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누가 가지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TV에서는 연신 경기증권의 이야기가 나왔다.
대부분 감탄에 가까운 이야기들로 경기증권의 인수가 세이지에게는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성우는 턱을 괴고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너 너무 큰 거 아니냐?”
“내가 원래 너보다 컸어.”
이성우에게 대답한 한진영은 코트를 내어 보이는 젊은 여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거 말고 색깔이 좀 더 진했으면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건 어떠세요?”
옆에 있던 VIP 담당자가 가지고 온 옷 중에서 하나를 한진영에게 내어 보였다.
한진영은 담당자가 내민 옷을 걸치고는 이성우 쪽을 바라봤다.
“왜? 내가 커지는 게 부담스러워?”
“당연히 부담스럽지.”
여전히 턱을 괴고 있던 이성우는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것보다는 지금 게 훨씬 낫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나도 그런 거 같아.”
한진영은 거울에 옷을 비춰보고는 담당자를 향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로 하겠습니다. 그럼 모두 얼마죠?”
한진영의 말에 VIP 담당자는 활짝 웃으며 직원을 향해 손짓했다.
한진영이 구입한 정장과 넥타이, 와이셔츠에 코트까지 모든 것을 계산한 표를 어서 달라는 손짓이었다.
VIP 담당자는 직원이 건넨 태블릿을 보고 한진영을 향해 다시 한번 활짝 웃었다.
“정장 위아래 세트가 2,000입니다. 넥타이가 500, 와이셔츠가 350, 코트는 1,800입니다.”
“어휴~ 비싸다.”
이성우가 자리에 앉은 채로 VIP 담당자를 향해 말했다.
VIP 담당자를 비롯한 그녀와 함께 온 직원들은 이성우를 향해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웃었다.
“비싸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좀 깎아줘요.”
“깎다니요? 저희는 정찰제라…….”
“에이. 우리 사이에 이럴 거예요? 다 아는데?”
“사장님. 정말 저희는…….”
이성우는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2,000 더하기 500 더하기 350 더하기 1,800이면 얼마야? 4,650? 어휴~ 비싸네.”
“사장님. 저희 출장비는 거기에 포함되지도 않은 거예요.”
VIP 담당자는 울상을 지으며 이성우에게 말했다.
깐족대는 이성우가 미운 VIP 담당자였다.
그가 사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비싸니 마니 말하는 게 여간 꼴 보기 싫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성우를 향해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와 그의 와이프는 업계에서도 내로라하는 큰손들이었으며, 그를 통해 한진영을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하며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사장님. 저희가 오늘 가지고 온 옷들은 저희 브랜드의 신상품으로 국내에 단 한 벌씩밖에 없는 것들이에요. 아직 미국 쪽에서도 물건을 풀지 않은 것들이라 입으시면 세계에서 옷을 처음으로 입는 분이 되시는 거예요.”
“그러기에는 4,650이…….”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VIP 담당자는 결심한 듯이 입술을 꽉 깨문 뒤 입을 열었다.
“저희 출장비는 받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4,500. 4,500에 하는 거로…….”
VIP 담당자는 말을 하고 슬쩍 한진영의 눈치를 살폈다.
딴지를 걸고 있는 건 이성우였지만 어쨌든 물건을 사는 사람은 한진영이었기에 한진영의 눈치를 살핀 것이었다.
가만히 이성우와 VIP 담당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던 한진영은 VIP 담당자를 향해 웃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그냥 4,650 다 결제해주세요.”
VIP 담당자는 한진영이 내민 카드를 받아 들고 이번에는 이성우의 눈치를 살폈다.
한진영은 그런 VIP 담당자의 모습에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사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으니 이건…….”
한진영은 품에서 준비해 놓은 봉투를 내밀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아무래도 한진영은 출장비를 따로 주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네 명이나 오셔서 저를 위해 수고해주셨으니 당연히 출장비를 받으셔야죠. 약소하지만 따로 준비했습니다.”
“어머! 감사합니다.”
VIP 담당자는 한진영이 내민 봉투를 건네받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 재벌가와 속칭 말하는 돈 좀 있다는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신경 써주는 곳은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를 한진영에게 보였다.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바로 대표님께 가지고 올게요.”
“하하하. 뭐 그래 주시면 저야 좋죠.”
“감사합니다. 정말 오늘 일은 잊지 못할 거예요.”
명품 브랜드 직원들은 한진영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몇 번이나 건네고 가지고 왔던 옷들과 함께 떠났다.
이성우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한진영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까지 잘해줘?”
“잘해줘야지.”
한진영은 오늘 산 옷을 다시 한번 살피며 말했다.
“너 재벌가나 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누구한테 들으면 된다고 생각하냐?”
한진영의 말에 가만히 생각하던 이성우는 문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설마 저 사람들이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한진영은 썩 마음에 든 모습으로 소파로 다가왔다.
그리고 소파 한쪽에 놓여 있는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끄고는 말했다.
“너희 집에 가족이 아닌 사람 중 누가 가장 많이 드나들어? 바로 저런 사람들 아니야?”
“어…… 그렇긴 하지.”
“굳이 일반인들처럼 명품관에 가서 대기하고 함께 만지작거리다 물건 사기 싫으니까 직접 집으로 불러들이잖아.”
“맞아. 그게 편하기도 하고…….”
“그렇게 자주 집에 드나들다 보면 볼 거 못 볼 거 다 보게 되지 않겠어? 처음 한두 번은 신경 써서 조심한다지만 자주 오다 보면 그러려니 하고 그들이 있어도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으면서 하게 될 테고…….”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웃으며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일어난 이성우의 양어깨를 잡고 문 쪽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저런 사람들은 자기네들만의 채널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 채널을 통해 자기들이 얻은 정보들을 공유하기도 해. 그건 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야. 예를 들어 외상을 준 곳이거나 혹은 물건을 달라고 하는 곳의 회사 사정이 안 좋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보통 곧 망할 곳의 경우에 가장 먼저 하는 게 저런 명품들을 잔뜩 외상을 가지고 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한진영은 문 쪽으로 밀어낸 이성우를 문밖으로까지 밀어냈다.
자기도 밖에까지 따라 나온 한진영은 문을 닫고 금방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이성우와 함께 몸을 실었다.
그러면서도 한진영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재벌가의 가십을 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알 거야. 남들이 모르는 것도 잘 알고 있기도 할 테고…… 그런 정보들은 돈으로 가치를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들이야. 생각해봐. 너희 아버지에게 사실은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면 그 정보의 가치는 얼마일까?”
“우리 아버지한테 또 다른 자식이 있어?”
이성우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때 만약 진짜라면 엄청나게 놀랄 일 아니겠어? 그리고 그 정보의 가치는 말도 못 할 테고…… 저들에게는 그저 고객의 씹을 거리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잘해야지. 안 그래?”
한진영은 엘리베이터에서 이성우를 밀어 내리게 했다.
“그런데 너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되냐? 약속 장소로 갈 시간 다 되지 않았어?”
“내 약속 장소?”
“너 제수씨랑 저녁 식사한다고 했잖아.”
“맞다.”
한진영과 노느라 문서영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던 이성우는 급히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뒤를 느긋한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이성우는 차 쪽으로 걸어가다 한진영이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멈춰 서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너는 왜 따라와?”
“가는 데까지 나 좀 태워다 줘.”
“왜? 왜 내가 널 태워다 줘야 하는데? 너도 차 있잖아.”
“오늘 술 마셔야 할 거 같아서 그래. 네 차 타고 가서 집에 올 때는 택시 타려고. 종로면 네가 가는 곳하고 얼추 비슷하잖아.”
“김 기사는? 김 기사 부르면 되잖아.”
한진영은 이성우의 곁에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런 게 아까 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거다. 그러다 이야기가 모여서 쾅!”
한진영은 손을 오므렸다 피며 폭탄이 터지는 모양을 이성우 앞에서 보였다.
“기풍그룹의 갑질 의혹. 뭐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냐? 아직 너는 차기 자리가 유력한 상태이지 확정된 거는 아니야.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너와 계약하려는 상대방의 손에 있다면 어떻겠어?”
한진영은 어깨에 올린 팔을 내리고 이성우의 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조수석 앞에 선 채로 몸을 돌렸다.
“반대로 비슷한 이야기를 내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떨까? 계약을 진행하려는데 좀 더 쉽지 않겠어?”
“너…… 너 인마.”
이성우는 놀란 눈으로 한진영이 서 있는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운전석 앞에 서서 반대편에 서 있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너 무서운 놈이구나.”
“사업하는데 그럼 만화에서처럼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게 먹힐 것 같냐? 정보는 내가 아니면 남이 가지게 되는 거야. 그걸 제일 먼저 손에 쥐고 요리해야지 이 바닥에서 오래 살지. 나는 오래오래 아무런 구설수 없이 이 바닥에서 있고 싶은 사람이다.”
“어휴~ 너 그거 나한테는 써먹지 말아라. 그런데…….”
차를 열려던 이성우는 잠시 멈칫하며 한진영에게 물었다.
“아까 이야기한 아버지의 숨겨놓은 자식. 그거…… 정말이냐?”
한진영은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고 어서 차 문을 열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조수석 문을 가리킬 뿐이다.
“어휴~ 됐다. 됐어.”
한진영의 입에서 속 시원한 대답이 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이성우는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뒤를 이어 한진영이 조수석에 앉자 이성우는 차에 시동을 켜며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디에 가는 거야? 평소 술도 잘 마시지 않는 네가 술까지 마신다고 하고…… 옷도 사람까지 불러가며 4,000만 원이 넘게 넥타이부터 코트까지 싹 맞춰 입고…… 뭐 중요한 사람이라도 만나러 가는 거냐?”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이 성공하면 가고 싶은 곳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게 뭔 줄 아냐?”
“글쎄? 뭔데?”
“가고 싶은 곳은 고향, 만나고 싶은 사람은 고향 친구.”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고향을 가는 건 아닐 테고 동창회라도 있는 거냐?”
“딩동뎅. 그래. 동창회 간다.”
“동창회에 힘주고 갈 거였으면 차를 몰고 가는 게 더 좋지 않았겠어? 네가 가지고 있는 차 중에서 하나만 가지고 가도 다들 주눅 들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 나이대에 자수성가로 그런 차 모는 사람 많지 않아.”
“그건 너무 티가 나. 나는 그런 거 싫다.”
“이건 티가 안 나고?”
이성우는 한진영의 옷을 손가락을 잡고 펄럭였다.
“이건 상표를 보지 않는 한 좋은 옷이라고만 생각할 뿐 정확하게 뭔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 제수씨 정도나 돼야 상표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고…….”
“하긴 우리 마누라는 옷 일부분만 봐도 어디 건지 다 알더라.”
이성우는 한진영에게 보였던 질렸다는 표정을 또 한 번 지어 보였다.
한진영과는 다른 쪽으로 문서영에게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 늦지 않았냐? 나까지 데려다주고 가려면 빠듯할 것 같은데…….”
“으악!”
한진영의 말에 정신을 차린 이성우는 괴성을 지르며 급히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고 급히 차를 빼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
저녁 시간의 종로는 시끌벅적했다.
서울의 중심이 오래전에 강남으로 옮겨졌다지만 종로는 종로만의 특유의 감성을 가지고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 저녁 시간의 종로는 언제나 북적였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차에서 내려 우선 만나기로 한 구두 브랜드의 종로점 앞으로 향했다.
“여기.”
한진영과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김민준은 한진영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김민준은 여전히 손을 든 채로 다가오는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폈다.
“진영아. 몰라보겠다.”
“오랜만이다.”
“어. 그래. 오랜만이야. 잘 지냈냐?”
‘나야 뭐 정신없이 지냈지. 너는?”
“나도 정신없이 지내기는 마찬가지지. 우리 나이대가 그렇잖아. 한창 열심히 일하고…… 그런데 너는 요즘 어디서 일하냐? 듣기로는 신성증권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들었었는데…….”
“회사 이름 바뀌었잖아.”
“아 그래. 기풍으로 바뀌었지?”
“나는 세이지.”
“아~ 기풍에서 옛 신성증권 직원들이 나와서 세웠다는 세이지? 이번에 경기증권 인수해서 증권사로 올라갔다는 거기?”
김민준이 알아보는 모습에 한진영은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김민준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부러운 듯이 쳐다봤다.
“야 듣기로는 세이지가 대우가 좋다며? 관련 업계도 아닌 우리한테까지 그 이야기가 퍼진 거 보면 장난이 아니라는 거 같은데 진짜냐?”
“뭐 좋기는 하지. 대충 신입직원도 3~4억 정도는 가지고 가니까.”
“얼마? 3~4억?”
김민준은 한진영의 말에 깜짝 놀라더니 혀를 내둘렀다.
“뭔 신입직원이 3~4억을 가지고 가냐?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다. 복지고 나발이고 간에 돈이 가장 중요한데 돈이 뭐 차원이 다르네. 그래서 네 신수가 이렇게 훤한 거였구나? 게다가 그렇게 나오라고 했는데도 안 나오다 나온 이유도 다 있고…….”
“좀 바빴어.”
“알아 알아. 괜찮아. 어차피 동창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딱 두 부류 아니겠냐? 자기 잘나간다고 자랑하러 나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뭐 하나라도 팔아먹으려고 나온 사람.”
한진영은 과거 자기가 했던 말이 떠올라 가만히 웃기만 했다.
김민준은 그런 한진영을 가만히 보다 몸을 돌렸다.
“가자. 늦겠다.”
두 사람은 김민준의 안내에 따라 동창회가 열리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