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떨어질 때가 더 아프다
조수아는 땀을 훔치며 천장에 달린 냉난방기를 올려다봤다.
“왜 이렇게 더워? 이거 누가 온도 올렸어?”
조수아의 말에 채권 팀 직원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밖에 날씨가 워낙 추워서…….”
“밖에 날씨가 춥다고 내부 온도를 이렇게 올리면 어떡해요? 좀 낮춰요. 가뜩이나 열불 나 죽겠는데 누구 쪄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조수아는 땀이 나는 이마를 훔치고는 온도를 올린 직원을 째려봤다.
히터를 켜지 않아도 땀이 나는 상황에 왜 히터까지 켜서 사람 열받게 하냐는 빛이 담긴 눈빛이었다.
온도를 올린 직원이 풀 죽은 모습으로 자리에 앉자 조수아는 인상을 잔뜩 쓴 채로 현황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조수아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렇게 화내고 계신 겁니까? 뭐가 잘 안되나요?”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한진영은 그런 직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계속 일할 것을 전한 후 조수아의 곁에 나란히 섰다.
조수아는 한진영을 향해 고개만 까닥이고는 현황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뜻 보면 예의 없어 보일 만한 모습이지만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를 이해했다.
현황판 속의 상황이 조수아를 화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님. 정말 괜찮은 거예요?”
현황판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조수아가 물었다.
한진영도 그런 조수아와 함께 화면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괜찮을 거라고요? 괜찮다가 아니 라요?”
조수아가 몸을 홱 돌려 한진영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수아의 반응에 한진영도 고개를 돌렸다.
조수아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한진영을 게슴츠레 바라봤다.
“확신이 있으세요?”
“확신이 있으니 2억 달러를 태우겠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도 우리 주머니의 돈도 아니라 내로라하는 그룹들의 돈까지 받아다가 말입니다.”
“좋아요. 믿을게요.”
조수아는 한진영을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다시 현황판을 바라봤다.
그리고 체념한 듯이 말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 믿지 않는다고 뭘 어쩔 수 있겠어요? 이미 이렇게까지 왔는데요.”
한진영은 조수아의 말에 웃으며 물었다.
“얼마나 매집했죠?”
“1억 7,000만이요.”
“생각보다 더디기는 하네요. 석 달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목표치를 채우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것도 정말 기적적으로 모은 거니까요.”
조수아는 말을 하고 현황판 한쪽에 적혀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반 이상이 만기 1년이 채 되지 않는 것들이에요. 그것도 대부분이 6개월 남짓 남은 것들이고요. 대표님.”
조수아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이거 잘못되면 우리도 타격이 심각해요. 2억 달러예요. 2억 달러. 그걸 한 푼도 남기지 못하고 모두 날려버릴 수 있어요.”
조수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까지 두드렸다.
“나중에 팔려고 해도 받아줄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 높아요. 벌써 우리가 견디지 못하고 던질 걸 예상해서 15bp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물량도 나오고 있어요.”
“밑에서 받아먹겠다고 말입니까?”
“왜 안 그러겠어요? 백일 내에 결판나지 않으면 물량 튀어나올 게 뻔하니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죠. 저라도 그러겠어요.”
“백일이라…….”
한진영은 말을 하고 고개를 돌려 날짜가 적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벌써 11월이네요.”
한진영은 턱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말했다.
“백일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두 달 내에 결판납니다.”
“네? 두 달이요?”
한진영의 말에 조수아는 한진영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11월이에요.”
“네. 11월이죠.”
“12월에는 거래 자체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 아시죠?”
“제가 모르고 말한 거로 생각하십니까? 혹시 잊으셨나 본데 제가 여기 세이지증권의 사장입니다.”
“사장이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잖아요.”
조수아의 말에 한진영이 손가락으로 조수아와 자기를 번갈아 가리키며 웃었다.
“우리가 같이 채권팀에 있었던 건 기억하십니까?”
“그거야 뭐 얼마나 같이 있었다고 그러세요?”
“그러니까 제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진행하는 거로 생각하신다는 거죠?”
“그건 아니지만…….”
조수아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현황판을 바라봤다.
“12월은 연말이라 거래가 뜸해요. 실제로 쉬는 날도 다른 때보다 많고요. 12월은 거의 거래가 없다고 보는 게 맞아요. 그렇다면 실제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건 한 달인데…….”
“아니요.”
“네?”
말을 하던 조수아는 한진영의 아니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뭐가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평소에는 조 팀장님의 말씀이 맞겠지만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그러니까 뭐가요?”
“올해는 12월에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12월은…….”
조수아가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치며 잘 들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의 모습에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조수아는 다시 한진영에게 설명하려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사인노스 이야기가 두 달 내에…… 아니지. 청산 타이밍까지 필요하니까 이번 달? 한 달 내에 터진다는 거예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더욱 분발해주세요. 뭐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애매하게 1억 9,500만 달러 매집. 이런 건 찝찝하니까요. 제가 원하는 건 정확하게 2억 달러입니다. 그래야 계산하기도 편하고 나중에 투자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편해서요. 부탁드립니다.”
한진영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자 조수아가 급히 한진영을 불렀다.
“사장님. 잠시만요. 사장님. 그러니까 이번 달 내에 사인노스가 터져요?”
조수아는 한진영을 따라가며 계속 물었지만, 한진영은 손을 흔들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
조수아가 궁금해하던 일은 한진영이 채권팀을 들린 후 사흘 뒤 시작됐다.
[사인노스의 의문]
짧은 기사였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 올라온 기사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안에 들어있는 기사 내용은 심상치가 않았다.
우선 사인노스가 개발했다는 에디슨키트에 관한 의문을 던지는 것부터 기사 내용은 시작됐다.
작동 장면은커녕 샘플조차 보지 못한 기계에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 의문을 던진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사인노스의 엘리자베스 무어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세계 유명 대학을 중퇴하고 사인노스라는 기업을 설립했다는데, 그녀가 도대체 기업에서 기술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는 것이었다.
의학계의 초엘리트들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중퇴에 불과한 그녀가 어떻게 해낸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업계는 물론이고 그녀를 바라보는 언론과 세상에 던진 의문이었다.
엘리자베스 무어가 나타나기 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던 인물이 있었다.
검은색 목 폴라를 입은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든가 서류 봉투에서 노트북을 꺼내며 사람들에게 놀랄만한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던 인물이었다.
기업인이었던 그의 프레젠테이션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의 회사 물건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언론은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를 포장해나가기 시작했다.
혁신이라는 단어로 그를 평가했으며 그야말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로 극찬에 가까운 기사를 쓰기 바빴다.
그의 기사는 잘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암으로 투병하다 죽은 뒤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을 언론은 찾지 못했다.
그가 살아있을 때 팔려나가던 기사들을 떠올리며 언론은 일찍 세상을 떠난 그를 대신할 사람을 찾으려 혈안이었다.
마침 그때 엘리자베스 무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와 똑같은 검은색 목 폴라를 입고 프레젠테이션한 그녀는 흡사 그의 여자 버전을 보는 듯했다.
학력도 그와 마찬가지로 중퇴라는 특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가지지 못한 좋은 집안과 여성이라는 성별. 그리고 금발의 머리카락은 그보다 어쩌면 더 잘 팔릴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언론은 열심히 그녀를 앞다퉈 그를 대신하는 인물로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지금의 그녀라는 이야기였다.
실제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성공 스토리.
기사는 그녀를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으로 결론 내렸다.
일간지에 실린다면 폭발력을 가졌을 만한 기사였다.
하지만 기사는 지면상에 실리지 못한 채 인터넷판에 그것도 자그마한 공간만을 차지한 채로 스치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의문을 품은 기사를 모니터로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작이 작습니다.”
조지훈이 아쉬운 듯이 한진영에게 말했다.
이미 2억 달러를 다 채운 마당에 기왕이면 큰 지면을 통해 의문이 쏟아져 나오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워하는 조지훈과 달리 한진영은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작을 수밖에 없지. 증거로 내놓을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 정도 공간을 할애받은 것만으로도 뉴욕타임스가 큰 결정을 내린 거나 마찬가지야.”
“뉴욕타임스가 큰 결정을 내리기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겨우 의문에 불과한 내용을 적는 것만인데요?”
“당연하지.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몰라?”
한진영이 말을 마치고 리모컨을 들어 TV 화면을 켰다.
“아무 곳을 틀어도 사인노스 이야기가 나오는 시대야. 우리나라야 뭐 당연하고 미국에서도…… 봐.”
한진영은 미국 쪽 방송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오늘 사인노스의 엘리자베스 무어가 어디서 어떤 강연을 했다는 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사인노스가 순조롭게 에디슨키트 정식 발매를 준비해가며 회사 기업가치가 드디어 300억 달러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제 사인노스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바이오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뒤를 이었다.
한진영은 300억 달러라는 기업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웃으며 리모컨으로 화면을 가리킨 채로 말했다.
“상장도 되지 않은 회사가 기업가치가 300억 달러란다. 동우 컨소시엄 사람들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을 거야. 상장만 된다면 세계 최고 ‘바이오’ 기업이 아니라 그냥 세계 최고 기업 자리에 올라갈 테니까. 그리고 그곳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동우 컨소시엄이 세계 최고의 투자기업으로 올라가는 꿈이 멀지 않았으니 말이야.”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을 살며시 받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뒤덮을 이야기가 오늘 시작됐다는 거죠?”
“하하하. 그래. 오늘 시작됐다.”
한진영은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그리고 리모컨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기사가 나온 모니터를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본래 높은 곳에 올랐다가 떨어질 때가 더 아프기 마련이지. 300억 달러에서 제로가 되는 순간을 온전히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어.”
한진영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
뉴욕타임스의 자그마한 기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점점 퍼져나갔다.
세 가지 의문은 증거라고는 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럴듯한 이야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관심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언론이 끌렸다.
그동안 자기들이 띄워줬던 엘리자베스 무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미 올라가 있는 사람을 더 높은 곳으로 밀어 올리기보다 떨어트리는 편이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없던 증거가 새롭게 발굴되어 기사와 함께 언론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무어의 대학 때 전공과 사인노스의 기술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엘리자베스 무어의 대학 때 평균 성적은 C+]
[엘리자베스 무어는 아무런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제일 먼저 이야기 나온 것은 엘리자베스 무어의 대학 때 이야기였다.
그녀의 학사 때 학점은 평균 C+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즉, 아이디어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학교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더욱더 그녀가 내놓았다는 논문에 나와 있는 것들은 현재 사인노스가 개발하고 있는 에디슨키트 내의 어떤 기술과도 접점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녀가 자랑하는 뛰어난 기술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혁신을 이야기하던 그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낼 줄 알았지만, 휴대폰을 만들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누가 그가 휴대폰을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CEO라고 하여 모든 기술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개발할 때 기술적인 자문을 구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품이 나왔을 때는 항상 CEO의 이름이 앞에 붙기 마련이며 에디슨키트의 경우에도 저의 이름이 앞에 붙게 될 겁니다.”
엘리자베스 무어는 이야기가 확산할 것처럼 보이자 재빨리 이야기를 진화했다.
설득력이 있는 말로 CEO와 개발자의 차이를 설명했고, 자기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일 뿐.
그 어디서도 자기가 에디슨키트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언론에서 시작된 바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금세 진실이 드러나는 역할을 오히려 하고 말았다.
“제가 직접 에디슨키트의 개발에 참여했으며 제가 기본 틀을 만든 상황에서 현재 개발진들이 투입되어 살을 붙인 겁니다. 에디슨키트는 저의 자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태동부터 시작하여 태어나고 걸어 다닐 때까지 모두 제 손 아래서 커왔습니다. 이제 홀로 설 수 있을 때야 제 손을 떠났으니 제가 곧 에디슨키트의 발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무어의 발언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갔다.
자기 입으로 직접 자기가 발명했고 개발했다는 말이 버젓이 나온 강연 동영상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무어가 거짓말을 하는 것까지는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그저 PR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과장된 표현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기대는 다음 이야기가 나오며 바뀌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