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탐욕을 보였다면 피해자가 아니다
경기증권의 결정은 업계에서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환매를 연기하거나 중단하는 결정은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간혹 문제가 생긴 펀드에 대해 환매를 연기하거나 중단하는 일이 있기는 했었다.
펀드가 거래한 상품이 잠시 딜레이가 생겨 예정보다 결제가 늦어진다거나 혹은 상품이 심각한 상태에 빠져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했을 때 고객들에게 사전고지 없이 환매를 중단한 후 손해액을 계산하는 과정을 거친 적이 타 증권사에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도 증권사나 자산운용사에서 출시한 개별적인 펀드에서만 벌어지는 일일 뿐 이런 식으로 다수의 펀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경기증권의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우였다.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보고 받았다.
“그래서 찾아갔던 고객들은 어떻게 됐다고 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다들 착하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우선 때려 부수고 시작했을 텐데 말이야.”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경기증권이 찾아온 고객들에게 공지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경찰? 하하. 역시 미리 준비하고 있었어.”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고되지 않은 집회라면서 소란이 벌어지면 바로 연행하겠다고 한 바람에 자연스럽게 모인 사람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긴 그런 준비 없이 일을 벌이지는 않았겠지.”
한진영은 재미있다는 듯이 조지훈의 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때?”
“당황하면서도 우선은 지켜보자는 쪽의 의견이 다수인 상황입니다.”
“그렇겠지.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으니까 말이야.”
한진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팔짱을 끼며 조지훈을 향해 지시했다.
“뒤에 준비해 놓은 것도 풀어.”
“바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터뜨려야 효과가 더 크니까.”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에 알겠다고 대답한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어?”
“혹시 그러다가 펀드 가입자들에게 피해라도 간다면…….”
조심스러운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아. 죄는 경기증권이 저질렀는데 고객들까지 휘말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거지?”
“네.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선의의 피해자라.”
한진영은 조지훈이 건넨 말을 나직이 따라 말한 뒤 코웃음을 쳤다.
“경기증권 고객들이 왜 선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선의의 피해자 아닙니까? 펀드에 가입한 이유로 졸지에 돈을 날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흐흐. 졸지에 날렸다라…….”
“아닌가요?”
조지훈은 한진영의 코웃음에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나 고민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향해 웃는 걸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들이 과연 선의의 피해자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한진영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조지훈에게 자기 생각을 설명했다.
“피해자는 맞아. 그러나 선의의 피해자는 아니야. 경기증권이 내세운 수익률이 얼마였는지 기억해?”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이 잠시 기억을 되짚은 뒤 대답했다.
“연수익률 30%를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래. 연수익률 30%. 이걸 보장해주겠다며 큰소리를 쳤어. 이게 정상적으로 보이나?”
한진영은 다시 한번 코웃음을 쳤다.
“보통 펀드 수익률이 한 자리 숫자야.”
“우리는…… 30%는 우습게 넘고 있지 않습니까?”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 우리는 30%를 우습게 넘기고 있지. 지금 같은 횡보장에서도 20%가 넘는 수익률에 상승장이 한번 펼쳐지면 50% 이상도 노리는 데 문제가 없지. 하지만 그런 우리도 30% 수익률을 보장하지 않아. 안 그래?”
한진영의 말에 핵심이 무엇인지 깨달은 조지훈이었다.
“보장 수익률 30%가 문제였군요.”
“그래. 그게 문제인 거야.”
한진영은 팔짱을 풀고 앞에 놓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책상 위에는 경기증권 펀드 가입 시 작성하는 계약서가 놓여있었다.
한진영은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달성이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말도 적혀 있지 않아. 마치 세상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처럼 굴었어. 그리고 그걸 보고 좋다고 돈을 마구마구 집어넣었고…….”
한진영은 고개를 들어 조지훈을 바라봤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상하다고 느껴질 만한 일인데 보장 수익률 30%라는 말에 탐욕이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면…… 벌 받아야지.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닌데 말이야.”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다 살려준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문제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탐욕을 보고 쫓아 들어가 손해를 봤다면 그에 대한 책임질 준비도 되어있어야 한다.
한진영은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탐욕에 절어 있는 사람들까지 신경 써줄 이유는 없으니까.”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비서실로 들어가 비서실 직원에게 잠겨있던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날 저녁 조지훈에게 봉투를 건네받은 세이지 비서는 서준일보가 아닌 시사바이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
세이지의 비서가 시사바이트에 모습을 드러낸 바로 다음 날 시사바이트에서 단독기사 하나가 인터넷을 통해 공개됐다.
군인공제회에서 매물로 나온 상조회사가 메트로폴리션이라는 회사에 인수됐다는 이야기였다.
내용만 보자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야기였다.
평범한 인수합병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을 파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시사바이트의 주장이었다.
메트로폴리션이란 회사의 채권을 사들인 곳이 바로 경기증권이 발행한 펀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션은 이렇게 번 돈을 경기증권의 펀드에 투자하며 돌려막기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의견이었다.
여기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경기증권이 상조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현금을 노리고 메트로폴리션을 앞세워 상조회사 인수에 나섰다는 것이었다.
펀드의 환매가 연기되거나 중단되며 자금난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경기증권이었다.
그런 경기증권이 현금이 풍부한 상조회사를 손에 넣는다면 자금난은 일시에 해소될 수 있었다.
경기증권은 바로 이것을 노리고 메트로폴리션이라는 회사를 앞세워 군인공제회 산하 상조회사 인수에 참여한 것으로 보였다.
시사바이트는 바로 이 점을 문제로 삼았다.
상조회사의 현금성 자산은 상조회사 가입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션이 상조회사를 인수하게 되고 뒤에 있는 경기증권이 상조회사의 현금성 자산을 건드릴 수 있게 되는 순간, 상조회사의 돈은 상조 가입자들이 아닌 펀드 가입자들의 환매 요청을 들어주는 수단으로 쓰일 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문제는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입찰 막바지에 등장한 메트로폴리션이 난데없이 단독입찰로 상조회사를 인수한 것이 경기증권의 로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메트로폴리션은 부동산 관련 회사였다.
상조회사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곳이 갑작스럽게 상조회사 인수에 참여한 것도 이상하고, 참여를 받아준 것도 이상하며, 낙찰받은 정황 또한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군인공제회와 정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만큼 현 정권의 수뇌부 쪽에서 어떤 압력이 나온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시사바이트는 주장한 뒤에 증거까지 내보였다.
메트로폴리션의 모 임원과 군인공제회 대의원인 국방부 소속 국장 그리고 둘을 마치 소개해주는 것 같은 청와대 비서실 소속의 비서관이 만나는 사진을 공개한 것이었다.
시사바이트의 기사는 공개된 순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넷판임에도 불구하고 클릭 수와 댓글이 서버를 마비시킬 정도였다.
경기증권 이야기가 새 국면으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
띵동.
띵동.
쿵쿵쿵.
벨 소리와 함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시간을 지나 이제 잠자리에 들만한 시간이었기에 소란스러운 소리에 한진영은 가운을 걸친 채로 월패드를 확인했다.
월패드 화면에는 씩씩대는 문서영과 그런 그녀를 말리는 이성우의 모습이 보였다.
띵동.
띵동.
쿵쿵쿵.
“진영 씨. 안에 있는 거 알아요. 진영 씨. 문 좀 열어봐요.”
잠시도 기다리기 힘들다는 문서영의 모습에 한진영은 가운을 여미고 현관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나갑니다. 문 부서지니까 그만 두드리세요.”
한진영은 여전히 울림이 남아있는 현관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잠시 들어가도 되죠?”
문서영은 한진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이성우가 안으로 들어오며 한진영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서영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한진영을 향해 큰 소리로 화냈다.
“진영 씨. 정말 그렇게 봤는데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뭣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모르겠지만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성우야 제수씨 모시고 소파에 앉아 있어. 늦은 밤이니 커피는 좀 그렇고…… 간단하게 언더락에 위스키 한 잔씩 따라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문서영의 양어깨를 잡고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래.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하자. 무슨 빚쟁이처럼 여기 서서 그러는 건 보기가 안 좋아.”
이성우의 말에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모습은 과하다고 느껴졌는지 문서영은 화를 내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문서영과 이성우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조금 뒤 한진영이 손에 언더락 잔을 들고 소파로 다가왔다.
“자 받아.”
한진영이 먼저 이성우에게 잔을 건네고 뒤이어 문서영에게도 같은 잔을 건넸다.
이성우는 한진영에게 잔을 건네받아 맛을 본 뒤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모습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야~ 이거 맛 좋다. 이거 뭐냐?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이렇게 좋은 술이 있으면 같이 좀 나눠 먹어야지. 왜 혼자 숨겨놓고 먹고 있었어? 앞으로 자주 불러서 같이 좀 마시자.”
한진영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성우가 일부러 호들갑을 떠는 것을 알고 웃으며 이성우에게 말했다.
“한 병 챙겨놓을 테니까 집에 갈 때 가지고 가. 올라올 생각하지 말고…….”
“어? 그러면 나야 좋지. 일부러 술 마시러 여기로 올라오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역시 나 생각해주는 건 너밖에 없다.”
이성우는 문서영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봐봐. 진영이가 이렇게 나를 생각한다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너무 화 많이 내지 마.”
“그건 당신과 진영 씨 간의 우정 문제고…… 나하고는 문제가 다르죠.”
문서영이 이성우를 향해 도끼눈을 하고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진영 씨.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뭘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시는 거예요?”
문서영의 말에 한진영이 잠시 생각하고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제수씨가 화낼만한 일이…… 혹시 시사바이트 기사 때문에 그러십니까?”
“잘 아시네요.”
문서영은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왜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시사바이트 쪽에 넘기셨어요? 그런 건 당연히 우리를 주셨어야죠. 지금까지 진영 씨 부탁으로 기사를 열심히 내고 있었는데 정작 중요한 건 다른 쪽에 넘기시다니……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문서영의 말에 한진영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서영과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을 자리에 앉은 채로 올려다봤다.
“왜 일어나?”
이성우가 홀짝이던 술잔을 내려놓고 한진영을 올려다본 채로 물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에게 웃어 보이고는 문서영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안 그래도 내일 직원을 통해 드리려고 했는데 마침 직접 오셨으니 오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준다고? 뭘?”
한진영은 이성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무언가를 서류 봉투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한진영은 문서영의 맞은편에 앉은 뒤 서류 봉투를 문서영에게 내밀었다.
문서영은 서류 봉투를 받아 든 뒤 안을 살폈다.
한진영은 그런 문서영을 향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선 확인해보세요. 그런 다음에 이야기하시죠.”
문서영은 한진영의 말에 천천히 서류 봉투에서 여러 가지 서류들을 꺼내 들었다.
이성우는 마시던 잔을 아예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문서영을 도와 서류들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종이의 맨 위에 적혀 있는 글을 읽었다.
“경기증권 최모 부사장 기업사냥꾼 세력과 결탁 의혹? 이게 무슨 말이야?”
“안에 읽어봐. 읽어보고 이야기해.”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서류로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서류를 반쯤 읽어 내린 문서영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이게 사실인가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사실입니다.”
“이걸…… 왜 우리 직원들은 몰랐던 거죠?”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 진실을 찾아내는 데 저희보다 조금 더 늦었던 걸 겁니다. 아무래도 저희는 이상징후가 발생한다면 빠르게 확인하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한진영의 설명에 문서영은 보던 것을 이성우에게 넘기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오늘 시사바이트 이야기는…….”
“이 일의 서두에 불과했던 거지요. 바로 기업사냥꾼 세력이 거느리고 있는 기업 중 하나가 메트로폴리션이니까요. 그리고 군인공제회 상조회사는 기업사냥꾼이 사냥해온 여러 회사 중 하나였던 것이고요.”
한진영은 이성우까지 다 살핀 것을 확인한 후 문서영에게 시사바이트에 자료를 제공한 이유를 설명했다.
“너무 한 곳에서 이야기가 다 나온다면 이야기의 무게감이 떨어질 것 같아 시사바이트로 분위기를 고조시킨 겁니다. 그리고 클라이막스는 서준일보에서 터트리려 했죠. 어떻습니까? 이제 좀 만족하시겠습니까?”
“제가 오해했나 봐요.”
한진영은 자기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한 문서영을 보고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내일 좋은 기사가 나오길 기대하며 한잔하시죠.”
“그래. 그러자.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이다.”
“그래요. 실수한 만큼 좋은 기사가 나오도록 제가 신경 많이 쓸게요.”
셋은 잔을 들어 올려 부딪히고는 내일 나올 기사를 기대하며 잔에 담긴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