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당한 것에 이자와 지금까지 보인 내 노력의 값까지 더해 돌려준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몇몇 사건을 통해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말이 있었다.
동우가 사석을 사용한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동우를 비롯하여 멤버들에게 올 화살을 대신 맞아줄 사석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곳이 나타나며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기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할 뿐 그 이상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사석으로 이용된 당사자가 침묵하거나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소문 속의 이야기를 한진영이 꺼낸 것이었다.
그리고 사석의 주인공으로 자기와 세이지를 쓰려고 했다고 말하며 소문이 사실임을 이야기했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저도 소문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지난 시절 자기는 절대 동우의 사석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한진영이었다.
자기를 버리는 일은 동우에게는 팔다리를 잃는 것 이상의 피해가 갈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끝까지 함께하는 동료.
한진영은 동우와의 관계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동우는 한진영의 생각이 우습기만 하다는 듯이 가차 없이 한진영을 날려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죄를 나에게 뒤집어씌웠지.’
차라리 관계를 끊는 선에서 끝이 났다면 동우를 증오하는 마음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랐다.
좋은 끈을 놓쳐 아쉽지만 역시 쉽게 사람을 버리는 권력자들의 특성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하며 그러려니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동우는 그런 마음조차 사치라는 듯이 끝까지 악독하게 움직였다.
동우가 돈을 착복했음에도 마치 한진영과 한진영의 회사가 고객 돈을 빼돌린 것처럼 세상에 알리며 한진영을 버리는 돌로 써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한진영의 회사에 자금을 댔던 곳을 압박하여 자금을 회수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자금이 회수되자 시장에서는 한진영의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객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고를 피하고자 한진영의 회사에서 급히 투자금을 빼기 시작했다.
이런 자금 이탈은 결국 펀드런으로까지 이어져 한진영의 회사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여기서라도 끝이 났다면 한진영에게 재기의 기회가 남아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우는 한진영의 재기를 원하지 않았다.
철저한 몰락.
그들이 원한 건 모든 걸 한진영이 떠안고 심연 깊은 곳으로 빠지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돈을 착복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만으로 검찰이 움직이게 했다.
누가 보더라도 동우가 뒤에서 손을 쓴 것으로 법적 처벌까지 한진영에게 몰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한진영은 마지막으로 살려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동우에 찾아갔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찾아간 것이었다.
그곳에서 한진영은 김교철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겨우겨우 애원하다시피 만난 사람은 김교철의 비서인 박경진으로 그가 한진영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건넸다.
“힘이 없는 건 언제나 억울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세상 이치인 걸 말입니다. 하지 않았는데도 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억울하시다고요? 억울해하실 것 없습니다. 본인 능력이 모자라 그런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하시고 본인 능력을 탓하십시오. 힘이 있고 능력이 있었다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겠습니까?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한 대표님의 능력 부족이니 그걸 아쉬워하시며 다음 생에는 더 강한 힘을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오.”
한진영은 웃음도 나오지 않는 말을 들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말을 가슴에 품은 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내가 당한 것에 이자와 지금까지 보인 내 노력의 값까지 더해 돌려준다.’
한진영은 어금니가 갈릴 정도로 이를 악다문 채로 천천히 이야기했다.
“저를 사석으로 사용하려 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지요. 그게 그 대가에 관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서류입니다.”
조준범은 한진영을 바라본 눈을 내려 서류철을 바라봤다.
그리고 가볍게 서류철을 넘겼다.
두꺼운 서류철의 앞장을 몇 번 넘겼을 뿐인데 조준범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여 장이 넘어갈 무렵에는 더는 서류를 넘기지 못한 채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정말입니까?”
“뒷장이 그에 대한 증거가 담겨 있습니다.”
조준범은 놀란 얼굴로 급히 뒤편부터 확인했다.
증거가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해보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이 급히 종이를 넘기며 쓰인 것을 확인한 조준범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안에 담긴 내용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진영은 점점 조준범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리는 것을 확인하고 이야기했다.
“어차피 제가 드린 것 외에 따로 확인하실 테니 그때 자세한 것을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조준범은 한진영의 말에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한 표정을 지어 보인 조준범은 한진영을 향해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팔다리를 자르는 정도가 아닐 것 같습니다. 확실하게 날려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조준범의 말에 한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 나눴지만, 동우는 사석을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런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동우는 경기증권을 버리는 패로 사용하여 경기증권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겁니다.”
한진영의 말에 조준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조준범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한진영이 처음 팔다리를 자를만한 것을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할 때만 해도 반쯤은 믿지 않았다.
팔다리는 고사하고 손톱 밑에 상처라도 낼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던 조준범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서류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을 확인한 뒤 바뀌고 말았다.
이 정도 이야기라면 확실하게 동우를 작살 낼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의 말을 듣고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의 말대로 동우라면 빠져나갈 구멍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완벽하다 못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기회였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조준범은 더욱 아쉬움이 짙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도 한진영의 다음 말을 듣고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같은 내용이 서준일보에 넘어갔습니다.”
“서준일보요?”
조준범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놀란 표정이 지어졌다.
한진영은 그런 조준범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론을 이용하는 편이 가장 편한 길 아니겠습니까? 여론이 우리 편을 든다면 저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테니까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거로 끝이 아니니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동우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만으로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누가 되든지 간에 끝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동우와 끝을 볼 생각입니다.”
“그렇다는 건 이다음까지도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모든 게 준비된 상황입니다. 그러니 조 대표님께서는 믿고 움직이셔도 됩니다. 방향은 제가 알려드릴 테니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조준범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한진영은 그런 조준범을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조준범의 사무실에서 나오자 태훈 로펌 직원들의 시선이 한진영에게로 쏠렸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의 시선을 맞으며 태연하게 태훈 로펌을 나섰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태훈 로펌의 건물에서 나왔을 때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너무 다 알려준 것은 아닙니까?”
“뒤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거 말이야?”
“네. 굳이 그런 것까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나 싶어서 말입니다.”
조지훈의 질문에 한진영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웃었다.
“동우하고 원수로 살면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놈들이야. 오히려 점점 몸집을 키워가기까지 하고 있어. 그들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동우의 반대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 거 같아? 바로 그만큼 신중했다는 뜻이야. 동우를 향한 적개심만큼이나 약점이 잡히면 안 된다는 신중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는 뜻이지.”
한진영은 조지훈의 어깨에 올린 손으로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알아보고 또 알아본 뒤에도 자기들끼리 머리를 싸맬 거야. 움직여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겠지. 이번 일은 한 번 움직이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서준일보가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알리셨군요.”
“그래. 여론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했지. 그리고 뒤에 준비해 놓은 거로 동우를 끝낼 수 있으니 안심하고 움직여도 된다고 알린 거고…….”
“안 그래도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뒤에 또 준비된 건 무엇입니까?”
한진영은 조지훈의 질문에 웃으며 앞에 선 차를 턱짓했다.
어서 문을 열라는 한진영의 제스처였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에 차 문을 열면서도 한진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조지훈은 진심으로 한진영의 다음 준비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반쯤 차에 올라탔을 때 조지훈에게 말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도록 해. 태훈도 그걸 알고 있어서 다음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은 거니까.”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완전 차에 몸을 실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더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한진영의 말대로 당장 눈앞에 중요한 일이 놓여있는 만큼 다음을 생각하기보다 앞에 있는 것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을 태운 차가 태훈 로펌을 떠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서준일보는 인터넷판을 통해 기사 하나가 송출됐다.
***
서준일보에서 나온 기사는 특별한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경기증권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안에 내용 또한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최근 나온 펀드 중 문제가 있어 보이는 듯한 펀드가 있는 것 같으니 주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언제 어느 때 쓰이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일반적인 기사였다.
그래서 지면이 아닌 인터넷판을 통해 기사가 나왔는지 몰랐다.
그저 인터넷판을 통해 송출되는 기사 숫자를 맞추는 것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사는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주 후반 나온 월간 서준을 통해 관련 기사가 심층 있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펀드의 구조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운용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는 이야기까지 지난 인터넷판보다 세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기사였다.
그리고 기사 마지막에는 주의가 필요하며 당국의 조사 또한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지었다.
경고 이상의 주의를 주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처음 이야기가 나온 곳은 인터넷판이었으며 추가 기사는 월간지를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일간지를 통한 기사는 아직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런 기사가 나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성우와 문서영이 나란히 앉아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두 사람 앞에 앉아 A4용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펀드 수익률 ‘돌려막기’ 의혹.”
한진영은 종이에 커다랗게 쓰인 기사를 내려다보고 헤드라인을 읽었다.
문서영은 여전히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어떠세요? 이 정도면 강렬하지 않겠어요?”
“강렬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종이 위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문서영은 글을 읽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내일 아침 조간을 통해 나갈 거예요. 우선은 경제면이지만 어쨌든 이제 드디어 일간지에 기사가 나가는 거니 의미가 있는 거죠. 혹시 이상이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가지고 왔으니 보고 이야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가볍게 대답하고 다시 천천히 기사를 읽어 내렸다.
기사 내용은 지난번과 달리 굉장히 깊이가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증권회사에서 출시한 펀드가 ‘신종 CB 파킹거래’를 통해 ‘펀드 수익률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조 단위의 자금을 운용하는 펀드가 수십 개 코스닥 기업의 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사채 등에 투자한 뒤 광범위한 파킹 거래를 해왔다는 내용이었다.
파킹 거래는 채권의 보유 한도를 맞추기 위해 다른 증권사 명의로 채권을 매수한 뒤 수수료를 지급하는 편법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경기증권이 바로 파킹 거래의 수수료를 받아먹기 위해 자사 펀드로 코스닥 기업 전환사채 등을 매수하여 타사에 채권을 빌려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방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만약 인수한 채권에 문제가 생긴다면 수수료 몇 푼을 벌려다가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채권이 안정적인 기업이 아닌 코스닥 기업들이라는 것에 약점은 더욱 커 보이기만 했다.
그러나 경기증권은 이런 약점을 보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약점을 키워 수익률을 올리려 했다.
“현재 문제가 되는 펀드의 경우에는 코스닥 좀비 기업의 부실 자산을 대량 매입하여 파킹 거래를 일삼거나 한 펀드에 손실이 날 경우 다른 펀드 자금으로 손실을 메워 수익률을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한진영은 핵심이 되는 문장을 읽은 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문서영은 그런 한진영을 바라보고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좋은데요.”
“좋다고요? 그럼 이대로 바로 진행해도 될까요?”
“네. 딱 알맞은 기사인 것 같습니다.”
한진영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은 뒤 문서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 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뒤에 이 말을 추가하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어떤 말이요?”
“조만간 검찰에서 이 건에 관해 조사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에 넣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문서영과 이성우는 깜짝 놀랐다.
“검찰이…… 움직이나요?”
“이 기사대로라면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이건 심각한 문제니까요.”
한진영은 문서영이 가지고 온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