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용기를 주는 일은 나쁜 게 아니다
수요일에 있었던 불상사로 인해 주말 집회에 관해 사람들의 걱정이 크게 번졌다.
그리고 걱정이 사실이 되고 말았다.
집회가 열리기 전에 충돌이 일어나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이 뒤엉키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집회는 파행으로 이어졌다.
집회를 열기도 전에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 나오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말았다.
모두 중상이 아닌 가벼운 찰과상에 가까운 경상을 입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다쳤다는 사실에 집회 참석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으며 경찰은 그런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다.
집회 참석자와 경찰은 일촉즉발의 순간 속에서 서로 마주하고 섰다.
여기서 누구라도 한 명이 불을 당긴다면 그대로 양측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 것처럼 분위기는 험악해진 상태였다.
물대포를 비롯하여 그동안 집회에서 보이지 않던 최루탄까지 경찰들이 준비해놓았다는 소문이 집회자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디서 난 것인지 집회자들 손에는 하나둘 죽창이 들리기 시작했다.
평화 집회를 주장하던 주최 측은 이런 모습에 기겁하고 말았다.
주최 측은 6시 집회를 예고한 시간에서 2시간 남짓 남았을 무렵 급히 집회를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든 불상사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주최 측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주최 측은 우선 다음 주로 집회를 연기했다며 모이는 사람들을 해산하게 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이들에게도 연락하여 이번 주의 집회를 취소하도록 유도하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자발적으로 모이는 집회까지 주최 측이 어쩌지는 못하지만, 대국민 집회라는 타이틀로 경찰과 대치를 넘어 충돌하는 경우만큼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최 측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최 측의 생각과 달리 충돌을 원하는 곳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시위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런 이벤트를 그냥 보고 넘어가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죽창을 비롯한 무기로 변할 것들도 그들이 만들었다.
쇠 파이프를 숨겨 왔으며 화염병조차 준비한 것이 이번 집회를 단단히 이용하여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려 마음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시위는 놀이였고, 스트레스를 푸는 창구였으며, 돈을 버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집회와 같이 명분과 규모가 시위자들에게 쏠려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마음먹고 이번 집회에서 날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주최 측에서도 시위꾼을 비롯하여 폭력을 행사하려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대치 상황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이상한 행동을 펼치려 하면 즉각적으로 경찰과 충돌 전에 제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인지 대치 속에서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주최 측은 앞에서는 경찰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뒤로 사람들의 해산을 독려하여 오늘 있을 집회를 다음으로 미뤘다.
그렇게 밤새 이어진 대치로 인해 집회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집회 주최 측은 집회 전에 벌어진 사고가 시위꾼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 아니냐는 의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런 주최 측의 걱정이 괜한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장면이 외신 기자의 카메라에 담겼다.
시위꾼들이 서로 무기를 주고받으며 경찰을 먼저 공격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긴 것이었다.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바뀌었다.
아이들과 함께 찾아와 세상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랐던 부모들은 부끄러운 모습에 아이들과 함께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건 폭력은 안 된다며 시위에 폭력이 더해지는 순간 역풍이 불지도 모른다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방적으로 흘러가던 분위기가 이상하게 바뀌어 간 것이었다.
집회가 취소되자 각 방송사는 집회 취소 이후의 상황에 대해 준비하기 바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준비했고 그런 전문가 중에서 유독 방송사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최석영은 KBC 방송국이 마련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송 3사가 세이지증권의 최석영을 섭외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여 KBC 방송국이 승리한 것이었다.
“최 이사님 표정이 장난이 아닌데? 오늘은 무슨 컨셉이라냐?”
“그러는 너는 컨셉이 뭐냐?”
한진영은 꽁꽁 싸맨 아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이성우를 바라보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시선을 따라 아이를 내려다보고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율이 엄마가 피곤하다고 애기 데리고 가라고 해서 어쩔 수가 있어야지. 아직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은 애를 데리고 밖에 나갈 수도 없고…….”
“여기는 밖 아니야?”
“밖 아니지. 엘리베이터 타고 움직이면 되는 곳인데 밖에 나왔다고 볼 수 없잖아. 그래서 왔다. 그리고 겸사겸사 최 이사님 방송도 같이 보면 좋고…….”
이성우는 아이가 깰까 봐 걱정되는 모습으로 자그마하게 말했다.
“우유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잠이 푹 들었을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주머니는? 너희 보모 안 써?”
“쓰는데 며칠 뒤에 오신대. 지지난 정권에서 외교부 장관 하셨던 분 알지? 그분 외손녀 봐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아주머니가 잘한다고 소문이 났거든.”
“그래서? 아주머니가 올 때까지는 네가 보고?”
“어쩌겠냐? 그렇다고 어머니한테 봐달라고 할 수도 없고…… 장모님은 더더욱 힘들고…….”
재벌 가의 안주인들답게 다들 집안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아이 아빠인 자기가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한 이성우였다.
그리고 그런 이성우의 생각에 한진영도 동의했다.
“그래. 네가 낫겠지. 그런데…… 그 일에 왜 나도 동참해야 하는 거냐?”
“으아앙~”
“어이쿠. 우리 공주님. 시끄러웠어요? 미안해요. 삼촌이 조금 시끄럽네요.”
아이가 울자 단숨에 끌어안은 이성우는 어깨에 고개를 얹히고 일어선 채로 주변을 서성였다.
그러자 아이는 다시 스르르 잠이 드는 모습을 보였다.
“목소리 좀 줄여.”
한진영은 자기 집에서 크게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기까지 100일도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온 이성우의 처지를 생각하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화면에서 벌어지고 있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더욱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하죠?
-그렇습니다. 언제라도 폭력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우려 섞인 시각으로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 바로 이런 해외의 시각이 바로 나타났는데요.
아나운서는 한쪽에 앉아있는 최석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세이지증권의 최석영 이사님께서 나오셨습니다. 최석영 이사님. 지금 상황이 어떤 상태죠?
질문을 받은 최석영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아나운서의 질문에 대답했다.
-환율과 주식, 채권 모두 안 좋은 상태입니다.
정확한 수치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저 안 좋다는 말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최석영의 모습에 아나운서가 다시 질문했다.
-어떻게 안 좋은 상황인지 혹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흐음…….
최석영은 잠시 짧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현직에서 움직이는 저희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채권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저희가 CDS를 내다 판 게 총 28억 달러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4조에 가까운 돈을 채권시장에 쏟아부었지만 CDS 프리미엄의 상승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최석영의 뜻밖의 대답에 아나운서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단순히 환율이 얼마이고 코스피 지수가 얼마인지 정도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세이지증권의 포지션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 놀라고 만 것이었다.
“야. 저런 거 막 이야기해도 돼?”
놀라기는 이성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채 한진영이 앉아있는 거실로 다가와 다급히 물어봤다.
한진영은 딸을 품에 안고 있는 이성우를 올려다보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애기 깬다. 왜 소리를 질러?”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그제야 딸이 생각났는지 조심스럽게 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빠가 큰소리를 쳤는지도 모른 채로 잠이 든 서율이를 확인한 이성우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진영을 향해 다시 물었다.
“저거 방송에서 다 말해도 돼?”
“말하라고 최 이사님 내보낸 거야.”
“저거…… 계획된 거야?”
“내가 계획 없이 움직인 적이 있었냐?”
“하긴 넌 그런 놈이지. 네가 계획 없이 움직일 리가 없지.”
이성우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율이의 머리를 받치고 살며시 다시 소파에 깔아놓은 포대기 위에 눕혔다.
그러는 사이에도 화면 속에서는 이야기가 계속됐다.
-그뿐이 아닙니다. 1,500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약 5조에 달하는 돈을 집행했습니다. 채권 매수에 2조에 가까운 돈을 집어넣어 채권시장에 안정을 꾀했습니다. 환시장에도 약 1조. 도합 3조에 가까운 돈을 집행하며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인데요.
아나운서는 고개를 돌려 경제학 관련 전문가로 초빙한 교수를 바라봤다.
교수는 아나운서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들었습니다. 세이지증권에서 시장의 안정을 위해 엄청난 돈을 부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이었군요.
아나운서는 교수의 확인까지 받자 놀란 표정으로 최석영을 향해 물었다.
-그렇게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해도 괜찮은 건가요?
-대한민국이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투자한 겁니다. 하지만 역부족인 듯합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시장은 어려움 속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최석영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이런 상황에 빠진 대한민국을 정말로 슬퍼하는 느낌이 진하게 전해져 올 정도였다.
한진영은 그런 최석영의 모습을 보고 만족해하며 딸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 이성우에게 물었다.
“어떠냐? 무슨 생각이 들어?”
“어떻기는? 진짜라면…… 애국자? 애국 기업? 뭐 그런 생각이 들지. 말이 4조지 4조를 지금 시점에 때려 붓는 놈이 어디 있어? 너 말고 말이야.”
“그렇지. 나밖에 없지. 그걸 알려주기 위해 최 이사님을 내보낸 거야.”
“그러니까 뭘 알려주려고?”
“애국 기업이라는 거. 우리는 돈을 좇지만 그래도 나라를 배신하지는 않는다.”
이성우가 딸의 가슴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걸 왜 알려주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성우의 표정을 바라보고 한진영은 웃었다.
“나는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하물며 지금처럼 생색을 내도 될만한 시점을 그냥 보고 넘어갈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
“네가 한 일은 나라를 위한 일은 아니었잖아.”
“포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르지.”
한진영은 허공에 마치 포장을 하는 모습을 취하며 이야기했다.
“내 의도는 그런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라를 위한 일이 됐다면 나라를 위해 일을 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건…….”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의도가 어찌 됐든 간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려움에 부딪히고 위기에 모두 시름 할 때 용기를 주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너는 돈을 벌고?”
“그렇지.”
한진영은 이성우에게 말 잘했다는 식으로 웃고는 TV를 바라봤다.
TV 속에 자리한 사람들도 이성우와는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세이지증권의 선택에 놀랐다는 표정으로 호들갑까지 떠는 것이 한진영의 의도가 톡톡히 통한 모습처럼 보였다.
이성우는 TV와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지금 포지션을 저렇게 공개했는데 만약 너희 포지션을 보고 덤벼드는 놈이 있으면 어떡해? 그리고 분위기와 다른 선택을 한 것을 두고 고객들이 뭐라고 하면?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
한진영은 이성우의 지적이 날카로웠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지션을 보고 우리를 잡아먹겠다고 덤비는 놈들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을 거야. 그리고 뭐라고 하는 고객도 당연히 있겠지.”
“그러니까 왜 공개했어? 아무리 수십억을 들여 광고하는 것 이상의 이미지를 저 방송을 통해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잃는 게 더 많을 수 있는데…….”
이성우의 걱정 어린 마음이 손을 통해 딸에게까지 전해진 건지 이성우의 딸이 자면서도 끙끙거렸다.
한진영은 작은 인형 같아 보이는 이서율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잃는 경우는 없어.”
“없다고?”
마치 오늘 해가 지면 내일 해가 뜬다는 듯이 당연하다는 말투로 이야기한 한진영이었다.
“우리는 포지션을 다 구축했으니 다른 이들에게 알려도 상관이 없어. 어차피 혼란은 여기서 마무리될 테니까.”
“혼란이 마무리된다고?”
이성우는 너무나 자신 있게 말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뭘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묻지도 못했다.
묻는다면 오히려 그런 것도 모르냐면서 혼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한진영과 이성우의 모습과 달리 TV 화면에서는 여전히 지금의 상황에 대한 불안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
불상사가 벌어지며 집회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져 가자 미국의 압박이 심하게 들어왔다.
그동안 말로만 질타하고 무역 관세를 비롯한 여러 조치를 취하겠다는 액션이 아닌 실제로 대한민국 정부에 엄중히 경고한 서신을 외교 채널을 통해 공식적으로 전달한 것이었다.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유럽의 여러 국가와 동아시아의 국가들까지 모두 한목소리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제 정세에서 왕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각국의 태도는 강경하기만 했다.
불안은 커져 더는 뒤로 물러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조지훈과 함께 특별 생방송이 잡힌 TV 화면을 바라봤다.
수많은 플래시 세례가 터지고 대통령실의 수석비서관을 맡은 인물이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안 실장이 아니네요?”
조지훈이 이상하다는 듯이 화면을 바라보고 말했다.
항상 이런 일에는 안혁규가 전면에 나서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안혁규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조지훈은 이상한 것을 느끼고 한진영을 바라보자 한진영이 웃으며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홍 본부장에게 전해. 시장에 이상한 움직임이 나오더라도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이상한 움직임이…… 네. 알겠습니다.”
이상한 움직임이 뭐냐고 물어보려던 조지훈은 우선 지시가 먼저라고 생각하여 알겠다고 대답하고 급히 연락을 넣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슬쩍 바라보고는 느긋한 모습으로 TV 화면을 계속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