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382화 (382/650)

382화 그릇이 다르다

한진영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조지훈을 향해 지시했다.

“TV 끄고 가자.”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그리고 급히 나가려는 한진영의 뒤에 바짝 붙어 물었다.

“어딜 가시는지…….”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채권팀에 가야지. 지금 정신없을 테니까 소란 떨지 말고 조용히 가자. 알았지? 쉿.”

한진영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따라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고는 회의실을 나가는 한진영의 뒤를 따랐다.

투자사업본부를 떼어 경기증권 본사였던 곳으로, 옮긴 세이지증권은 현재 이곳 전체를 운용본부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아직은 사장실을 비롯하여 관리팀이 이사를 가지 않은 상태지만 경기증권의 공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한진영을 비롯한 관리팀도 경기증권으로 옮겨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롯이 이곳은 운용 관련 부서들만이 남아 운용업무만을 진행하게 되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채권팀으로 가는 도중에 보이는 현황판과 모니터들을 살피며 조지훈에게 물었다.

“잘해놓지 않았나?”

“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이 정도로 시스템을 잘 구현해놓은 곳은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엔 10년은 앞선 시스템처럼 보입니다.”

“맞아. 정확히 봤어. 10년 앞서는 시스템이야.”

한진영은 마음에 쏙 들게 세팅된 시스템을 훑어보고 이야기했다.

“정보가 생명이듯이 시스템은 팔과 다리나 마찬가지야. 팔과 다리가 제대로 잘 붙어 있고 잘 움직여야 남들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거야. 우리 회사의 자랑인데 이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아쉽다.”

한진영은 뿌듯한 표정으로 잘 동작하고 있는 시스템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한진영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계속 신경 써왔던 게 바로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시스템이었다.

IT 센터에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각 팀에 맞는 정보와 전략을 뿌려준다.

그리고 현황판과 모니터를 통해 들어온 이런 정보와 전략을 토대로 각 팀은 움직인다는 것이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지금 채권팀도 바로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조수아는 현황판을 바라보고 곁에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자기 앞에 보이는 모니터 속에 나온 정보들을 확인하고 조수아에게 보고했다.

“미국계 투자회사에서 대량의 숏물량이 출회되고 있습니다. 일본계와 홍콩계에서도 주문이 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는? 혹시 받아주고 있나?”

“아니요. 전혀 받아줄 생각이 없는 모습입니다. 기관 측에서도 이 상황에서는 관망을 하는 편을 택하는 중입니다. 현재 거래되는 5년 만기 채권의 CDS 프리미엄은 100bp를 넘긴 상황입니다.”

한진영은 빠르게 이야기가 오가는 채권팀 속으로 다가와 아쉬운 듯이 이야기했다.

“100bp. 뭔가 좀 부족한데요.”

“오셨어요?”

머리가 반쯤 헝클어진 조수아가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한진영은 조수아의 인사를 가볍게 받고는 조수아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같이 확인했다.

“추세는 가팔라지고 있군요.”

“가파른 정도가 아니에요. 조금 전 기자회견 이후 시장이 급변하고 있어요. 더는 기대할 곳이 없다며 손절 물량까지도 나오는 지경이에요.”

한진영은 마치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는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런 한진영의 마음을 더욱 흐뭇하게 하는 정보가 화면에 떴다.

[(속보) 금일 저녁 S&P에서 신용등급 조정 예고, 피치와 무디스 등도 내일 오전 중으로 신용등급 조정이 예상된다는 내용이 미국 현지에서 전해지는 중]

“불길에 기름을 부었나 봅니다.”

한진영의 말을 들으며 속보를 확인한 조수아는 허탈한 모습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셨대요?”

“누구 말씀이십니까?”

“파란 집에 계시는 분이요. 도대체 왜 그러셨대요?”

“글쎄요. 그걸 저희야 알 수가 있겠습니까? 높은 분들이 내린 결정이니 무언가 의미가 있겠지요.”

마치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조수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됐든지 간에 최악의 선택을 한 것 같네요.”

조수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를 통해 확인하고 있던 팀원이 소리를 질렀다.

“125bp 돌파했습니다.”

팀원의 보고에 조수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돈을 벌게 생겼고요.”

쓴웃음을 짓는 조수아와 달리 한진영의 얼굴에 피어있는 흐뭇한 웃음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한진영은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조수아를 향해 지시했다.

“250bp에서 절반 물량을 정리하세요. 그리고 400bp에서 나머지 절반을 정리하시고요. 이번 일로 수수료까지 더해서 20억 달러를 벌었다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과를 올린 것일 테니까요.”

조수아는 만족할만한 성과가 아니라 놀랄만한 성과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자기 그릇 안에서는 놀랄만한 성과겠지만 한진영이 가지고 있는 그릇에서는 이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여튼 달라. 우리들과는 다른 사람이야.’

조수아는 한진영의 옆얼굴을 보고 기가 찬다는 듯이 속으로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

특별 담화가 담긴 기자회견으로 인해 상황은 악화일로로 빠져들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선을 그어 자기들은 몰랐다는 태도를 취하려 한다는 것이 외부로 공개되며 오히려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즉각적인 비난 성명을 내보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숙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한번 이번 일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피해자들을 위해 진심 어린 반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국가 원수로서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강도 높은 비난을 한 백악관 대변인의 발표가 청와대 기자회견 뒤에 곧바로 전파를 탔다.

언론 또한 이런 비난에 힘을 실었다.

처음 사인노스의 비리를 세상에 공개한 뉴욕타임스의 신랄한 비판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얼굴을 붉힐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각 나라에는 그에 걸맞은 지도자를 가지기 마련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인 지금의 지도자가 자기들에게 맞는 지도자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워싱턴포스트지의 비판도 뒤를 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앞장서 사인노스를 지원했다는 것을 전 세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대한민국의 지도자만이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재가 없이 이루어진 지원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침을 떼는 것인가? 어느 쪽이건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보여줘서는 안 될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양당 지도자들도 대한민국을 비난했다.

서로 양극단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정치인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기자회견을 비난한 것이었다.

미국이 시작을 하자 유럽이 뒤를 이었다.

유럽의 언론과 정치인들도 대한민국을 비난하기 바빴다.

사고를 터트린 것은 사인노스와 엘리자베스 무어이건만 마치 이번 일을 대한민국이 꾸민 것처럼 나서서 철저히 대한민국을 가해자로 만들어 간 것이었다.

[S&P, 대한민국의 신용등급 2단계 하향 조정, 정부 리스크가 하향 조정의 이유로 발표]

[무디스, 3단계 하향 조정 및 부정적 전망 계속 유지]

[피치, 당분간 NR로 등급을 매기지 않겠다고 선언, 사태가 진정되고 진심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상황을 안정시킬 자세가 되어 있다고 여겨졌을 때 다시 등급을 매기겠다고 발표]

3대 신용평가사들이 일제히 대한민국의 신용등급을 하향했다.

보수적으로 신용등급을 지정하는 S&P조차 정부 리스크를 이유로 들어 단번에 2단계 하향을 발표했다.

무디스와 피치는 S&P보다 과격하다고 여겨질 만한 워딩을 통해 매우 부정적인 상태임을 이야기했다.

동시에 같은 날 3대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 하향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일각에서는 미국 정부의 압박이 있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기자회견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번져갔다.

한진영은 차 안에서 조지훈의 보고를 들었다.

“현재 환율은 1,500원에 육박한 상황입니다. 한국은행에서 환율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상황이 나아질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대로 1,500이 뚫리면 지난 IMF 시절 찍었던 1,900원대까지의 상승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시장을 강타하는 중입니다.”

한진영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조지훈은 다음 보고를 시작했다.

“환율이 급등하고 외국인들이 자리를 떠나자 주식시장 또한 급락을 이어가는 모습입니다. 시장은 1,600선의 하향 이탈을 시도하는 모습입니다. 특징주로는…….”

조지훈은 주식시장에 대한 브리핑을 이어갔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운용본부의 홍 본부장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큰 피해는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확인?”

“우리나라 산업이 흔들린 것이 아니고, 세계시장이 악화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펼쳐진 정치 리스크라고 판단을 내려도 되는지 여쭤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신용등급까지 하락한 상황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게 없다면 이쯤에서……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조지훈은 보고한 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홍대민이 물어본 이야기를 조지훈도 궁금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제가 대한민국 금융시장의 최대 의문일지도 몰랐다.

환율은 한없이 치솟는 중이었다.

주식시장이 급락하고 있으며 채권시장은 이미 맛이 가버리고 말았다.

금융시장은 혼란 속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국내시장과 달리 해외시장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산업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특이한 케이스로 생각하여 슬슬 물량을 매집해도 되는 것이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이 던진 질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의 일은 정치 리스크가 맞아.”

한진영은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세계 경제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상태니까 이번 일만 잘 해결이 된다면 본래의 자리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조지훈은 마른침을 삼키고 한진영의 말에 귀를 세웠다.

바로 ‘하지만’ 다음부터가 진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 있는 조지훈을 바라봤다.

궁금증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 있는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향해 그가 듣고 싶어 하던 질문의 정답을 이야기했다.

“그걸 기대하고 먼저 움직이다가는 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야.”

“그럼 이 상황이 조금 더 이어진다는 말씀이신가요?”

“현재 CDS 프리미엄이 몇이지?”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이 급히 가지고 있는 태블릿을 확인했다.

나오기 전에 조수아를 통해 건네받은 정보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 200bp를 넘겼습니다.”

조지훈은 바로 보고하고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예상대로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몇에 정리가 들어가야 한다고 했는지 기억해?”

“외부에서 투자받은 건 250bp, 우리 물량은 400bp라고 말씀하신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표치는 500bp라고…… 아~”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계속 여기가 끝이 아닐까? 이쯤이면 진정이 되지 않을까? 예측하는 버릇이 있어. 그리고 자기의 예측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고는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해. 그러다 당하는 거야.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실이 있고 지하실이 1층, 2층, 3층 죽죽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한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지훈을 향해 지시했다.

“홍 본부장에게 기준은 전략실에서 나온 전략을 기준으로 하여 조금 더 느긋한 자세로 시장을 바라보라고 말해. 시장이 무르익기 전에 먼저 들어가서 파도를 온몸으로 맞을 필요가 없다고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바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에 바로 대답하고는 의자에 몸을 똑바로 돌려 앉았다.

조지훈은 홍대민이 어떤 의도로 한진영에게 물어보려 했는지 알았다.

그리고 자기도 그런 홍대민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여 한진영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의 말을 듣고 보니 자기가 너무 쉽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600까지 왔으면 거의 다 온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느낌에 근거하는 것일 뿐 실상은 더 깊은 골이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조지훈은 자기는 물론이고 홍 본부장까지 빠질 정도의 함정이라면 개인들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많이 빠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지훈은 개인들의 시체로 뒤덮여있을 함정을 떠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한진영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조지훈이 개인들의 무덤을 생각하는 도중에 차가 허름한 식당 앞에 도착했다.

“여긴가?”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이곳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허름한 곳이네.”

한진영은 짧은 평을 내리고 차 문을 잡은 채로 말했다.

“나 혼자 오기를 바라니까 김 기사님과 조 실장은 주변 좀 돌다 내가 연락하면 오도록 해. 식사도 하고…….”

“아닙니다.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한진영은 차 문을 반쯤 몸을 바깥으로 걸친 채 말했다.

“안전에 관련돼서는 나보다 더 신경을 쓸 사람이니 괜찮아.”

한진영은 괜찮다는 말과 함께 짧은 인사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김교철이 기다리고 있다는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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