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더 많은 돈을 위해서였다
조지훈은 태훈 로펌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 말이야?”
“경기증권 말입니다.”
“경기증권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는 거야?”
“네.”
한진영은 태훈 로펌과 마무리 지은 경기증권 인수합병 서류를 조지훈에게 넘기며 말했다.
“경기증권은 선택권이 없었다니까.”
“합병을 거절할 수도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랬다면 회사가 사라졌겠지.”
“1원을 받고 넘기는 것하고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차이가 있지.”
한진영은 조지훈을 바라보고 웃었다.
“박지훈이 왜 그렇게 도망 다닌 것 같나? 잡히는 게 무서워서야. 처벌받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는 거지. 그런 그에게는 1원에 팔면 처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좋은 조건이 있는데 왜 회사를 욕심내다가 감방에 들어가려 하겠어?”
한진영은 서류를 들고 있는 조지훈의 가슴을 두드렸다.
“사장도 사람이야. 교도소 들어가고 징역 사는 걸 끔찍이 싫어할 수 있어. 돈이 아무리 좋다지만 그것보다 교도소 들어가는 걸 더 싫어할 수 있고, 바로 그런 사람이 박지훈이라는 거지. 나는 그걸 알고 계속 밀어붙였던 거야. 여차하면 돈을 주고라도 회사를 넘기고 교도소에 가지 않으려 할 사람이란 걸 알았으니까.”
이미 지난 경험을 통해 박지훈이 무얼 무서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던 한진영이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밀어붙였던 것이고 한진영의 생각대로 잡혀 들어가는 것을 더 무서워했던 박지훈은 한진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은 앞서 걸어가며 뒤를 따르는 조지훈에게 말했다.
“경기증권하고 합병이 진행되면 바빠질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미리 지시하신 대로 준비해놔서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보다는 홍 실장이 걱정입니다.”
“걱정할 게 뭐 있어. 그냥 하는 대로 하면 되지.”
“그래도 갑작스럽게 경기증권 펀드까지 다 떠안게 되었으니까요.”
갑작스럽게 경기증권의 자산을 떠안은 홍대민이었다.
게다가 그냥 자산도 아니라 꼬일 대로 꼬인 데다 상처까지 크게 입은 자산이었다.
이걸 다시 되돌리고 수익권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조지훈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한진영은 한가득 걱정하고 있는 조지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조 실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이진경 팀장이나 불러와.”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를 받아 자리를 떠났다.
조지훈이 떠난 지 10여 분이 흐른 뒤 이진경 리스크관리팀 팀장이 한진영을 찾아왔다.
똑똑.
“들어오세요.”
한진영은 이진경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용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이진경에게 앉을 것을 권한 후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경기증권하고 저희하고 합병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정말 하는 건가요?”
“네. 하게 됩니다.”
이진경은 설마 하는 일이 일어난 것에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진경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합병 발표가 나오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요?”
“네. 리스크관리팀 팀장인 이 팀장님께서 해주셔야 할 일입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기증권의 펀드. 그 실타래를 풀어서 정확한 손실 정도를 파악해 주십시오.”
“경기증권의 그 펀드들이요? 100개가 넘는 펀드가 서로 얽혀버렸다는 펀드요?”
이진경은 경기증권과 합병을 하게 됐다는 것보다 얽혀버린 펀드를 풀어달라는 한진영의 말에 더 놀란 듯이 보였다.
이진경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저는 리스크 관리자예요. 제가 어떻게 복잡하게 얽힌 펀드를 풀 수 있겠어요?”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하나 제거요?”
“-100%에 들어가 버린 펀드 숫자가 꽤 될 겁니다. 소거법을 적용해서 그것들부터 먼저 제거하면 엉킨 실타래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엉킨 실타래를 가장 쉽게 푸는 방법이 중간을 잘라 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진경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100% 손실에 들어간 펀드가 많나요?”
“생각보다 많을 겁니다.”
“심각하네요.”
“심각한 상태죠.”
이진경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말 이상으로 좋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과 그건 자기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진경은 알고 있었다.
이진경이 할 일은 한진영의 말대로 현재 남아있는 자금이 얼마나 되는지만 알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이진경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네. 그럼 해볼게요.”
“최대한 빨리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경기증권 인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있으니까요.”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돌려서 최대한 빨리 파악하도록 할게요.”
“그럼 이 팀장님만 믿겠습니다.”
한진영은 가벼운 말투로 이진경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후 조지훈을 불러들였다.
“홍대민 실장도 오라고 해.”
“안 그래도 벌써 오셨습니다.”
조지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비켜서자 홍대민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표님.”
홍대민은 큰소리로 한진영을 불렀다.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괜찮다고 손을 들어 흔들고는 홍대민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오셔서 앉아서 이야기하시지요.”
조금 전까지 이진경이 앉아 있던 곳에 홍대민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한진영을 향해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대표님. 경기증권을 정말로 인수하시는 건가요?”
“네. 그럴 계획입니다. 이미 인수 협상이 진행되고 있고요.”
“그럼 경기증권 펀드는…… 정말 지난 편지 내용대로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약속했으니까요.”
예상했던 말이지만 실제로 말을 듣자 홍대민은 착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의 표정을 보고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겠지요.”
“소문에는 반 토막이 났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반 토막도 희망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한 숫자일 겁니다. 실제로는 아마 그보다 더할 겁니다.”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나라 잃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해합니다. 다시 복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리고 시간도 오래 걸릴 테고요.”
“대표님. 100% 수익을 올리는 것과 -50%인 계좌를 다시 원상복구하는 것의 난이도 차이는 천지 차이입니다.”
홍대민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한숨을 내쉬고 계속 이야기했다.
“저를 믿어주시고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알겠는데…… 이걸 공식적인 약속으로 박아버리신다면…… 그 부담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조정실 이하 운용팀 모두 상당한 압박감을 받을 겁니다.”
수익을 올리는 것과 복구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게다가 새로 유입된 고객들이 계좌가 복구되기를 바라며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자기들을 지켜볼 걸 생각한다면 제대로 매수와 매도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한진영도 홍대민이 무얼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홍대민을 부른 것이었다.
“이해합니다. 많이 부담스러우실 테죠. 그래서 손실을 확정할 생각입니다.”
“네?”
홍대민은 한진영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복구는 마음속에 담겨 있는 숫자로 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모두 손실을 확정시킨 다음에 제로선상에서 시작하게 할 생각입니다.”
“아니. 그걸…… 금융당국에서 허락해줄까요?”
“허락 안 해주면 인수를 포기하면 됩니다.”
너무나 간단한 말이었다.
허락 안 해주면 포기하면 된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여 실제로 그걸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했다가 닥칠 후폭풍이 감당이 안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홍대민도 그 후폭풍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표님. 정말…… 손실을 확정할 생각이십니까? 금융당국이야 그걸 받아준다고 해도 기존 경기증권 고객들이 반발할 게 뻔합니다. 분명 -50%에서 시작하자고 할 텐데…… 아니. 그전에 손실이 나온 근거를 내놓으라고 할 게 뻔합니다.”
“그러겠지요. 그래서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생각해둔 게 있으시다고요? 어떤 방법입니까?”
홍대민은 귀를 쫑긋 세우고 한진영이 생각해 둔 방법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 한진영이라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방법을 생각해 놓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대민의 이런 기대는 한진영의 다음 말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원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하라고 할 생각입니다.”
“네?”
“간단하지 않습니까? 100만 원을 넣은 계좌가 30만 원, 40만 원으로 바뀐 게 보기 싫다면 돈을 찾아가면 될 일입니다. 물론 처음 투자했던 금액으로 돌려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려고 경기증권을 인수한 게 아니니까요.”
“대표님. 그렇다면 반발이 말도 못 하게 나올 겁니다.”
“반발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합병을 거부한다? 그럼 경기증권은 파산절차에 돌입할 겁니다.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의 펀드는 강제 청산이 될 겁니다. 그땐 30만 원이 아니라 3만 원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동의했다.
지금까지 강제 청산에 들어갔던 상품이 멀쩡한 상태로 정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했으면 우리 뜻을 따라야지요. 손해를 봤는데도 손해 보지 않게 해달라는 건 도둑놈 심보니까요. 법원에 이의신청하고 금융당국 여기저기에 불평을 이야기할 겁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분탕질을 좋아하는 사람이 경기증권 고객 중에도 있을 테니까요. 또는 어떻게든 손해를 복구해달라고 떼쓰는 사람 또한 있을 겁니다.”
한진영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홍대민은 한진영의 말에 동의했다.
한진영의 말대로 사람 사는 곳에는 꼭 그런 사람들이 한 명쯤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 의견까지 다 들어주면서 갈 수는 없습니다. 함께하겠다는 사람 돌봐주는 것만 해도 힘이 드니까요.”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홍대민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홍 실장님께서는 평소에 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할 테니 말입니다. 부담감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도 실적이 모자란다고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좋게 생각하면 늘어난 자본금에 성과급을 높여 받을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같은 10%의 성과급이더라도 1조와 2조는 천지 차이의 결과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한진영이 밝게 웃으며 홍대민을 향해 말했다.
한진영의 웃음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느껴진 홍대민이었다.
그리고 밝은 웃음 뒤에 숨겨진 한진영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끌어오기 위해서였구나.’
세이지 내부에서는 경기증권을 인수하려는 의도로 경기증권이 가지고 있는 증권사 면허가 필요해서라고 생각했다.
그게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었고 실제로 한진영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이유도 바로 증권사 면허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대민은 지금 한진영과 대화를 나누며 그것만이 이유가 아님을 알게 됐다.
더 많은 돈.
굴리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은 경기증권을 통해 수급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보통 자산운용사가 돈을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새로운 고객을 찾거나 가지고 있는 돈을 불리는 방법.
이 두 가지 외에는 특별히 새로운 돈을 끌어올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진영은 새로운 방법을 찾았고 그게 바로 이미 다른 이가 모집한 고객을 먹는 것이었다.
상처가 나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돈이지만 아무리 반 토막이 났다고 하더라도 2조가 넘는 돈이 남아있을 게 분명했다.
2조는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펀드를 조성해서 2조라는 돈을 모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한파가 부는 시장 상황을 생각했을 때 2조를 모으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여러 번에 걸쳐 고객을 모아야 가능한 수준이었다.
한진영은 그걸 한 번에 손에 넣으려 했던 것이었다.
홍대민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고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을 보고 더욱 환하게 웃었다.
***
세이지 자산운용과 경기증권 합병이 발표됐다.
이미 예전부터 이야기 나오던 것이었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것에 사람들은 놀랐다.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던 만큼 합병은 쉬운 일이 아닐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이지 자산운용이 굳이 경기증권을 인수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던 만큼 세이지 자산운용의 선택을 의외로 받아들였다.
부실 자산을 그것도 돈을 주고 사려 한다는 사실에 세이지 자산운용이 증권사라는 이름에 정신이 나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업계에서는 판단했다.
그러나 합병 발표 이후에 나온 세부 사항을 듣고 사람들은 처음 합병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크게 놀랐다.
인수 금액 1원.
인수 후 경기증권 자산 현실화 진행 예정.
2.2 : 1로 기존 펀드 가입자들 펀드 설정 금액을 조절하겠다고 발표했다.
100만 원 투자한 가입자의 경우 45만 원으로 비율 조정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5조의 총설정 금액이 약 2조 2,700억이 살짝 넘는 수준으로 조정될 것이며 조정 후 운용은 기존 세이지 펀드들의 운용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세이지의 발표 내용이었다.
합병은 경기증권이 세이지 자산운용에 흡수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후 세이지 자산운용은 세이지 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한다는 것까지가 발표에 들어가 있었다.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세이지를 바라봤다.
손실을 확정한 것에 경기증권의 고객들이 가만히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세이지가 무리하고 있으며 경기증권의 고객들이 합병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일부 고객들을 중심으로 합병을 무효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나왔다.
손실 확정을 용납할 수 없으며 일부 고객은 손실 부분을 세이지가 보전해줘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이참에 한몫 잡아보겠다는 식으로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합병 앞에 첩첩이 쌓인 장애물을 보며 합병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