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잃을 것밖에 없는 인수합병
한참을 억울함을 토로한 박지훈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한 박지훈의 억울함이 이제는 최종필을 넘어 다른 곳으로까지 퍼져갔다.
“그들에게 퍼부은 돈만 수천억입니다.”
“어떤 돈 말씀입니까?”
한진영이 관심을 보이자 박지훈이 몸까지 살짝 틀어 앉고는 이야기했다.
“그 동우의 bar 멤버 말입니다. 그들 입에 제가 처넣은 돈이 수천억은 족히 넘는다는 말입니다.”
“수…… 천억이요?”
믿기지 않는다는 한진영의 모습에 박지훈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대출이나 투자형식으로 들어간 돈이지만…… 제가 회수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결국 그들 입에 들어간 것 아닙니까?”
박지훈의 말에 한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돈을 갚겠다고 하던데요?”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박지훈이 웃기지도 않는다며 물었다.
한진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우 로펌의 김교철 대표변호사님께서 직접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채워 넣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입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지금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는 것이 채워 넣지 않는다면 동우라고 하더라도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박지훈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돈을 넣겠다고 하던가요?”
“현물을 넣기에는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하고…… 우선 장부상으로만 채워 넣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벌어서 모두 갚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하하. 벌어서 말입니까?”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크게 웃은 박지훈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만큼 우스웠고 그만큼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크게 웃던 박지훈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서 사인노스 초기에 나오던 세이지의 이름이 사라지고 동우 컨소시엄 이야기가 나왔던 거군요. 사인노스로 돈을 벌어 갚겠다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 분명 협박도 있었을 테고요. 그 사람 성격상 무언가를 내주고 받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한진영도 씁쓸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는지 더욱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제가 한 대표님을 찾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찾기를 잘했다고요?”
“한 대표님도 동우에게 당한 게 많지 않습니까?”
“설마 같이 복수하자고 말씀하실 생각이시라면 저는 빼주십시오. 저는 복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요.”
한진영이 두려운 듯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추호도 동우와 척지고 싶지 않다는 표정의 한진영 모습이었다.
박지훈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자기의 지금 상황을 설명하며 설득했다.
“제가 왜 이렇게 된 줄 아십니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어서 그러십니까? 설마 지금 경기증권이 이렇게 되는데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분명 최종필이…….”
“최종필이 장난을 치는 바람에 회사가 기운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습니다.”
박지훈은 어금니를 꽉 깨물어 분노를 꾹 눌러 참은 뒤 계속 이야기했다.
“제가 도망 다니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거야 사람들이 박 사장님의 정보를 풀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제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 것 같습니까?”
“설마 동우가 흘린 겁니까?”
“개인신상이 모두 알려지는 게 보통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다못해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사법기관에서 나서서 차단해야 했는데 오히려 방관하고 알려지길 바란다는 듯이 가만히 지켜만 봤습니다. 이게 진정 정상적인 모습처럼 보였습니까?”
“그 말씀은 정부가 박 사장님에게 사람들의 분노가 모이길 바라는 마음에 그랬다는 것입니까?”
박지훈은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생각하여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한진영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박지훈의 눈빛에 점차 경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 그런 겁니까?”
“저에게 사람들의 분노가 모인 덕분에 채 수석과 현 차관 선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처럼 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전에는 이 장관과 심지어 안 실장의 이름까지 거론됐습니다. 조금만 더 치고 올라갔다면 현 정권과 유착관계까지도 알려졌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이야기들이 싹 다 사라졌습니다. 바로 저를 잡기 위한 탐정 놀이 덕분에 말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한 박지훈은 마치 제삼자가 된 것처럼 이야기했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의 모습이 우습기만 했지만,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에게 얻을 게 아직은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이야기한 박지훈은 억울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평상을 때렸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런 박지훈의 모습에 움찔했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냥 지나쳤다.
다른 곳이 아닌 노량진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주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지훈은 아픈 주먹 덕분인지 씩씩대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제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제가 이룬 모든 것은 물론이고 제 가족까지도 죄인이 될 겁니다. 저는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 없습니다.”
“제가 도울 것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그래서 뵙자고 한 겁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지난 인연이 있으니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은 감동한 눈빛을 보였다.
사실 한진영이 자기를 만나준다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자기를 외면하는 상황에서 한진영이 만나줄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멤버에서 퇴출당하는 이유 중에 하나를 자기가 제공했던 만큼 한진영이 연락을 받는다는 것조차 기대할 순 없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만나준 것도 모자라 도와주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건네고 있었다.
박지훈은 가슴 한쪽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제가 대표님께 양보해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던 걸 기억하십니까?”
양보를 먼저 이야기한 박지훈의 모습에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하고 있지만…… 저는 그걸 꼭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저에게 호의를 보여주시는 대표님께 드릴 건 없지만 약속한 것만큼은 지킬 생각입니다.”
도망자 신세에 약속을 지키겠다는 박지훈이 우습게만 보인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그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고 있던 한진영은 모르는 척 박진훈에게 물었다.
“설마 약속을 지키겠다고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만나 뵙고 나니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표님.”
“네. 말씀하십시오.”
“경기증권을 싼값에 내어드리겠습니다.”
“네? 뭘 내어주신다고요?”
박지훈은 무릎을 손바닥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지금 경기증권이 안 좋은 상황인 건 맞습니다. 사람들의 분노도 있고 자산도 많이 망가진 상태이고…… 하지만 대표님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내어드리며 대표님께 진 빚도 함께 갚으려 합니다.”
“제가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요? 그게 무엇입니까?”
“증권사 면허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부탁해도 모자랄 판에 마치 빚을 갚기 위해 손해를 보겠다는 듯이 이야기한 박지훈이었다.
한진영은 어이가 없는 제안을 하는 박지훈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박지훈은 한진영이 아무 말도 없는 것이 관심 있다는 뜻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진영을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지가 증권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저희가 증권사가 될 길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쪽이 지름길입니다. 지름길을 놔두고 굳이 돌아갈 이유는 없습니다.”
“지름길이 잘 닦인 신작로가 아니지 않습니까? 비포장도로인 것도 모자라 산사태로 중간중간 도로가 유실된 상태인데 굳이 그곳으로 갈 이유가 있습니까?”
“평범한 차라면 당연히 불편한 길로 다닐 이유가 없겠지요. 하지만 세이지는 평범한 차가 아니지 않습니까? 비포장도로라고 하더라도, 산사태로 유실된 도로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차가 아닙니까?”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박지훈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의 모습에 웃으며 물었다.
“좋습니다. 그럼 가격이나 들어보도록 하지요. 얼마를 생각하십니까?”
“3,000억. 3,000억에 제가 가진 지분을 넘기겠습니다.”
“3,000억이요?”
“네. 완전 거저입니다.”
박지훈은 한진영의 대답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듣고 싶다는 듯이 한진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박지훈이 기대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3,000억이라니요? 그 돈을 내고 경기증권을 손에 넣을 이유가 없습니다.”
“대표님. 경기증권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생각해보십시오. 3,000억이면 거저입니다. 세이지와 비슷한 시기에 모집한 펀드 자산만 5조입니다. 그 외에 경기증권 자산으로 남아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한다면 거저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장님. 5조짜리 펀드에서 지금 자산이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4조? 3조? 3,000억 보다 더 많은 돈이 남아있겠지요. 하지만 투자자들이 돌려달라고 하는데도 돌려주지 못하고 강제로 환매를 중단해 놓은 상황입니다. 일부 펀드는 -100%를 찍었다는 기사도 봤습니다.”
“그건…….”
한진영은 박지훈이 변명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
그러나 박지훈은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은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을 한동안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사장님. 제가 사장님께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300억.”
“300억이요? 그건 너무 쌉니다. 그 가격에는 팔 수 없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은 발작하듯이 반응했다.
300억은 자기가 생각한 가격의 1/10밖에 되지 않는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단호했다.
“300억. 그것도 사장님과의 인연을 생각하여 특별하게 책정한 가격입니다.”
“300억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평생을 키워온 회사입니다. 그런데 그걸 300억에…….”
작년까지 경기증권을 통해 받은 배당만 1년에 20억이 넘었다.
비상장 회사이기에 회사 지분이 모두 자기 것이었으며, 그로 인한 회사 장악력은 다른 곳에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배당 20억도 5조 펀드를 조성하기 전의 이야기로 펀드가 조성된 이후 지금 사태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200억은 족히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한 회사였다.
그런 회사를 300억에 사겠다니 박지훈은 배가 아파졌다.
그리고 한진영을 부른 것이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럴 거면 김교철에게 판다고 해도 300억 이상은 받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이 그대로 표정으로 드러난 박지훈을 한진영은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표정 변화가 조금은 가라앉았을 무렵 천천히 입을 열었다.
“300억에 박지훈 사장님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을 제가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이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박지훈이 한진영을 다시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머리를 가리켰다.
“지금 박 사장님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 이렇게 벙거지를 쓰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든 것 말입니다.”
“펀드 투자자…… 그걸 해결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걸 잠재워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잠재워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박지훈은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펀드 투자자들이 스스로 환매 신청을 중단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스스로 중단한다고요? 투자자들이요?”
“네. 어차피 투자자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투자자들이 나서서 동의하는 것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합병에 찬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박 사장님은 더는 이렇게 도망 다니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잘 풀린다면 펀드 자금을 횡령하거나 배임했다는 죄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겁니다.”
한진영의 말이 박지훈은 한진영에게 한 뼘이나 가까이 다가왔다.
한진영은 그런 박지훈의 모습에 잠시 뒤로 몸을 물렸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박지훈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지훈은 거의 붙을 듯이 다가와 한진영에게 물었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만약 안 된다면 합병은 무르면 그만입니다. 세이지도 그렇고 경기증권도 모두 비상장에다 주주도 따로 복잡하게 나뉘어 있지 않으니까요. 사장님과 저의 결정이 곧 두 회사의 결정이니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진영의 말대로 된다면 지긋지긋한 도망자 신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게다가 횡령과 배임까지 처리가 된다면 앞으로 법적 처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 분명했다.
물론 최종필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그거야 이제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기대했던 금액에 크게 모자랐지만, 한진영의 제안은 그 격차를 메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박지훈은 한진영을 향해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며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전했다.
***
한진영과 박지훈이 노량진의 허름한 평상 위에서 만남을 가진 사흘 뒤 한 가지 소문이 시장에 흘러나왔다.
세이지 자산운용과 경기증권이 인수합병을 진행 중이다.
평소라면 코웃음 칠만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경기증권이 소규모 증권사에 불과했지만, 자산운용 회사에 피인수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의 이유로 시장 참여자들이 코웃음을 쳤다.
세이지가 미치지 않는 한 경기증권을 인수할 이유가 없다.
시장 참여자들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자산운용사들은 물론이고 증권사들 사이에서도 뒤지지 않는 실적을 보여주는 세이지가 현재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경기증권을 인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증권이 보유하고 있는 펀드의 자산은 작살이 나다 못해 어디까지 살아있는지 아직도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복잡하게 엮어놓은 펀드들로 인해 경기증권조차도 제대로 확인이 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수한다고 하여 이득 볼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수합병에 사람들은 뜬소문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시장 참여자들 대부분이 믿지 않는 이 인수합병이 공식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뉴스가 서준일보를 통해 나왔다.
사람들은 왜 잃을 것밖에 없는 이 인수합병을 세이지가 진행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