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작당 모의
한진영은 유명 고급 레스토랑 앞을 가만히 바라봤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도 비서실 직원을 조금 더 데리고 올 걸 그랬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웃었다.
“난리네. 난리야.”
“아무래도 국내에 내로라하는 총수님들께서 모이셔서 그런 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호들갑이다. 뭘 이렇게까지 다들 끌고 왔어?”
“다른 곳에 기죽지 않으려는 거겠지요.”
레스토랑 앞에는 각 총수들이 데리고 온 수행원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도로는 차들로 다니기 불편할 정도였으며, 인도 또한 레스토랑 앞을 지키는 수행원들 탓에 걸어 다니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런 곳에 세이지증권 대표로 한진영과 조지훈 달랑 둘만 온 것에 조지훈은 민망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다들 자기 세를 자랑하기 위해 이러고 있는데 어엿한 증권사인 세이지증권도 이참에 뭔가를 보여주는 게 낫지 않았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저렇게 사람이 많으면 나중에 집에 갈 때 불편하기만 하지 뭐 하는 짓이야? 어이구. 가자.”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하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레스토랑 앞에 잔뜩 진을 치고 있던 각 회사의 수행원들은 갑자기 다가오는 두 사람을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곳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고 막으려 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오는 분들의 경우에는 수행원들을 잔뜩 끌고 오기 마련인데, 이렇게 두 사람만 달랑 오는 경우는 오늘 레스토랑이 영업하는 줄 모르고 찾아오는 손님쯤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오늘 여기는 영업 안 합니다. 돌아가세요.”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손을 들어 한진영의 앞을 막았다.
한진영은 그런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어허. 그냥 돌아가시라고요. 여기에 중요한 분들께서 계셔서 오늘 영업 안 하니까요.”
위압적인 목소리를 내뱉은 남자였지만 한진영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남자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한마디 더 내뱉으려 할 때 뒤에 있던 LZ그룹 경호 담당자가 다가왔다.
“왜 그래?”
“아니 이분이…….”
“어? 세이지증권의 한 사장님 아니십니까?”
LZ그룹의 경호 담당자는 급히 앞을 가로막았던 남자를 밀치고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한 사장님을 몰라뵙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오셨습니까?”
“네.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깍듯하게 인사한 경호 담당자는 한진영을 향해 들어갈 것을 권했다.
한진영이 레스토랑으로 걸어가자 한진영을 알아본 각 그룹의 수행원들이 다가와 인사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경호 담당자는 레스토랑 안에까지 한진영을 안내하고 나와 식은땀을 흘렸다.
“휴우~”
조금 전 한진영 앞을 막아 세웠던 남자는 그런 경호 담당자에게 다가와 물었다.
“세이지 증권의 한 사장이…… 맞습니까?”
빡!
사정없이 뒤통수를 때린 경호 담당자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보고도 몰라? 다른 그룹에서도 와서 인사하던 거? 강선건설의 비서실장님은 허리까지 굽혀 인사했어. 너 그분이 어디 출신인지는 알고 있지?”
“네. 육사 출신으로 중령까지 올라가셨던 분 아니세요?”
“그래. 대령은 따놓은 상태였고 장군까지도 무리 없다는 분이셨어. 그런데도 강선건설 회장님의 부탁으로 예편해서 강선건설의 비서실장 자리를 맡으신 분이야. 그분은 평범한 사람한테는 인사도 잘 안 해. 자존심이 하늘을 뚫는 양반이라고 유명한 분이야. 그런데 그런 분이 한 사장님에게는 깍듯이 인사했다. 이게 뭔 말이겠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엄청 젊어 보이던데…….”
빡!
“너는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물어봐. 알았지? 어휴~ 너 땜에 내가 제 명에 못 살 듯싶다.”
LZ그룹 경호 담당자는 식은땀을 훔치며 그래도 잘 넘어간 걸 위안 삼았다.
소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레스토랑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은은한 음악까지 흘러나오는 것이 고급스러운 내부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느낌을 전해줬다.
한진영은 레스토랑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밖에 있는 수많은 각 그룹의 수행원을 뚫고 들어온 만큼 오늘 있을 자리의 참석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구. 한 대표.”
멀리서 한진영의 모습이 보이자 강선건설의 천 회장이 가장 먼저 인사했다.
“아니지. 지금은 사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차피 대표이사나 사장이나 똑같은데 뭐 하러 직함을 바꿔서 사람 헷갈리게 해?”
“아무래도 증권사는 보수적인 곳이니까요. 대표라는 이름보다는 오너라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는 사장이라는 직함이 더 어울려서 사장으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천 회장님께서 불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돌릴까요?”
한진영이 웃으며 농담을 건네고는 손을 내밀었다.
천계산은 한진영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자주 좀 보자. 이러다 얼굴 잊어버리겠어.”
“그래서 오늘 제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자네가 나온다는 말이 없었으면 나도 안 나왔을 거야.”
천계산의 말에 자리에 앉아있던 호스트인 대한정유의 윤길영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 회장님 섭섭한 말씀이십니다. 한 사장 때문에 여기에 오신 겁니까? 제 초대가 아니라요?”
“솔직히 그렇지요. 윤 회장님도 한 사장이 나온다고 하니 자리를 만드신 것 아닙니까? 우리끼리만이라도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하. 뭐 사실이 그렇긴 하지요.”
윤길영은 호탕하게 천계산의 말을 인정하고는 한진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천계산과 악수를 한 한진영은 윤길영의 손을 잡고는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좋은 곳에 초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렴 한 사장을 모시는데 소홀히 해서야 되겠나?”
윤길영은 한진영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잠시 자기 옆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한진영 또래의 익숙한 얼굴의 젊은 남자를 한진영에게 소개했다.
“인사하게. 또래니 나보다는 이야기가 잘 통할 거야. 여기는 우리 사위. 결혼식 때 한번 봤지? 여기는 세이지증권의 한진영 사장님이니까 자네가 잘 모시도록 해.”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에너지에서 총괄기획부장을 맡은 김윤오라고 합니다.”
김윤오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한진영도 마주 고개 숙여 인사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세이지증권의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둘은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 서로 주고받으며 인사를 마쳤다.
윤길영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우리 며느리 데리고 올 걸 그랬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기풍그룹의 이정훈 회장이 배가 아픈 듯이 이야기했다.
윤길영은 그런 이정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몸도 불편한 며느님 이런 자리에 데리고 와서 뭐 합니까? 그리고 제가 알고 있기로는 며느님하고 한 사장하고 막역한 사이라고 하던데요? 아닙니까?”
“어허. 그러지 마십시오. 여기 우리 아들도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오해합니다.”
이정훈 회장이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윤길영은 농담을 받아 이성우를 향해 미안하다는 손짓을 건넸다.
이성우는 나이들이나 자신 양반들이 자기와 한진영이 놀듯이 노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보고 피식 한 번 웃고는 이정훈에게 인사했다.
“이번에 경기증권을 인수하는 것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게 있었나? 이미 자네는 내 사람이 아닌 것을…….”
“그래도 저는 기풍증권 소속이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자네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 않나? 오늘 자리도 자네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고…… 도움은 됐으니 이 녀석이나 잘 챙겨줘.”
이정훈은 곁에 있는 이성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성우와 저는 앞으로도 함께 손잡고 잘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그 정도면…… 나는 그거면 됐네.”
이정훈은 한진영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진영이 이정훈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경기증권을 인수하며 가장 마음에 쓰였던 것이 이정훈 회장의 의중이었다.
경기증권을 인수하며 일이 틀어진다면 기풍증권이 인수를 반대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한진영이었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모태는 기풍증권이었다.
중간에 한진영이 인력충원을 많이 했다고 하지만 결국 핵심 인원은 기풍증권 소속의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세이지 자산운용이 처음 올린 실적은 기풍증권의 자산을 맡아 운용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기풍증권이 충분히 싫어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경기증권을 인수한다면 같은 증권 업계의 경쟁자로 올라서게 되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자산을 맡긴 곳이 업계 경쟁자가 된다는 사실을 기풍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자기네 회사에서 빼간 사람들을 가지고 경쟁자 위치까지 오르려 하는 걸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던 한진영이었다.
그런데 이성우를 통해 전해 들은 이정훈 회장의 의중은 흔쾌히 한진영의 선택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굳이 세이지증권을 경쟁자로 생각할 필요 없이 함께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라는 말까지 전했다며 한진영을 안심시켰다.
한진영으로서는 가장 큰 근심을 해소한 것에 안심하고 경기증권 인수를 강행했고 경기증권과의 합병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됐다.
사실 이정훈으로서는 경기증권의 인수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기풍증권과 세이지증권은 운영 노선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노선을 짜놓은 사람이 한진영이었기에 믿고 한진영이 하는 대로 놔둬도 이정훈으로서는 나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기풍은 주력이 증권과 같은 금융업이 아니었다.
주력 사업을 일으켜 세우다 못해 이렇게 연합까지 구성해준 마당에 한진영이 경기증권이 아니라 기풍증권을 인수하겠다고 나오더라도 이정훈으로서는 받아줄 용의가 있는 상태였다.
이정훈은 한진영과 이성우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 차례까지 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서야. 한 사장 섭섭해.”
“아닙니다. 제가 우선순위를 두고 인사하는 건 아닙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조병수 회장이 자기 차례인 듯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영을 향해 말하자 한진영이 깍듯이 인사했다.
조병수는 한진영과 가볍게 악수하고는 조용재를 바라보고 말했다.
“얼마 전에 우리 아들을 만나 조언을 해준 거 고맙네.”
“아닙니다. LZ가 잘 되는 일이 곧 제가 잘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도 주주니까요.”
“알고 있네. 내가 최근 10년 내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바로 자네를 주주로 만들었다는 것이니까.”
“저에게 무상으로 지분을 넘기신 게 아깝지는 않으시고요?”
“아깝긴? 그 값을 몇 곱절이나 뽑아 먹었는데 아까울 리가 있나?”
조병수는 한진영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만 하게. 이번처럼 좋은 기회가 또 온다면 지분을 자네에게 또 넘길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야.”
LZ신소재의 지분을 한진영에게 넘기고도 엄청난 이익을 보고 있는 조병수가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한진영에게 건넸다.
한진영은 그런 조병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은 기회가 있다면 잊지 않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조병수는 웃으며 한진영의 가슴을 두드렸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듯한 모습의 조병수였다.
조병수까지 인사를 마친 한진영은 자리에 앉아 있는 프라임리츠의 정병선을 향해서는 눈인사만 건넸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만나는 사이기에 특별히 따로 인사를 건넬 필요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병선까지 인사를 모두 마치고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며 길었던 인사 시간을 마무리 지으려 할 때, 마지막으로 인사할 상대가 레스토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누군가? 우리의 히어로 한진영 사장 아닌가?”
선강그룹의 최대일이 몸까지 흔들며 반갑다는 뜻을 격하게 전했다.
그리고 기쁘게 다가와 한진영을 품에 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왜 회사에 놀러 오지도 않나?”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인사드리러 가지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죄송 하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저 한 사장이 보고 싶어 한 말이니까.”
최대일은 한진영의 양어깨를 잡은 채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폈다.
“신수 훤해졌어. 예전에 봤을 때하고 때깔이 달라. 확실히 그때도 느꼈지만, 자네는 남 밑에 있을 그릇은 아니었지. 그릇이 커. 아주 커.”
최대일은 호들갑을 떨며 한진영의 양어깨를 잡은 손을 두드리고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쓸어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들 잘 지내셨지요?”
“최 회장님이야말로 신수가 훤해졌습니다. 요새 새장가 드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봅니다.”
“새장가라니요? 집에 있는 집사람이 들으면 기절합니다. 어디 가서 그런 농담 하시면 큰일 나요.”
최대일은 조병수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더니 조병수의 말을 고쳐줬다.
“그저 재미 좀 보고 있는 정도입니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남자들 뭐 다 그렇듯이요. 아차차. 윤 회장님 사위도 와 있었군요. 윤 회장님. 회장님 사위는 우리 같지는 않을 겁니다. 관상이 그래요.”
“우리라고 엮으면 내가 뭐가 됩니까?”
“하하하. 윤 회장님이야말로 우리 중에 으뜸 아니셨습니까? 저도 선친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대단하셨다고요?”
“어허. 사위가 있습니다. 사위가 있어요.”
“하하하하.”
오늘 자리한 다른 총수들에 비해 어렸던 최대일이었다.
그래서 농담을 던지기도 잘했고 받기도 잘 받으며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스운 사람은 아니었다.
선강그룹이 가장 크고 힘이 강했기에 그의 발언권 또한 다른 총수들보다 강했다.
“자 그럼 작당 모의를 시작할까요?”
발언권이 가장 강한 최대일이 자리에 앉으며 시작할 것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