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놀라운 이야기가 나온 기자회견
조지훈이 나간 뒤 화면에 나온 수석비서관은 오늘 있을 기자회견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오늘 있을 기자회견은 사인노스에 대한 사과 및 대책 방안에 대한 자리입니다.
생각 못 한 기자회견 자리에 기자들이 술렁였다.
그동안 쇠뿔처럼 단단하게 고집을 부리던 정부가 뜻밖의 스탠스를 취했기 때문이다.
-조금 뒤 기자회견에서는 플래시 세례를 조금만 줄여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한 부탁을 마친 수석비서관이 자리를 떠나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운 건가요?”
시작하기도 전부터 빨간 눈으로 등장한 대통령의 모습에 한진영의 지시를 전달하고 돌아온 조지훈이 놀란 듯이 말했다.
한진영은 그런 대통령의 모습을 확인하고 짧게 웃었다.
“끝났네.”
“네? 뭐가 끝났다는 말씀인가요?”
“오늘 내놓을 사과에 상황이 마무리된다는 뜻이야.”
한진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통령의 발표가 시작됐다.
조지훈은 한진영에게 더 묻고 싶었지만 우선 대통령의 발표를 듣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조용히 대통령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저의 잘못된 판단으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고통을 전해드린 점 백배사죄 드리겠습니다.
지난번과 달리 대통령은 기가 잔뜩 죽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고개 숙여 사과부터 건넸다.
대통령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플래시 세례가 터졌지만, 수석비서관의 부탁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메라는 대통령의 빨간 눈과 눈물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플래시를 터트렸고 대통령은 눈물을 훔치며 사진에 눈물이 확실히 담기도록 노력했다.
대통령은 목이 메어오는 목소리를 힘겹게 내뱉으며 거듭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과 기업 그리고 해외의 모든 사인노스를 통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향해 대통령은 사과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대통령의 모습에 보는 사람 마음이 짠해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한진영은 눈시울이 붉히는 조지훈을 올려다봤다.
“가슴이 찡하지?”
“죄송합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급히 눈가에 맺힌 듯한 눈물을 훔쳤다.
한진영 앞에서 조심스럽지 못하게 눈물을 보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모습에 오히려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조 실장에게 뭐라고 하려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진짜로 찡한 마음이 생기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조지훈은 한진영이 진심으로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우고는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제가 지지자도 아닌데 가슴이 찡한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나라의 지도자가 저렇게 화면에 나와 사과하는 게 맞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래. 내가 듣고 싶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었어.”
한진영은 잘 말해줬다는 듯이 무릎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쪽으로 걸어가 사탕을 하나 집어 들었다.
담배를 대신해주는 박하 맛 사탕을 입에 문 한진영은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말했다.
“그동안 국내외로 욕을 많이 먹던 대통령이 집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점점 고개를 드는 이 시점에 나와 사과했어. 게다가 비통하면서도 비참한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말이야. 이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할까요?”
조지훈의 말에 잘 말했다는 듯이 한진영이 손가락을 들어 조지훈을 가리켰다.
“그래. 그런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해. 사인노스 사태에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인노스에 투자하라고 대통령이 시킨 건 아니니까. 게다가 지금 대통령의 지지세가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집회에 폭력이 섞여 들어가기까지 하려 하니 슬슬 그만하자는 이야기에 힘이 실리겠지.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가 더해지면 그만하자는 목소리에 모두 동조할 거야.”
“한가지가 더해진다면 어떤 게…….”
조지훈이 어떤 게 있냐고 물으려 했지만 더는 묻지 못했다.
한진영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손가락을 들어 TV 화면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손가락을 따라 화면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눈에 가득 눈물을 담은 대통령이 다시 한번 크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는 중이었다.
기자들은 질문을 하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그러나 계속 기자회견을 진행하기 어려운 모습에 기자들은 질문하려던 것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런 그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사람이 등장하는 모습에 기자들은 서로 손을 들어 질문을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아아. 잠시만요.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에 모습을 드러냈던 수석비서관이 손을 들어 올려 몸까지 일으켜 세우려는 기자들을 진정시켰다.
-아직 발표가 다 끝난 게 아닙니다. 발표를 다 듣고 질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받지 않고 자리를 마무리한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발표 이후 질문을 받겠다는 말을 남겼다.
지난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수석비서관은 기자들을 한번 훑어본 후 가지고 나온 종이 속에 담겨있는 발표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현 시각을 기준으로 하여 대통령실과 내각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대통령실 비서실장인 안혁규 실장과 경제수석, 민정수석의 사표를 수리했습니다. 또한 법무부와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의 사표도 수리됐습니다. 외교부와 총리는 사표를 받아놓은 상태로 대통령께서 고심하신 뒤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경우에도 사퇴 의사를 구두로 전해왔으며 조만간 사표를 제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석비서관의 발표에 기자회견장이 삽시간에 고요해지고 말았다.
소폭의 내각 교체까지 이루어진다면 더 좋을 것으로 생각했던 기자들이었다.
그러나 소폭이 아니라 내각을 새로 짜는 수준의 발표에 기자들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타닥타닥.
노트북의 타자치는 소리가 고요한 기자회견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수석비서관은 타자 소리를 들으며 발표를 계속 이어갔다.
-대통령비서실의 경우 모든 비서관이 사표를 내놓은 상태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비서실의 전면적인 변화를 꾀하고 계십니다. 조만간 비서실에 관한 발표는 따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질문 있으신 분 계십니까?
일제히 기자들의 손이 올라갔다.
서로 질문을 던지려는 모습이 지난번과는 다른 모습의 기자회견이었다.
한진영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TV를 껐다.
“한 가지만 더해지면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까지 나왔으니 게임은 끝났네.”
한진영은 여전히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조지훈을 바라보고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놀랍죠.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대통령이…… 혹시 저걸 준비하느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건가요?”
조지훈이 한진영이라면 알지 않을까 하여 물어봤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질문을 받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어디까지 정리하고 어느 선을 잘라내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좀 늦었겠지. 나머지 시간은 대통령 연기 지도하느라 시간도 썼을 테고…….”
“연기요?”
“조금 전 봤잖아. 그게 연기가 아니면 뭐겠어? 설마 그게 진짜라고 생각한 거야?”
“진짜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조지훈은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한진영을 바라봤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것에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말했다.
“대통령은 그 정도로 세심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그 정도로 생각이 깊지도 못하고…… 오늘 나올 드라마가 더 중요한 사람인데 사인노스 때문에 나라가 어렵고 어떻고를 생각할 것 같아? 그냥 시키는 대로 읽고, 시키는 대로 표정을 지으며 앞에 나선 것뿐이지.”
“시키는 사람이…… 누군데요? 설마…… 안 실장?”
“하하하. 안 실장?”
한진영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밖에 보이는 건 안 실장이 조종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 뭐든지 대통령보다 안 실장이 먼저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고 지시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안 실장은 아니야. 안 실장이 어디 출신이었는지 벌써 잊었어?”
“운전기사요?”
“그래. 운전기사. 그런 그가 모든 것을 총괄하고 지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안 실장 뒤에 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그러니까 안 실장을 정리했지. 안 실장이 스스로 목을 잘랐겠어? 안 실장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그리고 안 실장하고 연결된 라인도 싹 다 정리한 데다 동우도 겸사겸사 정리할 정도라면 안 실장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지.”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조금 전 기자회견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 실장을 비롯한 내각과 심지어 동우마저 정리할 정도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란 것이었다.
“사장님. 그게…….”
“나가자.”
“네?”
“나가서 확인해야지. 놀랄만한 발표가 나왔으니 거기에 대한 시장이 반응하지 않겠어? 그걸 직접 내 눈으로 봐야겠으니 어서 가자.”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궁금증을 이번에도 가슴에 품은 채 한진영이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다.
***
밖에 나오자마자 한진영의 귀로 환호에 가까운 음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 들려왔다.
“채권 거래가격이 1달러를 넘겼습니다. 단숨에 30% 가까이 상승했습니다.”
“CDS는 300bp까지 빠져 내려왔습니다. CDS 물량이 무지막지하게 출회되고 있습니다.”
“환율도 10원 넘게 하락했습니다. 달러 매도 포지션이 강력하게 잡혀 나갑니다.”
“코스닥 상방 사이드카 걸렸습니다. 코스피도 3% 넘게 상승 중입니다.”
한진영은 즐거운 노랫소리를 듣는 것처럼 흥얼거리며 홍대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사장님.”
“왜 그렇게 저를 끈적하게 보십니까?”
“사장님. 대단하십니다.”
홍대민은 크게 감동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시선이 싫지 않은 듯이 웃으며 다가가 홍대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선은 정리하셔야죠?”
“정리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조 실장에게 지시를 전달받고 그대로 모든 것을 멈춰놓은 상황입니다. 여기서 턴이 나왔으니 물량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아예 버튼을 뽑아버린 상황입니다.”
“하하하. 버튼을 뽑았다고요?”
한진영은 홍대민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현황판을 바라봤다.
“대통령의 발표가 충격적이기는 했나 봅니다.”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고개를 돌려 현황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그동안 시장을 괴롭히던 것들이 모두 한 번에 완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채권과 주식이 시장 회복에 앞장선 모습입니다. 환율은 지지부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에 10원이 빠지며 고점 인식을 만들어 놓은 상태이니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홍대민은 잠시 시장에 대한 브리핑을 마친 후 한진영을 슬쩍 바라보고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통령실과 어떤…… 이야기가 오간 게 있었던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순전히 사장님의 분석으로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하하하. 홍 본부장님도 그 자리에 계셔서 아시겠지만, 저의 분석이라기보다는 전략실의 분석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아닙니다.”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이 강하게 부정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어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의 분석에 맞춰 전략실이 움직였다는 편이 맞습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한진영은 웃기만 할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굳이 지금 상황에서 맞는다는 말도 틀린다는 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한진영을 보며 자기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판단은 누구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판단이었습니다.”
홍대민은 감동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오늘의 발표는 시장 참여자들은 물론이고 정치권과 해외에서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까지야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요구했던 일인만큼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곳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사람들이 정리되는 것까지도 예상 범위 내에 있었던 일이었기에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그것도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규모로 정리가 되는 것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시장이 이렇게 환호를 보였던 것이었다.
문제가 됐던 것들을 단숨에 처리하며 신뢰를 쌓으려 노력하는 모습에 시장 참여자들은 그동안 외면했던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다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장이 과도하게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폄하했었다며 그동안 내놓기만 하던 물량들을 거둬들였다.
채권은 안정됐으며 환율은 떨어져 내렸다.
주식은 세일기간에 돌입해 있는 중이라며 외국인들이 대량으로 물량을 쓸어 담아 댔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산 이야기가 나오던 시장이 단숨에 돌아서 버린 것이었다.
이런 상황의 연출이 된 이유는 누가 뭐라던 오늘 있었던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기자회견과 그에 이어진 강한 대책으로 시장이 대한민국의 안정을 예상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발표가 나오기 전에 강하게 매집을 지시했던 한진영의 세이지증권은 엄청난 이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수천억은 물론이고 극한으로까지 수익을 가지고 간다면 CDS로 올린 수익만큼을 또다시 올릴 수 있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세이지증권은 이번 일로 약 10조에 가까운 이익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사장님.”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홍대민과 그저 웃기만 하는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조지훈이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한진영의 귀에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웃던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언제? 지금?”
“네. 지금 바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한진영의 표정은 사무실을 나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