한 대표가 나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준 것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여러 가지 조언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것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휴우~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나는…… 한 대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한 대표. 나도 최선을 다했다오.”
“한 대표. 나도…….”
“한 대표.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안혁규의 말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한진영에게 건넸다.
“그러니까 안 실장님의 말씀은 저를 대신해서 경기증권 분들이 모임에 합류하게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다소 격앙된 목소리의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홀로 이 상황을 연습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을 속으로 생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비록 제가 금전적으로 큰 이득을 드린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제가 낸 아이디어가 몇 가지인데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금전적인 부분은…… 세이지는 막 일어나는 회사가 아닙니까? 믿고 기다려 주신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정말 이래야만 하셨습니까?”
“우리는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네.”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한진영의 말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김교철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하자 자리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김교철은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둘러본 후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세이지에 이상한 이야기가 돌더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나도 알고 있네. 사실이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하나?”
김교철은 한진영을 향해 다시 말을 끊지 말라는 뜻으로 눈을 부라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김교철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모두 김교철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한진영만은 자리에 앉지 않고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김교철을 바라고 서 있을 뿐이었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이해하라는 말과 같은 번지르르한 말은 하지 않겠네. 현실을 이야기해야 자네도 받아들이기 쉬울 테니까. 여기 경기증권은 이번에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줬어. 그리고 시장에서도 호의적이야. 하지만 자네 쪽은 달라. 뭐 소문도 악의적으로 편집되어 있다는 것도 아네. 대경TV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 그쪽에서 세이지를 궁지에 몰고 싶어 괜한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아는 이야기야.”
“아시는데도 그러십니까?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경기증권은 우리를 위해 2,000억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네. 세이지는 얼마를 내놓을 수 있지?”
“2,000억이요?”
한진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김교철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세이지는 하지 못하는 일 아닌가? 2,000억을 내놓을 수도 없고 내놓았다가는 골치도 아플 테고…… 이상한 소문에 휩싸여 여러 사정기관에서 주목하고 있는 세이지가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중을 생각하실 수는 없습니까? 지금 당장은 곤란한 일에 묶여 있어 어쩔 수 없지만, 이번 펀드로 자리를 잡게 된다면 저희라고 2,000억을 내놓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그때 되면 경기증권은 더 많은 돈을 내놓을 수 있겠지. 이미 이쪽은 자리를 잡은 상태니까.”
김교철이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시선을 보내자 박지훈과 최종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김교철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한 대표가 도움이 안 된 건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더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해하게. 그럼…… 다음에 또 좋은 곳에서 보세나.”
김교철은 이제 더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한진영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귀찮다는 김교철의 모습에 한진영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 이야기를 더는 듣지 않으실 생각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뵙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김교철을 비롯하여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잠깐.”
나가려던 한진영은 김교철의 부름에 잠시 자리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