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김교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안혁규는 그런 김교철의 모습이 답답했던지 직접 김교철을 지목하여 질문했다.
“김 대표님. 뭐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정말 생각해놓은 방법이 없으신 겁니까?”
안혁규의 질문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김교철의 입을 바라봤다.
그러나 김교철의 입은 굳게 닫힌 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혁규는 그런 김교철의 모습에 울화통이 치미는 듯했다.
가슴을 몇 차례나 두드린 안혁규는 다시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모두 뒤집어쓰게 생겼습니다. 주기문 전 장관님. 이것만큼 확실한 게 없다면서요? 서 변호사님. 완벽하다면서요? 이 장관님.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기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들 왜 말이 없습니까?”
“안 실장님. 답답한 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너무 닦달하지 마십시오.”
이의경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혁규는 그런 이의경 법무부 장관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소리쳤다.
“닦달? 닦달? 지금 닦달이라고 했습니까? 상황이 지금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 장관님이 제대로 모르시나 보군요.”
“저도 알 만큼 압니다.”
이의경은 지지 않고 안혁규를 향해 소리쳤다.
“미국에서 우리 법무부로 협조 요청 공문이 하루에 몇 통이나 날아오는 줄 아십니까?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내용의 협조 요청 공문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안혁규는 이의경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알면서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아니까 한 말입니다. 가만히 좀 기다려보세요. 지금 당장 이곳에서 방방 뛴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방방 뛰는 게 과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말꼬투리를 잡아 들어오는 안혁규를 향해 이의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보다 못한 현봉국이 나서서 두 사람을 중재했다.
“그렇게 화내시지 마십시오. 화내신다고 달라질 게 아니지 않습니까?”
“끄응.”
이의경은 현봉국의 말에 기분이 나쁜 것을 억지로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현봉국의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화만 낸다고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침묵을 삼키던 김교철이 주변을 살피고 현봉국에게 물었다.
“프라임리츠의 정 회장이 안 보이는군. 그는 오늘 오지 않았나?”
“역시 주먹 쓰는 새끼는 믿을 게 되지 못합니다. 저쪽에 붙었다고 합니다.”
“저쪽?”
김교철이 의아한 듯이 현봉국을 바라보자 뒤에 서 있던 박경진이 조심스럽게 김교철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김교철은 박경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것 같으이. 내가 조금 흔들리고 있다고 바로 배를 갈아타 버리니 말이야.”
“대표님. 저희는 그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고맙지. 기다려보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이야 되겠나?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걸세.”
김교철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교철이 기회가 온다고 이야기했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세상이 움직였다.
***
사인노스의 이야기는 이제는 겉잡을 수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인노스 내부에서도 직원들 간의 교류를 엄격히 제한하고 위에서만 컨트롤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소식은 사인노스 상층부에서 작정했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증거가 됐다.
어떤 변명으로도 사인노스의 일을 무마할 수 없게 됐으며 계획된 범죄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꼴이 됐다.
방송에 나오기 좋아하고 강연하기 좋아하며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던 엘리자베스 무어가 잠적하여 모습을 숨겼다.
임원급 이상 인물들도 전 세계로 흩어져 버렸다.
사인노스라는 회사의 결정권자들이 모두 회사에서 사라지며 300억 달러가 넘는다는 기업가치는 한순간에 제로에 수렴해 버리고 말았다.
직원들은 월급 대신 사무기기들을 들고 회사에서 나오는 모습이 방송사 카메라에 잡혔다.
사인노스와 계약을 체결했던 기업들은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사인노스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약국 체인의 경우에는 사인노스의 투자금까지 더하여 수억 달러에 달하는 소송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나온 것이었다.
이제 사인노스의 문제는 에디슨키트의 존재 여부의 이야기에서 진화했다.
사인노스에 투자한 투자자들을 어떻게 보호하는 것이 맞냐는 쪽으로 미국 정부가 움직여나갔다.
조수아는 한진영 앞에 서서 현재 국채의 움직임을 보고했다.
“현재 만기 5년물의 국채의 경우 50bp의 CDS 프리미엄이 붙어서 거래가 되고 있습니다. 전주보다 약 30%의 프리미엄이 더 붙은 것으로 CDS 프리미엄의 상승 속도가 매우 가파른 상태입니다.”
“채권 거래자들 사이에서의 분위기는 어떻지요?”
한진영의 질문에 조수아는 보고를 위해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리고 대답했다.
“분위기는 많이 안 좋은 상태예요. 사인노스 스캔들이 퍼져나가며 채권의 매력도를 잡아 끌어내린 상태니까요. 하지만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라는 수준이라 견딜만하다는 눈치예요.”
“여기까지는 견딜만하다. 그러면 여기서 더 나간다면요?”
“그럼 버티기 어려울 거예요. 지금 다음 달이 12월이라는 게 오히려 투자자들의 마음을 더욱 냉각시키고 있어요. 마감하고 한해 정산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좋지 못한 움직임이 보이는 것을 끌어안고 해를 넘길 수는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태예요.”
“좋습니다.”
조수아는 좋다고 말하고 희미하게 웃고 있는 한진영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뭘 말씀입니까?”
“계속…… 들고 가나요?”
“그럼요. 계속 가지고 가야죠.”
한진영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웃고는 조수아에게 말했다.
“제가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배율이 10배입니다.”
“10배…….”
조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한진영의 말을 따라 말했다.
10배라는 수치가 가져다주는 놀라움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놀란 표정의 조수아를 바라보고 계속 이야기했다.
“25bp에서 잡은 걸 250bp에서 정리해준다고 약속했으니 계속 가야죠.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대표님의 말씀은 이해가 가기는 하는데…… 여기서 더 오를까요? 아니. 더 오르기는 하겠죠. 하지만…… 250bp까지 갈 수 있을까요? 250bp는 너무 높아요.”
“가능합니다.”
“가능하다는 말씀은 여기서 더 나올 이야기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이미 사인노스 이야기는 나올 대로 나왔는데도요?”
조수아는 한진영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사인노스의 파산 이야기까지 이미 나온 상황에서 CDS 프리미엄이 어떤 이야기로 250bp까지 간다는 것인지 궁금한 조수아였다.
파산 이후에는 다른 이야기가 나올만한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런 조수아의 모습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조수아와 같은 생각을 채권 시장의 많은 투자자가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한진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짙어져 갔다.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250bp 나아가 500bp까지도 갈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네? 어떤 생각이요?”
조수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한진영이 조수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조 팀장님이 생각하는 그 생각 말입니다.”
“저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 상황에서 CDS 프리미엄이 더 나올 것이 없다. 새로운 이야기가 나와야지만 더 올라갈 테지만,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만한 것도 없다는 그 생각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잖아요.”
“네. 사실이죠. 하지만 꼭 이야기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이야기만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요?”
한진영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미궁 속에 빠져드는 기분을 느낀 조수아였다.
“이야기만 필요한 게 아니면 뭐가 필요한데요?”
“이야기 대신 행동이 나오면 됩니다.”
“어떤 행동이요?”
“저런 행동 말입니다.”
한진영이 말을 하고는 조수아 뒤편을 가리켰다.
조수아는 한진영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조수아의 뒤편에는 TV가 음소거가 된 채로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속보를 통해 미국이 대한민국이 진행하는 모든 투자업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거라는 미국 행정부의 소식은 자막을 통해 알리는 중이었다.
한진영이 말한 행동이 바로 미국 행정부의 움직임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의회 차원의 청문회나 사법기관의 조사와는 다른 행정부의 직접적인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미국 행정부의 움직임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대한민국이 진행하는 일제 조사업무는 민관을 따지지 않고 진행되는 만큼 대한민국에 대한 신뢰를 급격히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잃어버린 신뢰는 신용으로까지 바로 이어졌다.
IMF 이후 꾸준히 오르던 신용등급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등급을 조정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상태대로 이어진다면 ‘신용등급전망에 대한 하향은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발표가 나온 것이었다.
IMF 시절 급격한 신용등급 하락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어봤었기에 이런 신용평가사의 이야기에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과 30년이 안 된 시절 이야기이기에 아직도 당시 어려움을 겪어봤던 사람들이 지금도 활발히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그 영향은 더욱 크게 시장을 타격했다.
***
토론회 자리에 나온 사람들은 진영을 나눠 싸우기보다는 모두 한목소리로 동우 컨소시엄에 대해 토로를 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동우 컨소시엄이 너무 공격적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투자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진행자의 질문에 대학교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투자 자체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까지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투자라는 것이 매번 성공할 수는 없으니까요. 실제로는 많은 실패를 동반해야 하는 것이고 10번 중에 한두 번만 성공해도 된다는 것이 바로 투자라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속도. 바로 속도가 문제였습니다.
-속도요?
진행자가 고개를 돌려 모 증권사 리서치센터 센터장을 맡은 사람을 바라봤다.
그는 눈치껏 진행자가 자기에게 발언할 기회를 준 것을 깨닫고 급히 맞장구를 쳤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속도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속도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진행자의 말에 센터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교수가 하던 이야기를 이었다.
-투자를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투자받는 곳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투자처의 재정 상태가 건전한지부터 시작해서 가지고 있는 기술이 투자를 받을 만큼 가치가 있는지, 기술을 구현하여 시장에 내놓을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등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확인할 때마다 투자 금액을 서서히 늘려가야 하는 것이고요.
센터장의 말에 진행자는 잘했다는 뜻을 눈빛으로 건넨 뒤 오늘 핵심이 될만한 질문을 던졌다.
-그 말씀은…… 동우 컨소시엄은 그런 것 없이 마구잡이 형식으로 투자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굳이 제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밝혀진 것만 50억 달러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6조가 넘는 돈이지요. 그 돈을 어떻게 집행했는지는 여러 언론을 통해 공개됐으니 따로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너무 주먹구구식이었다. 이것만큼은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센터장이 말을 하고 침중한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처음 이야기를 꺼낸 교수가 센터장의 말을 받았다.
-성급함을 넘어선 무언가가 느껴질 정도의 투자 형태였습니다. 확인이란 작업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투자를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구잡이 식의 투자를 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습니까?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이 하락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일 겁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입니다.
센터장까지 교수의 말에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진행자는 분위기가 고조된 것을 확인하고 지금의 사태를 불러일으킨 곳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동우 컨소시엄이 일으킨 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동우 컨소시엄이 도대체 어떤 곳입니까?
진행자의 말에 센터장이 코웃음을 치며 이야기했다.
-많은 분이 동우 컨소시엄을 듣고 동우라는 곳이 어디인지 쉽사리 떠올리지 못하셨을 겁니다. 동우라는 기업도 없으며, 금융사 이름 중에 동우라는 곳을 쓰는 곳도 없으니까요. 바로 동우는 동우 로펌의 이름을 따와서 부르는 겁니다.
-동우 로펌이라면 우리나라 로펌 순위로 1위에 해당하는 곳인데요. 어떻게 동우 로펌이 컨소시엄의 주축이 된 겁니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로펌이…… 법정에서 시비를 다투어야 할 곳이 투자에 관련된 일에 앞장섰다는 것 그리고 그런 곳을 믿고 정부가 투자를 강행했다는 것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결고리라면…….
진행자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이제부터 나올 이야기는 자칫 잘못 이야기하다가는 후폭풍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던 원로 정치인이 신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현 정부가 처음 문을 열 때 내각 인사들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동우 로펌의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회전문 인사라는 말이 나돌 지경이었지요.
-그렇다면 동우 로펌 출신의 사람들이 이번 투자와 관련되어 어떤 영향을 끼쳤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바로 동우 로펌의 사람들이 투자 진행과 관련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은 사인노스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부터 이야기 나온 것이니까요.
원로 정치인의 발언에 진행자가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강도 높은 이야기에 방송이 끝난 이후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벌써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 진행자의 눈에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최석영이 눈에 들어왔다.
-최 이사님께서는 이번 일과 관련되어 하실 말씀이 없으신가요?
진행자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카메라까지 최석영을 바라봤다.
그가 지금까지 방송에 나와 이야기할 때마다 폭풍이 몰아쳤던 것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어떤 말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에 찬 눈으로 최석영을 바라본 것이었다.
가만히 굳게 입을 닫고 있던 최석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 자리에 계신 분들께서는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고요? 그게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최석영이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내뱉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