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하고 싶은 것 모두를 펼쳐 보아라
한진영은 나창운과 함께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응접용 소파에 나창운을 앉게 한 뒤 나창운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1억 달러 투자에 그렇게 놀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운용해야 하는 자금 규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1,000억이 넘는 돈은 우리가 운용해야 하는 자금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진영은 나창운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나창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금까지 운용하던 자금의 규모와 확연히 다른 수준에 나 팀장님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빨리 껍데기를 깨고 나오셔야 합니다. 나 팀장님의 선택을 기다리는 무수한 회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나창운은 한진영이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한진영의 말대로 빨리 생각의 틀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1억 달러, 1,000억이 넘는 돈이 아무리 크다고 해 봤자 3조라는 자금의 1/30밖에 되지 않았다.
목표로 했던 1,000만 달러를 유치했다면 코인 그라운드와 같은 회사 300곳을 찾아야만 펀드 자금을 모두 집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하루에 하나씩 찾아 집행해도 1년이 꼬박 걸리는 일.
그리고 성과가 나오기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세월.
투자자들은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움직임을 빠르고 과감하며 크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한진영은 그걸 나창운에게 알려주고 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이쯤 말했으면 나창운이 알아들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알고 있는 나창운이라면 알아듣고도 남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조금은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말했다.
“코인 그라운드 같이 중요한 사업장에는 우리 직원을 파견하도록 할 겁니다. 그 외의 사업장에는 묶어서 관리할 수 있는 관리자를 둘 것이고요. 돈만 주고 알아서 하기를 바라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으니까요. 나 팀장님은 그것까지도 다 염두에 두고 진행하셔야 합니다.”
“네. 이미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방안들이 몇 가지 존재합니다. 이른 시일 내에 그것들을 정리하여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나창운을 보고 살며시 웃었다.
“우리 회사는 양 축으로 움직일 겁니다. 홍 실장님의 운용파트와 나 팀장님의 투자파트로 말입니다. 그곳을 전적으로 믿고 맡길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나창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까지 숙이고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한진영은 그런 나창운을 바라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부 단속은 대충 정리가 됐고…….’
한동안 시장에는 큰일이 일어날 것이 없었다.
투자 관련된 일도 나창운에게 먼저 보여준 만큼 나머지는 안심하고 맡겨도 될 일이었다.
한진영은 내부 일에 묶여 있던 발목에서 벗어나 조금은 홀가분해졌음을 느꼈다.
이제 모든 힘을 외부로 투사할 수 있게 된 것에 한진영은 본격적으로 외부로 시선을 돌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진영의 생각대로라면 지금부터 조금씩 움직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코인 그라운드의 타일러 버드는 바로 다음 날 세이지와 계약을 체결했다.
총액 1억 달러에 3차에 지급되는 투자는 10%의 코인 그라운드 지분을 확보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이 이루어지게 됐다.
만약 증자하더라도 세이지가 우선이 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 있었으며, 주요 의사결정 단계에 세이지의 의견이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된 계약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굉장히 무례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항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타일러 버드는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코인 그라운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지키고 망하느냐 아니면 자존심을 버리고 생존하느냐의 선택에서 타일러 버드는 생존을 택했고 1억 달러의 계약에 사인했다.
한진영은 이런 타일러 버드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코인 그라운드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을 타일러 버드에게 건넸다.
또한 코인 그라운드가 성장하는 것을 넘어 나스닥 상장을 노리고 있다는 말로 타일러 버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줬다.
타일러 버드는 10년 안에 상장하며 빌리어네어 부자 반열에 오르게 될 거라는 한진영의 말을 가슴에 품고 세이지 문을 나섰다.
세이지와 코인 그라운드의 투자계약 체결 소식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화제가 많이 됐다.
시리즈 A급의 투자를 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회사가 단번에 시리즈 C급의 투자를 받은 것에 사람들은 적잖이 놀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이런 투자를 통해 코인 그라운드가 더는 자금 압박을 받지 않은 채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에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코인 그라운드를 바라보게 됐다.
그리고 이런 기회가 왜 자기에게는 오지 않은 것인지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달콤한 유혹과도 같은 말이 떠돌았다.
코인 그라운드에 투자한 회사가 또 다른 투자처를 찾고 있다.
투자받기를 원하던 기업들은 뜻하지 않은 소식에 모두 대한민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코인 그라운드에 통 큰 투자를 결정한 대한민국의 투자회사가 이번에는 자기들을 위해 투자를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시장에 기대감이 커지자 나창운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메일과 팩스기기가 하루에도 수십 통씩 종이를 뱉어낼 정도로 세계에서 회사소개서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개서를 세이지는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
직접 발로 뛰지 않아도 알아서 연락해오는 것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3조라는 돈을 적절히 분배하여 괜찮은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들이 직접 소개서를 들고 찾아온다고 해도 직원을 채용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찾아온 회사들을 분류하고 선별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기에 세이지는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여 채용했다.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과 홍콩 등에도 세이지는 지사를 설립하려 했다.
투자한 회사를 손 놓고 지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관리감독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세이지의 이런 광폭 행보는 지루한 주식시장에 신선하게 다가갔다.
횡보에 횡보를 거듭하고 있어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주식시장에 그나마 세이지의 움직임이 화제가 된 것이었다.
시장 참여자들은 세이지가 투자하는 회사들을 주의 깊게 보려 했다.
세이지의 성공률을 생각했을 때 투자한 회사들이 상장한 뒤에 잡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 날개를 달아준 일이 주식시장에서 벌어졌다.
대서양화장품 서프라이즈 실적발표.
전 분기 대비 30% 영업이익 상승.
전년도 대비 350% 영업이익 상승.
중국 시장 점유율 1등.
세이지가 과감하게 투자했다고 소문이 난 대서양화장품의 실적이 또 한 번 시장을 놀라게 했다.
서프라이즈를 넘어선 쇼크에 가까운 실적 상승이 지난 분기에 이어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실적 성장세가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증명한 순간 모든 계산이 바뀌고 말았다.
대서양화장품에 관한 목표주가가 30만 원대에서 단번에 60만 원 대로 수정되어 발표됐다.
시장은 그런 목표주가조차 늦다는 모습으로 폭등에 폭등을 이어가며 단번에 100만 원에 안착하고 말았다.
대서양화장품에 관한 추천을 세이지는 25만 원에서 했었다.
중국 시장에 관한 이야기도 세이지가 가장 먼저 했으며 250만 원 이상의 목표주가를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25만 원이라는 주가가 부담스러웠던 개인들은 매수하기를 주저했다.
25만 원짜리보다 2,500원짜리가 더 많이 오를 것 같다는 심리적인 위축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주가가 높으면 오르는 데 버거울 거라는 주식에 갓 입문한 사람들이나 할만한 생각을 하며 대서양화장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대서양화장품이 세이지가 추천한 뒤 4배가 올랐다는 것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승 이유 또한 단기성 호재 혹은 확실하지 않은 루머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실적 바탕이었다는 것에 사람들은 세이지가 하는 말을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지금 잡아도 세이지가 이야기한 곳에 팔았을 때 2배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서양화장품에 대한 매수세가 100만 원이 넘어갔음에도 폭발적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됐다.
이런 시장이 펼쳐지자 사람들은 다음에 눈을 돌렸다.
지루한 횡보장에 세이지가 한줄기 비를 내려줄지 모른다는 심정으로 목을 치켜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
회의실에는 나창운과 한진영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꺼번에 인력을 채용하며 나창운의 팀은 이제 본부급으로 격상됐다.
이제 명실상부 세이지 자산운용의 한 축이 된 투자본부였다.
한진영은 나창운이 가지고 온 리스트를 살핀 뒤 그대로 리스트를 나창운 쪽으로 밀었다.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 본부장님이 결정하여 움직이셔도 됩니다. 전권을 드릴 테니 나 본부장님의 뜻대로 움직이세요. 단…….”
한진영은 나창운에게 내민 리스트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제가 투자를 만류하거나 혹은 투자금을 회수하라고 할 때는 제 말을 따라야 합니다.”
“네. 물론입니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것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유도 말씀해주지 않으시고요?”
“네.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한진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뒤 리스트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뭐 제가 투자하라고 이야기하는 곳에 투자해야 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보다 대표님의 회사 보는 눈이 더 정확하다는 건 저도 인정하고 세이지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부분이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창운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나창운을 향해 웃으며 다시 리스트를 나창운 쪽으로 밀었다.
“그것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나 본부장님 뜻대로 하세요.”
나창운은 리스트를 거둬들이며 한진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 저를 너무 믿으시는 것 아니십니까?”
“하하하. 나 본부장님의 입에서 그런 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저를 향한 믿음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제가 잘못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대참사입니다.”
나창운은 조심스럽게 자기의 생각을 내보였다.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배부른 소리라고 말하겠지만 진심으로 나창운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었다.
관리하는 돈의 규모가 3조였다.
3,000억도 많다고 해야 할 판에 3조를 자기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나창운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솔직한 나창운의 모습에 오히려 신뢰가 갔다.
허울 좋은 사람들이 보이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보다 걱정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욱 신뢰 갔다.
한진영은 나창운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투자는 열 개 중 하나만 살리는 일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실패에 두려워하지 마세요. 실패를 두려워해서야 투자라는 것을 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실패도 실패지만…….”
“하하하. 나 본부장님께서 그 돈을 가지고 다른 곳에 쓰실 분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우리 시스템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고요.”
한진영이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나창운은 잘 알고 있었다.
한진영의 말대로 세이지의 시스템은 물 샐 틈 없이 모든 직원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자금의 이상흐름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패턴이 보일 때면 이내 비서실 산하 통제 센터에서 연락이 오고는 했다.
버튼을 누르는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모습에 다른 짓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시스템이 세이지에는 구축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게 IT부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스템과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은 전략실의 작품이라는 것도 나창운은 잘 알고 있었다.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겼다고 하더라도 목줄이 채워져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금은 이미 충분히 확보된 상태이고 인원도 계속 채워 넣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사를 비롯한 인프라도 착실히 넓혀가고 있고 자료를 비롯한 정보전도 어디와 비교하더라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한번 하고 싶은 것 모두를 펼쳐 보세요. 뒤는 제가 책임질 테니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나창운은 비장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밀어주겠다는 데 계속 싫다고 할 정도로 나창운은 바보가 아니었다.
살면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잡은 것이었고 나창운은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10개. 세계적인 기업이 될 곳 10개를 찾아내어 대표님 아래 놓아드리겠습니다.”
“10개를 밑에 깔게 된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하하. 기대하겠습니다.”
한진영에게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곳 10곳을 찾아내 오겠다는 약속을 한 나창운은 인사를 하고 한진영의 사무실을 나섰다.
똑똑.
나창운이 한진영의 사무실을 나간 지 두어 시간이 지나갔을 무렵 조지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일찍 오셨군. 안으로 모셔.”
오늘 세이지로 오겠다는 약속을 한 정병선이었다.
한진영은 약속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한 정병선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정병선이 밝게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과 악수를 한 후 조금 전까지 조지훈이 앉아있던 소파로 정병선을 안내했다.
“잘 지내셨지요? 오늘 오신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나 했습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잘 지내신 것 같습니다.”
“제 얼굴에 그렇게 표가 나던가요?”
“네. 표가 많이 납니다.”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이 웃으며 얼굴을 손으로 훑어냈다.
“그 왜 기억하십니까? 수서발 고속철도 사업이요.”
“아~ 그거요? 사업이 진행되던가요?”
“진행되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 뒤면 사업부가 철도공사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본격적으로 사업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빠르네요.”
“네. 굉장히 빠릅니다.”
한진영은 얼굴에 웃음기를 참지 못하는 정병선을 바라보고 같이 웃으며 물었다.
“지분 참여가 꽤 많이 됐나 봅니다.”
“많기는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합니다.”
정병선은 아니라며 크게 손짓했다.
하지만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한진영의 말대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꽤 큰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보였다.
“그저 조그마하게 곁다리로 참여한 정도입니다.”
“그거 자랑하러 오신 건 아니시죠?”
“자랑은요? 누구 조언을 받고 참여한 사업인 걸 제가 아는데 어찌 대표님 앞에서 자랑하겠습니까? 오히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러 왔으면 와야지요.”
정병선은 한진영을 향해 활짝 웃고는 말했다.
“그리고 감사 인사도 하고 선물도 드릴 겸 찾아왔습니다.”
정병선은 양손을 들어 선물을 들고 온 것 같은 손짓을 한진영에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