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거꾸로 따져야 말이 된다
나창운은 사인노스 사람들을 배웅한 뒤 한진영이 있는 사무실로 찾아왔다.
“대표님. 모두 잘 떠났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그럼 바로 투자 관련 서류를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나창운은 평소 한진영의 스타일을 생각하여 바로 서류를 챙기겠다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뭐든지 빨리 진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특히, 투자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 빠른 진행을 선호했다.
어떤 때는 투자 미팅을 진행하기 전에 미리 계약서를 마련해 두기도 했으며 미팅을 마치고 상대측이 회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돈을 송금하기도 했다.
한번 결정 내린 것에 두 번 생각하지 않았고, 후회도 없는 사람이 바로 한진영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빨리 서류가 마련되어야 계약이 진행될 것이고 그래야만 제대로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다리라는 말을 하는 것에 나창운은 잠시 당황했다.
“기다리라면…… 다른 지시를 내리실 게 있으신가요? 아니면 계약서상에 특별하게 넣어야 할 문구나 조항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니요. 계약은 진행되지 못할 겁니다.”
“네? 계약을 진행하지 않으신다고요?”
나창운은 잠시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한진영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분명 조금 전에는 3억 달러를 투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하하하. 아닙니다.”
한진영은 손을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창운을 향해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야기가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창운은 한진영의 손짓을 따라 소파로 걸어갔다.
그러나 조금 전 너무나 뜻밖의 말을 들어서 그런 건지 그의 걸음은 평상시와 달리 주춤거렸다.
한진영은 그런 나창운의 어깨를 살며시 잡아 주무르고는 나창운의 반대편으로 갔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계약하고 싶어 해도 그럴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계약이 진행되지 못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진행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진행을 못 하는 거라고요?”
“맞습니다.”
“그게 무슨…… 혹시 중간에 누가 인터셉트를 해간다는 말씀이신가요?”
“역시 나 본부장님은 제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희 걸 뺏어간다는 말씀입니까?”
나창운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상도덕에 어긋난 행위입니다. 이미 우리와 구두로 투자를 진행한다는 것까지 마무리된 상황인데 그걸 하이재킹해간다는 건…… 이건 업계에서 가만둘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지요. 평소라면 가만두어서는 안 되는 일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네. 애초에 저는 계약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네?”
나창운은 복잡해지는 이야기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계약할 마음이 없으셨는데 3억 불의 제안을 건넸고, 그걸 다른 곳에서 하이재킹해간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아니. 그럼 왜 제안을 넣으신 겁니까? 어차피 다른 곳에서 계약할 건데 말입니다.”
나창운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나창운을 향해 차분히 설명했다.
“전후 관계를 나 본부장님의 말처럼 따진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맞지요. 하지만 거꾸로 따져 들어간다면 이해가 될 겁니다.”
“거꾸로요?”
“네. 누군가가 하이재킹을 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안을 건넸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계약하는 것을 보고 우리 것을 뺏으러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나창운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의 말대로 거꾸로 따져 들어가자 모든 것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창운은 상황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사인노스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던 건가요?”
“사기꾼입니다.”
“사기꾼이요? 사인노스가 사기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나창운은 한진영의 말에 얼굴이 꺼멓게 변했다.
스타트업 투자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사기꾼을 만나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투자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는 했다.
나창운 또한 사기꾼에 당해 투자금을 날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투자한 곳 중에 사기꾼이 섞여 들어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걸 무서워한다면 제대로 된 투자를 할 수 없으며 대박은 물론이고 성공적인 기업을 찾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기꾼을 한진영 앞에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사기꾼에게 당하는 일은 자기 선에서 끝나야만 했다.
투자 실패 또한 자기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그게 자기를 믿고 전권을 준 한진영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한진영 앞에 데리고 온 것도 모자라 자기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창운은 한진영을 향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진영은 이제는 꺼멓던 얼굴이 붉게 변한 것에 나창운의 생각을 읽고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속은 것은 나 본부장님만이 아니니까요.”
“또 누가 속았나요?”
속은 사람을 안다면 부끄러운 마음이 조금은 사라질 것 같아 물어본 나창운이었다.
“이제 사기를 치기 시작하니 아직은 없겠지요. 하지만 나중에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속게 될 테니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요?”
나창운은 한진영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한진영은 그런 나창운을 향해 웃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투자한다는 사실을 듣고 하이재킹하려는 놈들을 완벽하게 속이는 게 중요하지요.”
한진영의 말에 잠시 의문을 뒤로 접어둔 나창운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언가요?”
“가계약만 걸어 놓으세요.”
“가계약이요? 스타트업 투자에 가계약은…… 사인노스에서 반발이 심할지 모릅니다.”
어차피 계약을 진행하지 않을 곳이니 반발이 나온다고 해도 상관이 없기는 했다.
그러나 사인노스 이후를 생각한다면 투자회사의 반발은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나창운은 그걸 걱정한 것이었고 한진영은 그런 그에게 해답을 알려줬다.
“사인노스에게 우리와의 이야기를 외부에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한다면 그들도 크게 반발하지 않을 겁니다.”
“공개를 허락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 하이재킹이 들어올 테니까요. 우리에게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로 인해 시간을 벌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우리의 목표는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 오래 시간을 끄는 것입니다. 계약 체결이 안 됐다는 사실을 알고 하이재킹이 들어올 때까지 말입니다.”
나창운은 한진영의 말을 듣고 목표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계약 체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계약 진행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부에 정보를 풀어 자기들을 대신해 사인노스와 투자계약을 체결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었다.
나창운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가지를 던졌다.
“대표님.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하이재킹이 들어오는 곳이 어디입니까?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니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한진영은 나창운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동우 로펌에서 들어올 겁니다.”
“동우요? 거기는…… 투자회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로펌이 왜 스타트업에 투자를…… 그것도 하이재킹하면서까지…… 정말 동우가 하이재킹하는 게 맞는 겁니까?”
나창운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뜻밖의 대답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했다.
***
사인노스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온 곳은 미국에 위치한 약국 체인에서부터였다.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체인인 월스브로는 주주들에게 보내는 내년 시장 전망 예측에서 사인노스의 진단 기계를 통해 큰 폭의 매출을 기대한다고 말하며 사인노스라는 회사명을 처음 입에 올렸다.
뒤를 이어 대형 슈퍼마켓 체인과도 계약 체결을 눈앞에 뒀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사인노스라는 회사명이 여기저기서 나오게 됐다.
사람들은 사인노스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궁금해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회사가 연이어 약국 체인과 슈퍼마켓 체인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인노스의 CEO인 엘리자베스 무어의 외모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백인의 금발을 가진 젊은 여성 CEO.
남자들에게 점령된 실리콘밸리에 여성으로서 당당히 회사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사인노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엘리자베스 무어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여러 매체가 접촉했고, 그곳에서 엘리자베스 무어의 화려한 언변이 소개되며 관심은 이제 일부가 아닌 대중에게까지 번져갔다.
[CEO의 외모 속에 가려진 사인노스의 진단 기계는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
외모와 그녀의 출신 그리고 그녀의 화려한 언변에 이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녀가 개발 중이라는 기계였다.
그녀가 만든다는 기계는 의료계 자체에 혁신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직은 사인노스에서 제공한 키트에 혈액을 담아 보내는 것이 전부이지만, 기계가 완성만 된다면 보내는 수고 없이 약국과 슈퍼마켓에서 바로 100여 종에 이르는 병을 진단할 수 있었다.
사인노스에 보낼 때 드는 비용 50달러만으로도 의료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인데 기계가 완성되면 10달러 이하로 진단 결과를 받아들 수 있다는 것에 의료계 종사자들조차 흥분하고 말았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한 그녀와 그녀의 회사 그리고 그녀가 만든다는 기계는 마치 세상을 구할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유명해져 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회사에 대한민국의 투자기업이 투자를 결정했다는 사실은 바다 건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한진영은 신문 가득 사인노스에 관한 이야기가 쓰인 탁자 위의 신문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조금은 수척해진 표정의 김교철이 앉아 있었다.
김교철은 한진영의 시선을 따라 신문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내가 조금 무리해서라도 이야기를 채우라고 했지.”
“조금이 아닌 것 같습니다. TV를 틀어도 사인노스 이야기에 신문에도 온통 사인노스 이야기입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들어 김교철을 바라봤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자들이 저희 회사에도 엄청나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저희 집 앞에서도 몇몇을 만났고요.”
“어쩔 수 없지. 사인노스를 이야기하자면 자네 회사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니까.”
김교철은 까끌까끌하게 돋아난 수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어.”
“무엇으로부터 말입니까?”
“자네도 알지 않나? 경기증권 이야기.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김교철의 말에 한진영이 씁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경기증권 이야기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환매 중단이 된 펀드의 개수가 20여 개를 넘어간 순간 금융당국은 경기증권의 실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기증권 펀드 중 5개의 펀드가 수익률 -100%를 찍고 말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펀드가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0원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투자금만 3,000억에 달했다.
그리고 -60%가 넘는 손실을 보인 펀드의 종류는 10여 개에 육박했다.
금액적으로 1조가 넘는 돈이 순식간에 허공에 날아가 버리고 만 것이었다.
천문학적인 손해에 투자자는 물론이고 정부 당국조차 혼란에 빠졌다.
경기증권의 펀드는 정부가 인정한 펀드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빠르게 경기증권과 선을 그으려 했지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사를 진행하던 검찰이 공개 수사로 경기증권 수사를 진행하며 정부 관료 여럿이 경기증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김교철은 피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종필은 들어가야지.”
김교철은 건조한 말투로 계속 이야기했다.
“적당히 했어야지. 어쩐지 먼저 돈부터 쓰라고 할 때부터 이상했어. 무슨 큰 비결이라도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이야기한 것들이 결국 사기를 치는 것이었으니 나 참…….”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린 김교철은 한진영을 향해 불만을 토로했다.
“검찰 놈들도 그래. 내가 분명 기다리라고 했는데 애들을 어쩌지 못해서 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내가 얼마나 답답하겠나?”
“평검사의 반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제 검사 딱지 겨우 단 놈들이 반발한다고 그걸 막지 못하니 그런 것들을 믿고 내가 일을 어떻게 내어주겠나?”
김교철은 잔뜩 짜증 섞인 말투로 검찰에 대한 불만을 계속 이야기했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의 불만을 말없이 계속 들었다.
오히려 짜증 섞인 말이 한진영의 귀에는 맑은 하늘 아래 꾀꼬리가 울부짖는 것처럼 즐겁게 들리기까지 했다.
김교철의 짜증이 한진영에게는 기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자기 이야기만을 내뱉던 김교철은 말이 길어졌음을 느끼고 머쓱하게 웃었다.
“내 말이 길었지? 바쁜 자네를 내가 귀찮게 한 거 같으니 이거 참…….”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대표님이더라도 당연히 화가 났을 만한 일이었으니까요.”
“이해해준다니 고맙네.”
한진영은 고맙다는 김교철의 말에 자칫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김교철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생전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조차 듣기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을 만한 일은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김교철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김교철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먼저 나온 것이었다.
그것도 별것 아닌 일에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큼 김교철이 코너에 몰렸는지를 잘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