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365화 (365/650)

365화 남은 카드는 우리뿐이다

사인노스의 진단 장비 출시 날짜 공개는 전 세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의 말대로 바이오산업 나아가 의료계의 혁신과 같은 기계에 모두의 눈과 귀가 쏠렸다.

대통령실의 발표 이후 사인노스의 엘리자베스 무어는 활발히 방송에 나와 홍보를 이어갔다.

대한민국에 대한 감사는 매번 방송마다 잊지 않고 전했다.

에디슨키트의 완성에는 절대적인 대한민국의 도움 때문이라는 말을 꼭 붙였다.

사인노스는 동우 컨소시엄의 투자유치 이후 날개를 달았다.

서로 사인노스에 투자하겠다며 달려들었고 사인노스가 투자자를 골라 투자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적인 펀드는 물론이고 명사와 유력인사들이 사인노스에 투자하기 위해 줄을 섰다.

찬조 연설을 조건으로 걸어 유명인의 투자를 받을 정도였다.

세계적인 경제지는 물론이고 학술대회에서도 초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심지어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만 부른다는 토크쇼에서도 엘리자베스 무어를 초대했다.

보통은 출연 스케줄이 연간 단위로 잡혀 출연이 확정되더라도 녹화는 짧아야 반년 뒤에 진행된다는 토크쇼였건만 엘리자베스 무어의 경우에는 출연이 확정되자마자 녹화하여 바로 그다음 주에 방영되는 파격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 무어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엘리자베스 무어의 행보에 표정 관리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서로 사인노스의 문을 두드리며 투자하겠다는 투자자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언론에서는 동우 컨소시엄의 탁월한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

바이오산업의 불모지와 같은 대한민국을 지금의 위치로 끌어 올린 것은 동우 컨소시엄 덕분이라며 찬양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언론을 비롯한 국민들은 앞으로 우리나라에는 밝은 미래만이 남았다며 지금 상황을 즐겼다.

이렇게 밝은 부분이 있다면 어두운 곳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사인노스라는 밝은 부분 때문에 가려진 경기증권 이야기가 수면 아래에서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었다.

정부의 강경 입장과 그런 정부의 스탠스에 따라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검찰과 금감원 측의 모습에 투자자들은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대로 돈을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경기증권의 상층부가 모두 법적 처벌을 받는다면 남은 펀드는 어떻게 될지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답을 알려주겠다는 듯이 정부에서는 경기증권의 가이드라인이 나왔다.

강제 청산도 불사한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어 새살이 돋아나길 바라는 편이 대한민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며 내린 가이드라인이었다.

경기증권의 투자자들은 모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손실을 확정 짓는 것과 강제 청산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세이지에서 제안한 손실 확정은 어쨌든 펀드가 살아있기는 하는 것이지만 강제 청산은 펀드 자체가 사라지며 시장에서 강제로 퇴출당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정부가 어떻게든 해주지 않겠냐는 희망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언론이 시끄럽게 떠들어 주기를 바라던 마음도 잃어버렸다.

언론을 비롯해 사람들의 눈에 더는 경기증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증권 투자자들은 고개를 돌려 세이지를 바라봤다.

서준일보에 광고까지 실어 경기증권 투자자들을 설득하려 했던 모습을 보였던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세이지도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쪽 고객들이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슬쩍 흘렸습니다.”

“슬쩍 가지고 되겠어? 노골적으로 흘려.”

한진영의 지시에 조지훈이 살짝 놀란 듯이 이야기했다.

“대표님. 그러다 경기증권의 고객들이 다른 곳을 찾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럴 일 없어. 이제 저쪽에 남은 카드는 우리뿐이야. 그러니 이렇게 찾아왔지.”

한진영은 회의실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훈은 문을 열어도 된다는 한진영 지시에 회의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한진영을 바라봤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들이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시원한 날씨건만 그들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훔치고 있는 것이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그들은 한진영이 들어오자마자 큰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한진영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큰소리에 살짝 놀랐다가 이내 안정을 취하고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세이지의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경기증권의 이종훈, 김우성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럼 앉으시겠습니까?”

한진영은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 후 맞은편에 앉았다.

이종훈과 김우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저희 사장님께서 계약을 언제 진행하실지 여쭤보라 말씀하셔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대표님. 저희 쪽은 준비가 마무리됐습니다. 고객들도 이제 인수합병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게 다 대표님께서 서준일보에 내보내신 편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편지 내용을 보고 눈물이 나서 혼났습니다. 직접 쓰신 겁니까? 너무 명필이라 잘라서 액자에 보관해 놓고 아이들에게 보여줄 정도였습니다.”

이종훈은 한진영에게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그들에게도 지금 자리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박지훈은 지난 만남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는 세이지와 한진영에게 속이 타는 것을 느꼈다.

한진영과 노량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바로 인수합병이 진행되지 못했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반대하는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길이 세이지밖에 없음을 깨달은 경기증권의 고객들이 인수합병에 찬성 쪽으로 돌아간 덕분이었다.

이렇게 호의적인 분위기로 상황이 바뀌었지만, 세이지에서는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박지훈 경기증권 사장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경기증권의 직원들에게 직접 찾아가 보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만약 자기가 움직일 수 있었다면 당장에 달려왔을 박지훈이었다.

그러나 아직 수사가 끝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박지훈은 대리인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종훈과 김우성은 그런 박지훈을 대신하여 자리에 온 것이었고, 그들은 이 자리에서 한진영에게 인수합병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대표님. 저희 사장님께서는 오늘이라도 당장 진행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종훈은 김우성과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아마 박지훈이 준 카드를 지금 꺼내도 되냐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느긋한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금 급한 건 한진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한 이종훈과 김우성은 다시 한진영 쪽으로 시선을 돌린 뒤 번갈아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는 가격을 인하할 계획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250억. 250억까지 인하할 마음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꺼낸 뒤 한진영의 반응을 살핀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피가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흐음~”

이야기를 다 들은 한진영은 안타까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종훈과 김우성은 한진영의 한숨에 가슴이 철렁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대표님. 혹시 생각이 달라지셨습니까?”

“생각이 달라졌다기보다는…… 상황이 바뀌었지요.”

“상황이 바뀌다니요? 뭐가 바뀌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제는 우리 고객들이 경기증권과의 합병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종훈과 김우성은 서로를 바라봤다.

세이지의 고객 문제는 자기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기증권도 겪었던 일이지만 고객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들이 얻을 수익금이 합병과정을 통해 떨어질 걸 걱정하는 것이었다.

경기증권의 자금이 더해지며 경기증권 펀드에 발목 잡히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세이지와 한진영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진영의 모습은 그럴 마음이 없는 것만 같았다.

이종훈은 입이 바싹 말라버린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음에도 갈라진 목소리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저희와의 합병을 포기하실 생각이십니까?”

“포기라……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한진영은 양손을 내밀어 방법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250억. 알겠습니다. 한번 그거로 고객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300억에서 반대하던 고객들이 250억에 좋다고 찬성할 것으로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200억. 200억에…… 이야기해보십시오.”

김우성이 자리를 떠나려는 한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300억에 싫다고 했던 고객들이 250억에 찬성으로 돌아설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종훈은 김우성을 급히 바라봤다.

박지훈이 최후의 최후에나 쓰라고 내어준 카드를 그렇게 바로 써도 되겠냐는 눈으로 김우성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종훈을 향해 김우성은 눈으로 말했다.

‘어차피 300억이나 200억이나 우리가 가질 돈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중훈이나 김우성 입장에서는 3,000억이나 3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회사가 어떻게든 사는 것이기에 바로 최후의 카드를 오픈 한 것이었다.

“200억. 많이 싸지긴 했네요. 알겠습니다. 그거로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제안의 30%나 낮아진 가격이건만 한진영의 모습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한진영은 가볍게 인사를 한 후 회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조지훈을 가까이 불렀다.

“어떻게 하는지 알지?”

“네.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한진영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듣는 조지훈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저녁 언론에서는 한동안 다루지 않던 경기증권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세이지와 경기증권 합병 급물살]

[200억에 새롭게 인수 협상 진행 중. 세이지의 결단만 남아]

[경기증권 고객들은 인수합병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경기증권의 인수 협상이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질문에 검찰과 금감원 모두 말을 아껴]

[정부 측에서는 인수합병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전해]

[인수합병이 성공할 시 검찰 측에 수사와 관련된 의견을 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정부 관계자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해]

경기증권 인수합병에 관한 소식이 동시에 여러 언론의 경제면을 가득 채웠다.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인수합병에 급물살이 터지며 금방이라도 인수합병이 성사될 것처럼 언론들은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밤사이 바뀌고 말았다.

[세이지 자산운용 측 기존 고객들의 반발로 인수합병에 어려움 겪어]

[200억이라는 돈을 지불하고 부실 자산을 인수하는 것에 관해 회의감 확산]

[인수 가능성 제로로 수렴해 들어가는 중]

단, 몇 시간 만에 바뀐 분위기가 펼쳐졌다.

세이지 측에서 기존 고객들의 반발이 심해 인수합병을 더는 진행할 수 없다는 의견이 언론에 실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 이종훈과 김우성이 다시 세이지로 찾아왔다.

“어제 뵈었는데 오늘 또 뵙습니다.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한진영이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자 이종훈이 인사하며 잡은 한진영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한진영을 향해 애원했다.

“대표님. 꼭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희를 살려주실 분은 대표님밖에 없습니다.”

김우성도 이종훈과 마찬가지로 한진영을 향해 애원했다.

한진영은 이종훈에게 손이 잡힌 채로 가까운 의자로 이종훈과 김우성을 안내했다.

그리고 서로 마주하고 앉는 게 아니라 나란히 앉으며 이야기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부터 해보십시오. 저에게 살려달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종훈은 여전히 한진영의 손을 잡은 채 고개까지 숙였다.

“대표님. 우리 회사를 꼭 인수해주십시오.”

“아~ 그 말씀이셨군요.”

한진영은 왼손으로 슬며시 이종훈의 손을 밀어내어 오른손을 빼냈다.

그리고 몸을 슬쩍 뒤로 물리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알려졌는지…… 아마 두 분이 우리 회사에 찾아온 것을 보고 알려졌겠지만…… 저희 고객들이 반대가 심합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반대할 줄 몰랐습니다. 이건 인수합병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표님. 150억. 150억이면 어떻습니까?”

“본부장님. 돈이 문제기도 하지만 명분이 없습니다. 경기증권의 부실 자산을 돈을 주고 인수하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합니까?”

한진영은 이종훈과 김우성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다는 한진영의 모습에 이종훈과 김우성은 한진영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보다 조지훈이 먼저였다.

조지훈이 한진영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자 한진영이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입을 열었다.

“박 사장님께 인수합병은 물 건너갔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웬만하면 이제 자수하시라는 이야기도 전해주십시오. 계속 경기증권과 이야기가 오간다는 말에 검찰 측에서 박 사장님과 연락이 되는 거 아니냐며 자꾸 찾아와서 이제 저도 곤란합니다.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한진영의 말에 이종훈이 다시 한번 애타게 울부짖었다.

“대표님. 인수합병만 잘 진행이 되어 고객의 피해를 최소화한다면 고객들이 제기한 사건은 취하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박 사장님과 저희의…… 처벌은 피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인수합병이 암초에 걸려 버렸는데 그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쉽지만 다른 곳을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진영이 이야기를 마치고 몸을 돌려세우자 한진영의 등 뒤로 이종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얼마면 세이지의 고객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쪽은 이번 협상이 깨진다면 펀드 자체가 폭발한다는 것으로 무조건적인 승낙을 고객들에게 받아왔습니다.”

이종훈의 말에 한진영의 입가에 빠르게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한진영은 몸을 돌려 이종훈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말했다.

“1원. 1원이면 저희가 설득해보겠습니다.”

“네? 1원…… 이요?”

“그래야 설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실 자산을 넘겨받으며 돈을 내야 하냐는 투자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지는 않는다는 말이 가장 잘 먹힐 테니까요.”

한진영은 멍한 얼굴의 두 사람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인 채로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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