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의도치 않게 시장 안전판 역할을 하다
어둑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지만 세이지증권의 운용본부 각 팀장은 속속 회사로 모여들었다.
집에서 주말을 즐기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소집 지시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회사로 달려온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김석현이 구겨진 양복 웃옷을 손으로 털며 나란히 걷고 있는 고제상을 향해 질문했다.
“글쎄요. 아마 오늘 집회에서 있었던 충돌 때문에 부르신 것 같습니다.”
“별일 아니라고 하던데요?”
“저도 그렇게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른가 봅니다.”
“다르다고요?”
“네. 제 와이프가 이용하는 SNS에 현장 사진이 올라오고 있는데 다친 사람이 피까지 흘리고 있더군요. 뉴스에서 나온 것보다 조금 더 심각한 모습인 것 같았습니다.”
“피까지 흘려요?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인 정도가 아니에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최수찬 조정실 실장이 다가왔다.
홍대민이 운용본부 본부장으로 승진하며 그 자리를 부실장이었던 최수찬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정말인 정도가 아니라니? 뭐가 얼마나 더 있길래 그래?”
김석현이 최수찬을 향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최수찬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김석현에게 보여줬다.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뭐야?”
“물대포요.”
“물대포? 그거 아직도 쓰고 있어? 몇 년 전에 그거 쓰다가 사람 죽어서 쓰지 않겠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죠. 쓰지 않겠다는 게 지금 나왔어요.”
“이거 지금 사진 맞아?”
“맞다니까요. 보세요. 여기 구호들이요.”
최수찬이 사진을 확대해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보여줬다.
그곳에는 사인노스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합성은…….”
합성이 아니냐고 물어보려던 고제상은 묻는 것을 멈췄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식의 질문을 꼬투리로밖에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쏘지는 않았다는데 서로 대치하고 난리가 아닌가 봐요.”
“아직도?”
“그러니까요. 아직도 일부는 해산하지 않고 경찰하고 대치하고 있나 봐요. 시간이 벌써 자정에 가까워져 오는 데 말이에요.”
정오부터 시작한 집회였다.
6시까지 모든 집회를 마치고 8시 전에 해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그런데 해산 목표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김석현 등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이 그래도 대충 서로 신경전만 벌이다가 말겠지.”
“그렇겠죠?”
“그렇죠. 여기서 더 큰 일이야 벌어지겠어요? 그리고 피 흘리는 사진도 어쩌면 왜곡돼서 보인 것일 수도 있어요. 앞뒤 정황이 없으니 피곤해서 코피 쏟은 것도 사진상으로는 마치 다툼 끝에 나온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가요?”
김석현의 말에 고제상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구 쪽을 바라보고 아는 척을 했다.
“어? 조 팀장.”
그들의 눈에 조수아가 들어왔다.
조수아는 빠른 속도로 걸어 들어오는 중이었다.
“어디 있다가 오는 거야? 왜 그렇게 급해 보여?”
“집에서 오는 길인데…… 세 분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세요?”
“뭐하긴? 사장님께서 부르셔서 가는 길인데? 조 팀장도 그래서 회사 온 거 아니야?”
“아니. 제 말은 왜 이렇게 한가하냐 이 말이에요.”
“어?”
자정에 그것도 주말 자정에 바쁘게 움직일 이유가 뭐가 있냐는 듯한 표정의 세 사람이었다.
물론 한진영이 이 시간에 부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급한 일이 있을 뿐 급하게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 세 사람의 생각이었다.
조수아는 여전히 느긋한 표정을 보이는 세 사람을 향해 정신 차리라는 듯이 소리쳤다.
“지금까지 대표님이 신경 쓴 게 어느 파트예요?”
“그거야 조 팀장네 파트지. 채권 파트.”
“그래요. 그런데 운용본부의 모든 사람을 불렀어요.”
“어?”
조수아의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눈을 살짝 들어 올렸다.
조수아의 말은 그런 세 사람의 귀에 계속 들렸다.
“그럼 뭔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으세요?”
조금 전까지 짧게라도 반응을 하던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수아는 그런 그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CDS가 진짜로 500bp가 간다고요. 그리고 500bp가 가면 세분이 움직이는 것들은 멀쩡할 거 같아요? 특히 최 실장님.”
“네?”
“홍 본부장님이 이렇게 멍한 표정의 최 실장님을 보면 뭐라고 하실 것 같으세요?”
“아…….”
최수찬은 등골이 서늘해져 오는 표정을 지었다.
조수아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홍대민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지금 난리가 났다고요. 난리가요. 그런데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어떡해요? 당장 7시간 뒤부터는 뉴욕거래소 시간 외 거래가 시작하는데 말이에요.”
조수아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 사람은 자기들이 너무 느긋했음을 깨달았다.
그녀 말대로 500bp까지 간다면 외환과 원자재 등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특히 주식 관련돼서는 그 후폭풍이 다른 것보다 더 거셀 수도 있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집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 나누기에는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갑시다. 빨리 가요.”
정신을 차린 김석현이 빨리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를 이어 고제상과 최수찬 모두 발바닥에 불이 붙은 듯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조수아는 고개를 젓고는 세 사람이 지나간 길을 따라 안으로 향했다.
한진영은 회의실에 도착하자 땀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땀 냄새의 주인공들이 팀장들인 것을 깨닫고 살며시 창문을 열고는 팀장들에게 말했다.
“다 같이 어디 운동이라도 하다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상황이 급하게 느껴지는 만큼 급히 오느라 땀을 조금 흘렸습니다.”
고제상의 말에 조수아가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의 코웃음을 듣고도 모르는 척 고제상을 향해 말했다.
“상황이 급하다는 게 느껴지시다니 다행입니다. 언론을 통해 별거 없다는 듯이 보도돼서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아닙니다. SNS를 통해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물대포를 비롯하여 경찰들이 강경 진압을 시행할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는 마당에 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석현까지 고제상의 말에 동조하자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박도하에게 지시했다.
“자 지금부터 실제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사진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회의실의 불이 꺼지고 IT센터에서 수집한 사진들이 화면에 나왔다.
사진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회의실에서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단편적으로 보던 사진과는 차원이 다른 사진들이 화면 속에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피를 흘리는 사진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실려 가고 쓰러진 동료를 부축한 사람을 향해 경찰이 강경 진압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최수찬이 김석현과 고제상에게 보여준 물대포 사진 또한 화면에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대포에 올라가는 사진과 그런 사람들을 방패로 내려치는 사진도 함께 나왔다.
최수찬이 보여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사진이었다.
한진영은 놀란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현재 집회는 시위로 변했으며 경찰은 이런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강경 진압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상황은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과격하며 폭력적이라는 것이 현재 SNS상에 돌아다니는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내일 우리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입니다.”
한진영은 어둡게 불이 꺼진 회의실 앞으로 나갔다.
“그동안은 단순하게 CDS만을 거래하던 것에서 나아가 이제부터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매매할 계획입니다.”
“모든 자원을요?”
“네. CDS를 통해 벌어들인 돈까지 모두 집어넣을 계획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사람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사인노스 사태를 예상하여 CDS를 대량으로 거래했던 세이지증권이었다.
그런데도 하방 포지션을 구축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매매에 집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방은 아닐 것 같고…… 설마 상방 포지션을 구축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타겟은 대통령의 탄핵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이 될 겁니다.”
“탄핵 이야기가 나오는데 상방을…… 잡으신다고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주말 자정이 넘어간 시점에 약간은 몽롱함을 가지고 있었던 기운마저 한진영의 말에 모두 날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놀란 표정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웃으며 김준하에게 손짓했다.
김준하는 운용본부의 팀장들이 모이기 전 한진영과 이야기 나눴을 때의 기분을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준비한 것을 이야기했다.
“우선은 임시로 계산한 것이니 그것을 염두에 두고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부터 시작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김준하는 긴급으로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
주말에 광화문에 모인 인원은 경찰 추산 150만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집회 참석자와 경찰 간의 충돌로 집회 측 15명, 경찰 30명이 경상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는 발표도 함께했다.
그러나 이런 발표에 집회 주최 측은 강력히 반발했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에 모인 인원을 500만으로 광화문에만 300만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고 이야기했다.
충돌에 의한 피해도 경찰 측과는 달랐다.
집회에 참여한 시민 50명이 다쳤으며, 그중에 어린아이들도 5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주최 측은 즉시 사진을 공개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과 팔에 부목을 대고 있는 사람이 사진에 찍혀 있었으며 얼굴에 거즈를 댄 어린아이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최 측은 평화롭게 해산하려는 시민들을 경찰이 강경하게 진압했다며 폭력적인 경찰의 행동을 성토했다.
그리고 경찰의 피해는 시민들의 피해를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포장된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경찰과 집회 주최 측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한진영은 사무실이 아닌 운용본부 조정실에 직접 나가 시장의 변화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5년 만기 CDS 프리미엄은 현재…… 425bp까지 치솟았습니다. 전날 있었던 시위로 3대 신용평가사가 신용등급 강등을 재차 진행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며 CDS 프리미엄의 상승에 힘을 보태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물량은 잘 팔려나가고 있네요.”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한진영이 보고 있는 화면을 함께 바라보고 말했다.
“네. 시장 예상보다 25bp나 낮게 판매하는 바람에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웃으며 물었다.
“혹시 정부 쪽에서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나요?”
“아니요. 오히려 고맙다는 연락을 기재부 측으로부터 비공식 채널을 통해 들었습니다.”
“고맙다고 했다고요?”
한진영은 의외의 말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홍대민도 의외이기는 마찬가지였던지 한진영의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가 됐건 우리가 물량을 풀며 CDS의 급등을 막아주고 있으니까요. 아마 우리가 400bp에 물량을 풀지 않았다면 단숨에 450bp를 넘겼을지도 모른다는 게 지금 시장의 해석입니다.”
“하하하. 재미있네요. 우리가 시장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다. 재미있습니다. 재미있어요.”
의도치 않은 일이었지만 홍대민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시장을 세이지증권이 막아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소문에 소문이 더해진 지금 해외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내부에서의 반발은 더욱 해외의 시선을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강경 진압이라며 평화로운 집회를 벗어나 시위를 펼치겠다는 주최 측과 불법 시위는 더는 묵과하지 않겠다는 정부가 첨예하고 대립하는 중이었다.
전날 시위도 불법 시위였음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 허용해주었는데 결과는 결국 폭력 시위로 변질됐다며 이제는 불법 시위에 철저하게 대응하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집회 주최 측은 이런 정부의 태도에 실망함을 표시하며 구호를 사과와 안정이 아닌 퇴진과 탄핵으로 바꿔 잡았다.
더는 이 정부를 신뢰할 수 없으니 정부 전체를 갈아엎어야 한다는 것이 집회 주최 측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주장을 관철할 수 없다며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는 주장을 보이기도 했다.
수요일에 우선 퇴진 시위를 준비하고 주말 국민 천만 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를 추진한다는 것이 주최 측의 계획이었다.
경찰은 천만이 아닌 오천만이 모이더라도 불법은 불법이라며 초강경 진압을 준비한다는 모습을 보였다.
굽히지 않은 양측의 대립은 시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이지의 CDS 물량 출회는 시장에 숨통을 틔워주는 한 가닥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홍대민은 한참을 웃고 난 뒤 잠시 숨을 낮게 토해내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기재부가 고맙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기는 합니다. CDS 프리미엄이 400bp를 기준으로 막혀버리니 환율도 1,500원을 돌파하려던 것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환율과 CDS 프리미엄이 막히니 주식시장도 같이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고요. 우리가 물량을 던지기 전에는 시장이 붕괴하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마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꿈보다 해몽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놔두면 되지요. 우리는 그사이 돈이나 법시다.”
한진영은 홍대민을 향해 가볍게 웃고 지시했다.
“시장 가격 예상치가 425bp이니 400에 던지는 족족 잡혀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채권팀의 조 팀장에게 물량 던지라고 하세요.”
“많이 정리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15억 달러 치나 남았는데요? 그걸 그냥 다 던져도 될까요?”
“네. 그냥 다 던지라고 하세요. 차라리 매수자들이 잡아먹고 들어오게 만들도록 해주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니 매도 물량으로 걸어놓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전하세요.”
홍대민은 한진영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고는 크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렇군요.”
무릎을 친 홍대민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차라리 우리가 얼마나 들고 있는지 알려주는 편이 더 낫겠군요. 지금처럼 매수세가 살아있는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그렇죠. 우리 물량의 숫자를 보여주고 여기 뚫리면 너희들이 그렇게 원하는 상방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면 매도가 더 쉬워질 겁니다. 그리고 기재부를 비롯해 주변에 보여주기에도 더 좋고요. 우리는 최선을 다해 시장 안정을 도모했다고 말입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을 이해한 홍대민은 바로 지시를 내렸다.
한진영은 뒷짐을 지고 그동안 들고 있던 1억 달러 치의 CDS가 18배가 오른 18억 달러가 되어 돌아오는 모습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