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367화 (367/650)

367화 수술을 집도한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세이지의 경기증권 인수에 시작부터 브레이크가 걸렸다.

바로 금융당국이 인수합병의 적합성을 판단하겠다고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제서야 제대로 정부가 움직인다며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적합성을 따져 맞지 않는다면 바로 합병과정을 되돌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경기증권 고객들 중심으로 이런 분위기가 잡혀갔다.

세이지의 인수 능력과 경기증권 자산운용 능력 그리고 다른 업체에서는 관심이 없는지 등등을 따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기증권 고객들은 탄원서까지 준비하여 세이지가 아닌 대형증권사로의 인수합병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금융당국에 요청했다.

그러나 그런 고객들의 기대와 달리 대형증권사는 물론이고 증권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들은 모두 경기증권의 인수에 난색을 보였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펀드를 떠안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직 2조가 넘는 자금이 남아있다는 것을 기존 고객들이 크게 어필했지만 소용없었다.

5조에서 이미 2조가 넘는 금액이 날아가 버렸는데 남아있는 금액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었다.

경기증권 고객들이 대형증권사들을 직접 찾아가며 애원하는 사이 경기증권에서도 반응이 나왔다.

세이지와의 거래가 불발될 시 경기증권은 파산절차에 들어갈 것.

경기증권은 공식적으로 손을 들겠다는 뜻을 시장에 전했다.

애초에 조 단위의 금액을 운용할 능력도 안 됐던 경기증권이었다.

그래도 운용을 한 것은 최종필이라는 인물과 그가 거느리고 있던 직원들 덕분이었다.

그런데 최종필을 비롯한 최종필과 연관된 직원들이 모두 구속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더는 경기증권은 펀드를 운용할 능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경기증권의 엉킨 실타래는 풀리지 않은 채로 계속 굴러가는 중이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여전히 채권에 투자한 것들은 그대로인 상태였으며 누군가가 나서서 이걸 풀어줘야 하는데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경기증권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경기증권의 고객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가만히 앉아서 계속 손해를 보는 상황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정부에게 해결해주기를 바랐지만 돌아온 대답은 경기증권 고객들을 당황하게 할 뿐이었다.

자생할 능력이 보이지 않으면 강제 청산에 돌입하겠다.

이미 경기증권은 정부의 눈 밖에 난 곳이었다.

금융당국을 압박하여 합병을 무산시키려 한다는 루머도 돌았다.

경기증권과 엮이면 좋은 일이 없기에 정부가 나서서 합병을 무산시킨 뒤 경기증권을 날려버리려 한다는 이야기였다.

경기증권의 고객들에게 정부는 적이었던 사실이 알려지자 당황하고 말았다.

기존 경기증권은 무능하여 자기들을 살려줄 수 없었고 정부는 회사를 날려버리려 한 것이었다.

경기증권 고객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그들의 눈에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는 세이지가 들어왔다.

아무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 때 오직 세이지만은 묵묵히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부상으로만 손실 처리를 하려는 것일 뿐 우리의 목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뿐입니다. 경기증권 고객분들이 가입하실 때 집어넣었던 원금을 회복하는 것. 그게 저희의 목표입니다.

최석영의 인터뷰 영상이 경기증권 고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경기증권 고객들은 이제 더는 합병을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 고객의 경우에는 열렬히 환영하며 어서 빨리 세이지로 모든 것이 넘어가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더는 경기증권이라는 탈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증권 고객들이 합병에 찬성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정부의 합병 승인도 생각보다 쉽게 처리가 됐다.

합병만 성사되면 최종필 건을 제외한 모든 것을 묻고 가겠다.

오프 더 레코드로 전해진 정부의 스탠스까지 알려졌다.

빨리 처리가 돼 더는 정부와 엮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정부의 솔직한 속내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확실하게 태도를 취하자 금융당국의 조사도 유야무야 묻혀갔다.

괜히 합병과정에 꼬투리를 잡았다가는 오히려 정부의 눈 밖에 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세이지와 경기증권의 인수합병에 대한 코멘트를 날린 뒤 합병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제 세이지의 경기증권 인수에는 거치적거리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한진영은 차에 탄 채로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뭐야? 조 실장이 시켰어?”

“아닙니다.

“시킨 거 같은데? 아니면 내가 오는 줄 어떻게 알고 이런 거야?”

“그냥 저는…… 대표님께서 오늘 방문한다고…… 죄송합니다.”

조지훈이 급히 조수석에서 뒤를 돌아보고 고개 숙였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바라보고 피식 웃었다.

“됐어. 조 실장이 일부러 시킨 거 아니란 거 알고 있어. 그런데 다음부터는…… 이런 거 안 보였으면 좋겠어.”

한진영은 말을 하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차에서 내렸다.

조지훈은 스스로 문을 열고 내린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한진영의 모습에서 풍겼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차에서 내려 커다랗게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읽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한진영 대표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한진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플래카드를 바라본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정신들 못 차렸군.”

한진영이 혼잣말을 끝냈을 때 조지훈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지난 협상 자리에서 만났던 이종훈과 김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경기증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종훈과 김우성이 달려 나와 한진영에게 꽃다발을 안겼다.

한진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꽃다발을 받아 들자 뒤이어 한진영의 목에 꽃으로 엮은 꽃목걸이를 걸어줬다.

그리고 어서 손뼉 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제일 큰 소리로 한진영 앞에서 손뼉을 쳐댔다.

한진영은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한진영을 향해 환영의 손뼉을 치는 경기증권 직원들을 꽃다발과 꽃목걸이를 한 채로 바라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좌우로 경기증권 입구까지 늘어서 있는 직원 수가 족히 백 명은 넘는 것만 같았다.

모든 직원이 나온 것은 아닐 테지만 지원부서 대부분의 직원이 차출된 것만 같은 모습에 한진영은 어이없어했다.

“다들 일 안 하시고 여기 나오신 겁니까?”

“대표님께서 오시니 당연하지요.”

“대표님. 정말로 환영합니다.”

이종훈과 김우성이 다시 한번 한진영을 향해 크게 인사했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꽃다발과 꽃목걸이를 옆에 대기하고 있던 조지훈에게 넘겼다.

“대표님 그럼 들어가시지요.”

한진영을 향해 안으로 안내하려 한 이종훈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종훈과 김우성은 서로 잠시 눈빛을 교환한 뒤 다시 한진영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급히 경기증권 안에서 이진경이 달려 나왔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습니다.”

이진경은 잔뜩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이 흐트러진 채로 한진영 앞에 섰다.

한진영은 그런 이진경의 모습에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신다는 시간은 조 실장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줄은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요. 그리고 늦으신 것도 아닙니다. 제가 일찍 온 겁니다. 마침 다들 오는 걸 보니 이 팀장님이 시간 딱 맞춰 나오신 거 같네요.”

한진영이 자기가 차를 타고 들어온 쪽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곳에는 차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대표님. 저게 무엇입니까?”

이종훈이 놀란 얼굴로 들어오는 차들을 바라봤다.

차에서는 사람들이 내리고 빠져나가면 다시 사람들이 내리기를 반복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사람이 차에서 내려 한진영에게 인사하고 한진영의 뒤에 섰다.

“이제 다 된 것 같군요. 갑시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진경이 한진영의 앞에 서서 경기증권 안으로 한진영을 안내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진경을 따라 경기증권 안으로 들어갔고 조금 전 차를 타고 경기증권으로 왔던 사람들도 한진영의 뒤를 따라 경기증권 안으로 들어갔다.

이종훈과 김우성은 놀란 표정으로 한진영과 사람들을 제자리에 선 채로 바라봤다.

이종훈과 김우성뿐만이 아니었다.

한진영이 찾아온 것을 환영한다며 손뼉을 쳤던 경기증권의 직원들도 놀란 얼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점령군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이종훈과 김우성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대표님.”

정신을 차린 이종훈과 김우성이 한진영을 찾으며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한진영은 함께 온 세이지 직원들을 향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이곳은 투자사업본부로 개편될 겁니다. 그 전에 먼저 기존 경기증권이 하던 일을 확보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운용파트는 본사로 넘어갈 것이고, 그 외의 것들은 이진경 팀장님의 지시를 따라 미분하시면 됩니다. 이진경 팀장님이 한 달 먼저 이곳에 와서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이니 이진경 팀장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주십시오.”

이종훈과 김우성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진영이 이야기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지시를 마치고 혼자가 되었을 때 겨우 한진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대표님. 이게…… 뭔가요?”

“뭐긴 뭐겠습니까? 본격적으로 경기증권을 인수하기 위해 온 것이지요.”

“저기 이 팀장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것 아닙니까?”

이종훈과 김우성은 이진경 팀장 쪽을 슬쩍 바라보고 물었다.

세이지의 경기증권 인수 결정이 확정되고 난 뒤 이진경 팀장이 팀원들 몇 명과 먼저 경기증권 쪽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경기증권의 서류 분석에 들어갔다.

일반적인 인사관리 카드 분리부터 시작해서 현재 경기증권의 자산과 운용내역 등을 확인하는 작업까지 경기증권에 관한 모든 것을 한 달가량 샅샅이 살폈다.

처음 이진경이 왔을 땐 경기증권의 모든 사람이 바짝 긴장했다.

세이지에서 파견한 사람인 만큼 그들의 눈에는 저승사자로 보였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자기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진경에게는 좋은 인상이고 나쁜 인상이고 남길 방법이 없었다.

각 부서의 팀에서 서류를 수거하여 회의실에 들어가면 그 뒤에는 회의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질문할 거리가 생겼을 때 담당자를 회의실로 부르는 것 외에 점심과 저녁도 회의실에서 처리하며 바깥출입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보름 정도 지났을 때는 경기증권 직원들도 더는 이진경을 신경 쓰지 않게 됐다.

그저 세이지에서 경기증권을 정리하기 위해 보낸 직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이진경을 대했다.

그리고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문을 닫고 진행하는 작업에 경기증권 직원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회사 이름만 바뀌는 것일 뿐 달라지는 게 없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 경기증권 직원들에게 지금의 모습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한진영은 당황한 눈빛의 이종훈과 김우성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시작이지요. 이 팀장님은 시작하기 위해 진단 작업만 한 겁니다. 진단을 마쳤으니 수술 집도를 해야지요.”

“수술이요?”

“밑에 쪽은 이 팀장님이 알아서 하실 테고…… 임원급들을 모아서 사장실로 순서대로 올려보내.”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지시를 내리고 경기증권 사장실로 향했다.

이종훈과 김우성은 그런 한진영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들의 귀에는 여전히 ‘수술’이라는 단어만 맴돌았다.

***

한진영은 박지훈이 사용하던 사장실을 둘러봤다.

똑똑.

사장실에 비치되어 있던 책을 뽑아 보고 있던 한진영은 차를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박지훈의 비서를 바라봤다.

그녀는 떨리는 모습으로 사장실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차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한진영은 책을 들어 보인 채로 박지훈의 비서를 바라보고 말했다.

“우선 비서님부터 시작해야겠군요.”

한진영은 책을 덮고 응접용 소파에 가 앉았다.

그때까지도 박지훈의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한진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흘러가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는 이야기를 박지훈의 비서도 들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박지훈의 비서가 가지고 온 차를 세심하게 맛봤다.

“커피 향이 좋네요. 원두가 어디 건가요?”

한진영의 향이 좋다는 말에 박지훈의 비서는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진영의 질문에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하와이 코나 원두를 갈아 두 번 드립 한 거예요.”

“하와이 코나. 맛이 좋네요. 세계 3대 원두라는 말은 듣기는 했지만 사실 맛볼 기회는 잘 없었는데 여기서 맛봅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네.”

부드러운 한진영의 말에 박지훈의 비서는 허리까지 굽혀가며 인사했다.

한진영은 그런 그녀를 찻잔을 든 채로 바라보며 말했다.

“경기증권의 비서실은 세이지 비서실로 통합될 겁니다. 앞으로 조지훈 비서실장의 지시를 따르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박지훈의 비서는 다시 한번 허리가 부러져라 감사 인사를 전했다.

경기증권이라는 회사가 사라지며 가장 먼저 정리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곳이 바로 비서실이었다.

모시는 사장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비서의 존재가 딱히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진영이 세이지 비서실에 통합된다는 말을 전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살았다는 뜻을 다른 사람도 아니라 세이지의 대표가 전했기 때문이다.

똑똑.

박지훈의 비서가 기쁨에 겨워할 때 사장실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조지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지훈은 한진영에게 인사한 후 다가와 이진경이 정리한 인사카드를 내밀었다.

“임원급들 인사카드입니다. 그리고 이종훈 본부장부터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밖에 세워놓고 안에 들어온 사람이 나가면 다음 사람 들어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이제 시작하자는 뜻을 전한 후 이종훈 본부장의 인사카드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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