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되갚아 주다
김종빈은 자리에서 선 채로 남자들과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김종빈과 마찬가지였다.
왜 짧은 머리의 거구인 남자들이 한진영을 향해 구십 도로 인사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진영은 남자들의 모습에 그냥 웃기만 했다.
남자들은 그렇게 잠시 인사를 한 모습 그대로 유지하다 허리를 폈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최대한 그들이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이야기했다.
“회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번 모시고 싶었는데 이렇게 직접 와주시니 저희 업소에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저도 오고 싶었지만, 그동안 바빠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친구들과 왔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저희가 이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지요. 오신 것만으로 저희는 기쁜 마음입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는 탁자 위에 깔리는 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 가게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내놓았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자리에 있던 한진영의 친구들은 탁자 위의 술들을 바라봤다.
발렌타인 30년 산을 시작으로 하여 나무 상자에 담겨 나온 로얄살루트 21년산, 조니워커 블루라벨, 헤네시 XO 와 레미마틴 XO까지 시중에서 볼 수 있는 고급 양주들이 종류별로 깔려 나갔다.
남자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종업원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종업원은 샴페인 하나를 남자에게 건넸다.
트럼프 카드의 가장 강력한 패인 스페이드 모양이 병에 크게 그려져 있는 샴페인은 표면이 금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비싸 보인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남자는 한진영에게 샴페인을 소개했다.
“아르망디 샴페인에서 이번에 새롭게 출시한 아르망 드 브리냑 드미 섹입니다. 아르망디 샴페인 중에서 가장 단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드시는 데 좋으실 겁니다. 국내에는 이 샴페인을 들여온 곳은 저희가 유일합니다. 저희 가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샴페인을 특별히 한 대표님께 대접하고자 가지고 나왔으니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남자는 설명을 마치고 직접 병을 들고 한진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두 손으로 병을 내밀고는 허리까지 살짝 숙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남자의 모습에 놀라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런데 한진영은 마치 이런 광경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아르망디의 경우에는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돔 페리뇽 못지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받아주시니 영광입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남자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종빈은 그런 남자의 모습에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저는 정은 형님 밑에 있습니다.”
“정은이 누군데?”
한진영에게 좋은 이미지를 쌓기 위해 노력하는 데 자꾸 끼어드는 데 화가 났던지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김종빈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남자의 눈에서 나온 눈빛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자는 급히 한진영 앞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힘을 줬던 눈을 풀었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 대표님께서 계시는데 겁도 없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자꾸 정은이 형님을 찾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은이는 저 북에 있는 정은이밖에 없습니다.”
남자의 농담에 한진영을 비롯하여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오직 김종빈만이 웃지 못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남자를 향해 자기가 모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설명하려 했다.
“형님…….”
“아니. 내가 왜 너…… 당신의 형님이라고 그러는 겁니까?”
“저기 장안동의 정은이 형님 정말 모르십니까? 정은이 형님께서 잘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그 장안동의 정은이가 누구라고…… 아~”
남자는 김종빈이 그렇게 찾던 정은이 형님이 누구인지 떠오르는 듯했다.
남자는 한진영 앞에서 숙였던 허리를 펴고 김종빈을 향해 말했다.
“네가 그 장안동에 있는 긴따로 정은이 동생이냐?”
김민준이 긴따로라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곁에 있는 친구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긴따로가 뭐야?”
“긴따로. 금태라는 생선인데 무지하게 못생긴 생선 있어.”
“아~ 못생긴 생선.”
김민준의 목소리가 김종빈의 귀에까지 들렸는지 김종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생선은 무슨 생선. 요리미쓰 사천왕의 한 분인 김태랑의 긴따로야. 이 새끼야.”
“아니. 이 새끼는 맞는 말을 했는데 왜 소리를 질러? 긴따로가 생선 대가리를 하고 있어서 긴따로라고 불렀지. 사천왕은 무슨 얼어 죽을 사천왕이야. 그리고 긴따로 본인도 아니고, 왜 긴따로의 동생 주제에 소리를 지르고 있어? 여기가 어디라고? 너 긴따로한테 그렇게 배웠어?”
김종빈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한진영의 눈치를 살피다 한진영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김종빈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안동에서 빌어먹고 살던 놈 불쌍해서 인사 몇 번 받아줬더니 이 새끼가 동생을 보내서 날 곤란하게 만들고 있네. 네 형님인지 누님인지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 내가 이놈의 새끼 다리몽둥이를 못 쓰게 만들어줘야지 다시는 건방지게 동생 나부랭이를 보내지 않지. 앞장서.”
“어이쿠. 형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김종빈이 그 자리에서 급히 무릎을 꿇었다.
“긴따로 형님께서 아시게 되면 저 큰일 납니다.”
“그러니까 왜 한 대표님 앞에서 소리를 질러?”
“그런데 한 대표가…… 설마 진영이가 한 대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거 같던 김종빈은 한진영을 바라보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한진영은 그런 김종빈을 보고 웃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정 회장님께서는 오셨습니까?”
“아직 도착하지는 않으셨지만 금방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여기서 잠시 놀다 갈 테니 도착하시면 말씀 좀 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재미있게 노십시오. 그리고 술값은…….”
“술값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있는 긴따로 동생분이 내기로 했으니 말입니다.”
“이걸 다 말씀입니까? 하하. 긴따로가 동생을 잘못 키운 줄 알았더니 잘 키웠네. 어이. 긴따로 동생.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알지? 돈 안 내고 나를 생각하면 내일부터는 화장실을 마음대로 다녔던 오늘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 마.”
남자의 으름장에 무릎을 꿇고 있던 김종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웃고는 한진영을 향해 크게 고개를 숙이고 데리고 온 동생들과 함께 방을 나갔다.
남자와 한진영 그리고 김종빈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커다란 대리석 탁자 위가 술과 안주로 가득 채워졌다.
사람들은 그런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술과 안주를 한번 살핀 뒤 한진영을 향해 질문하기 바빴다.
“저 사람들이 왜 너한테 그렇게 깍듯한 거야?”
“한 대표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정 회장님은 또 누구고?”
“너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거 보니까 예상했던 거 같다. 뭐야? 알고 있었던 거야?”
짝!
친구들은 한진영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다 누군가의 손뼉 소리에 고개를 훽하고 돌렸다.
“넌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손뼉을 쳐?”
“한진영! 한 대표! 세이지 자산운용!”
“넌 또 왜 그래?”
“나 들었어. 우리 중학교 동문이 세이지 자산운용의 대표라는 말 말이야. 그리고 대표 이름은 몰라도 성은 한 씨라고 했어.”
“그래. 너하고 진영이하고 같은 중학교였지? 우리 초등학교에서 너희 중학교로 간 사람 몇 명 안됐잖아.”
“그래. 나하고 진영이까지 다 합쳐서 다섯이었는데…… 세이지 한 대표라는 사람이 너였냐?”
한진영은 한진영을 향해 서서 다가오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뻗어 자리에 앉게 했다.
“우선 앉아 앉아서 이야기해.”
“어서 대답이나 해봐. 너야?”
“어. 나 맞아. 내가 세이지증권의 대표야.”
“와아~”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가장 이슈가 되는 곳의 사장이자 대표가 다름 아닌 같은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에 매우 놀란 것이었다.
한진영이 세이지증권의 대표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진영의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김종빈을 대할 때 겁 없어 보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여유로 보이기까지 했다.
입고 있는 옷도 달라 보였다.
하고 있는 넥타이는 물론이고 옷에 묻혀 있는 한진영의 시계 또한 보지 않아도 명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진영은 자기에게 쏠린 시선을 이제 막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밴드로 시선을 돌렸다.
“밴드 왔으니까 노래부터 부르고 분위기 좀 올려보자.”
한진영은 앞에 놓인 양주를 손에 잡히는 대로 뚜껑을 따며 김종빈을 쳐다봤다.
“야. 김종빈. 분위기 좀 띄워봐.”
“뭐? 이…….”
김종빈은 화를 내려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의 상황으로 이제 한진영은 자기가 화를 낼 상대가 아님을 김종빈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전국구가 운용하는 곳이었다.
그가 모시는 형님인 긴따로 정은 형님도 이곳의 소속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식구가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구십도로 숙였으니 감히 자기가 어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곳을 운용하는 사람이라면 조직 내에서도 한 손가락에 들어가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한진영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김종빈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웃었다.
“내가 분위기 좀 띄울까?”
“밴드 분들 벌써 세팅 마치고 기다리고 계신다. 뭐 하고 있냐?”
한진영의 타박에 김종빈이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분 나쁜 표정의 김종빈이었지만, 노래가 점차 진행될수록 얼굴과 분위기가 풀리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모습을 상석에 앉아 즐기고 있었다.
지난 시절 김종빈이 자기에게 시키던 것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고이 앞에 나가 시킨 것도 아니라 뒤통수를 몇 차례 때리고 나서야 앞에 나가라고 시킨 김종빈이었다.
그리고 거절한 한진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물론 주먹이 한진영을 맞추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일이 커졌겠지만 어쨌든 김종빈은 막는 친구들을 사이에 두고 주먹을 휘두르고 집기를 집어 던져 한진영을 맞추기까지 했다.
그리고 떠나려는 한진영을 막아 억지로 노래를 시키고 춤을 추게 했다.
당시에 승진하는 데 목을 맸던 한진영은 어떻게든 실적을 올리기 위해 찾아왔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받은 수모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똑같이 김종빈에게 갚아주고 있었다.
인격적인 모독이 아닌 수모와 금전적인 것으로 갚아주는 중이었다.
“마셔.”
한진영은 새로운 술병을 따고는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또 다른 술병의 마개를 땄다.
김종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며 당장에라도 한진영을 막고 싶었다.
이대로 모든 술병의 뚜껑이 따진다면 정말로 모든 술값을 자기가 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김종빈은 애타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다 한진영이 절대 따지 말았으면 하는 술병을 건드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다 말고 한진영을 불렀다.
“야!”
한진영은 아르망디 샴페인을 든 채로 김종빈을 바라봤다.
“왜?”
“그건…… 그건 따지마.”
“왜 따지마? 이게 오늘 자리의 하이라이트인데…….”
한진영은 거침없이 아르망디 샴페인의 뚜껑을 땄다.
그러자 거품이 일어나며 샴페인이 병 주둥이를 타고 흘렀다.
김종빈은 흐르는 술이 자기의 눈물인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돔 페리뇽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한 병에 수백만 원은 우습게 넘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종빈은 고개를 돌려 여자친구인 이은희를 돌아봤다.
이은희는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처럼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녀가 굳이 가지 말자고 했던 자리였다.
그러나 그가 고집하여 나온 자리였다.
한진영이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지고 놀기는커녕 한진영에게 놀림을 당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냥 놀림도 아니라 돈까지 물어야 할 지경에 이르자 김종빈은 식은땀이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진영아. 나 이거…… 다 못내.”
“뭐?”
“이거 다 못 낸다고…… 내가 가진 돈이 없어.”
말을 하며 눈시울이 붉어지던 김종빈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나 겨우 한 달에 100만 원 버는 게 전부야. 그런데 여기 있는 술값은……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야. 흑흑. 게다가 내가 정은 형님 밑에 있다는 것도 여기 형님들이 알고 계시니 나를 봐주지도 않을 테고…… 진영아. 나 정말 여기 술값 감당할 수가 없어.”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술값만 해도 대충 3,000 정도는 나오겠네.”
“3,000……?”
고급 양주는 다르다며 웃으며 마시던 친구들도 한진영의 말에 놀라 술잔을 내려놓았다.
김종빈은 3,000이라는 소리에 더욱 슬피 눈물을 흘렸다.
3,000이면 이은희와 함께 사는 집의 보증금을 빼도 해결이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똑똑.
“어이구. 여기 한 대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한 대표 있습니까?”
노크하자마자 젊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한진영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한 대표.”
LZ의 조용재가 한진영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런 조용재를 향해 한진영보다 먼저 인사한 이가 있었다.
“사장님.”
조용재는 자기를 부르고 인사까지 하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몇 잔의 술로 얼굴이 빨개진 김민준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재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