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회사는 좋지만, CEO가 별로다
한진영은 노아 스미스의 놀랄만한 제안을 들었으면서도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곁에 있는 이성우가 한진영을 대신하여 놀란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죽을 맛이겠지.’
한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자기를 보며 점점 표정이 어두워져 가는 노아 스미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생각했다.
테라에서 조지훈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을 때 한진영은 이런 대화가 오갈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지난 경험을 통해 지금쯤 테라에 대한 공매도가 노아 스미스에게 굉장한 압박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뉴욕에 온 것을 테라 측에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며 확신을 가졌다.
‘테라에는 의지할 존재가 나밖에 없다.’
한진영은 만족한 표정을 가슴속에 숨긴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개매수. 어려운 제안을 하시네요.”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한진영이 입을 연 것을 확인한 노아 스미스가 반가운 마음에 빠르게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많이 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세이지 증권이 테라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테라의 뒤를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보여주어 공매도의 기세를 꺾어보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겁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상대의 기세를 꺾는 것입니다.”
테라의 노아 스미스는 한진영이 자기 이야기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만족감에 미소를 짓고 있는 노아 스미스를 바라보고 같이 웃었다.
노아 스미스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똑똑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 손안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진영 앞에 와서 부탁하고 한진영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진영은 공매도가 아니면 그가 이곳에 오는 것은 물론이고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진영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심한 압박을 받는 노아 스미스를 바라보고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보고 전 세계 금융 회사들과 맞서 싸우라는 말씀이신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노아 스미스는 예상치 못한 한진영의 대답에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에게 개인적으로도 투자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그 돈을 다 날릴 생각이십니까?”
“저는 테라에만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제 회사인 세이지증권도 테라의 생존에 따라 회사 운명이 갈릴 정도로 허약한 상태도 아니고요. 테라의 투자 실패는 수많은 투자 실패 중에 하나로 기록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 금융회사와 맞선다면 회사 역사도 그것으로 끝이 날 테니 저는 다른 선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의 한진영이었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에 들어갔다.
‘만약 테라가 망한다면?’
한진영의 조언으로 니켈 광산 매입을 계속 늘려갔던 기풍그룹이었다.
니켈 외에도 망간과 철광석과 같은 종류의 것들도 늘리기는 했지만 어쨌건 최우선으로 늘린 것은 니켈이었다.
그래서 한진영이 말한 전 세계 니켈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괜한 말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니켈의 최대 수요처인 이차 전지 산업이 휘청인다면 기풍은 어떻게 될지 이성우는 계산한 것이었다.
‘우리도 위험한데?’
망하지 않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니켈을 비롯한 비철금속의 비중을 늘리기는 했지만 어쨌건 기풍의 주요 사업은 철강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철광석을 확보하기 위해 철광석 광산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비철금속 광산을 늘린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니켈이 망한다고 하더라도 그룹이 망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망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휘청이기는 할 게 분명했다.
그만큼 지금 기풍그룹은 비철금속 그중에서도 니켈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계산을 끝내자 초조한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면 기풍그룹으로서도 큰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조지훈의 심리 변화를 한진영은 예상한 것인지 탁자 밑에서 이성우의 무릎을 살며시 한진영이 잡아갔다.
불안한 마음에 저절로 떨려오는 다리를 잡아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한진영의 손길이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손길에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마음이 조금은 차분히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고 무릎에 댔던 손을 놓고 노아 스미스에게 말했다.
“주식시장에서 공매도가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인 줄 아십니까?”
“공매도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공매도 세력이 가장 원하는 것. 그건 바로 자기네들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한번 막아보겠다고 들어오는 피라미들을 좋아합니다.”
“제가 피라미라는 뜻입니까?”
노아 스미스는 문맥의 내용보다 자기를 향해 피라미라고 이야기한 것에 화가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노아 스미스를 바라보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계속 이야기했다.
“공매도라는 게 적당한 수준에서 매도가 체결되어야 이루어지는 일인데 막아보겠다고 나서니 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이기지도 못할 놈들이 내 물량을 다 받아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제가 그들보다 못하다는 말씀입니까?”
점점 올라가는 노아 스미스의 목소리에도 한진영은 눈썹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그럼 공매도 치는 놈들에 비해 더 거물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본인 스스로요?”
“나는…… 그들보다 못한 것이 없습니다.”
“뭐가 그렇게 나아서 그러시는 겁니까? 그들보다 돈이 많습니까?”
“돈이 많지는 않지만, 그들도 무시하지 못할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이 있으면 뭐 합니까? 사람들이 사주지도 않으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만들고 있는 전기차에 관련된 기술은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본 틀은 수십 년 전에 먼저 세상에 공개된 기술 아닙니까?”
노아 스미스는 한진영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한진영의 말대로 전기차와 관련된 기술은 새로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시스템적인 것을 새로 만들었겠지만 이미 기본적인 개념 자체는 기존 회사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 아닙니까?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에 말입니다.”
노아 스미스는 화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한진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진영과 노아 스미스가 날 선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음식이 왔나 보군요. 음식이 오기 전에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아쉽습니다. 우선 음식부터 먹을까요? 고기는 식으면 질겨지니 말입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조지훈에게 손가락으로 지시했다.
***
이성우는 가슴을 두드리며 조지훈을 향해 말했다.
“지훈아. 여기 혹시 소화제 있냐?”
“속 안 좋으세요?”
걱정되는 듯이 물어보는 조지훈을 이성우는 신기한 동물 바라보듯이 쳐다봤다.
“너는 그 상황에서도 밥 잘 먹더라. 그게 입에 들어가?”
“그럼요. 저는 맛있게 잘 먹었는걸요. 맛이 별로셨어요?”
“맛이 문제가 아니잖아. 분위기가 살벌했잖아.”
“그랬나요?”
조지훈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월패드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월패드를 통해 로비에 연락하여 비상약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약 가지고 올 거예요. 그전까지 이거라도 드세요.”
조지훈은 가지고 온 탄산음료를 이성우에게 내밀었다.
이성우는 탄산음료를 따서 단숨에 들이키고는 시원하게 트림을 토해냈다.
“꺼억~”
“으~ 더러워. 너 집에서도 이러냐?”
한진영이 냄새라도 날까 봐 코를 잡고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이성우는 타박하는 한진영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차례 더 음료수를 들이켠 뒤 소리쳤다.
“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꺼억~”
“트림 다 하고 말해. 더럽게 중간에 말하지 말고.”
이성우의 더러운 행동에 한진영이 화를 내는 말투로 말하자 이성우가 오히려 한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화는 네가 아니라 내가 내야 할 판이다. 밥 먹으면서 그런 말 할 거면 나 부르지 마. 가뜩이나 시차 적응 때문에 피곤한데 소화 안 되게 뭐 그런 이야기를…… 꺼억~”
“아 새끼. 진짜 더러워서 같이 못 있겠네.”
한진영은 짜증 섞인 투로 이성우의 곁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이성우는 그러고도 몇 차례나 더 트림을 내뱉고 나서야 트림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약을 받아서 온 조지훈에게 물과 약을 건네받고 먹고 난 뒤에야 조금 살겠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됐다.
“우와~ 죽는 줄 알았다.”
“나는 너 때문에 죽겠다. 죽겠어.”
여전히 코를 붙잡고 있는 한진영이었다.
이성우는 속이 좀 내려간 느낌을 받자 한진영을 향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야. 테라하고 관계 끊을 거면 미리 이야기라도 해줘. 이렇게 갑자기 이러니까 내가 체하지.”
“누가 테라하고 관계를 끊는데?”
“그럼 그게 관계를 끊는 거지 계속하겠다는 거야?”
이성우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리키고는 계속 이야기했다.
“밥 먹으면서 뭐 했어? 한마디도 안 나눴잖아.”
“안 나누긴 뭘 안 나눠? 이야기 잘했잖아.”
“그게 무슨 이야기 잘한 거야? 기껏 한다는 이야기는 뉴욕에 갈 곳이 어디가 있냐 느니 어디가 좋냐 느니…… 아니. 클럽은 왜 물어봐? 너 클럽 가려고?”
“난 갈 건데 너는 안 갈 거냐? 뉴욕 클럽. 궁금하지 않아?”
한진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성우에게 묻자 이성우는 잠시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손바닥을 들어 한진영에게 내밀었다.
“그래. 클럽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한진영은 클럽 이야기에 잠시 주춤하는 이성우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다시 올 거야.”
“다시 온다고? 그러고 돌아갔는데?”
“그래. 이대로 저 사람이 다른 곳에서 나를 대신할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한진영은 느긋한 표정으로 노아 스미스가 떠난 문을 바라보고 말했다.
“지금 테라는 사면초가인 상태야. 업계에서는 공상에 불과하다며 코웃음을 치는 상황이지.”
“그래? 내가 보기엔 꽤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고개를 돌렸다.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곳들도 시작했겠지. 우리나라의 미래차는 물론이고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독일 3사나 미국, 일본 메이커 같은 곳들이 먼저 시작했을 거야.”
“그럼 전기차라는 게 그만큼 별로라는 뜻인가?”
“아니. 그렇지 않아.”
“네 말대로라면 괜찮았다면 독일 등이 먼저 했을 거 아니야?”
“내 말을 잘 들어야지. 괜찮다고 ‘생각했다면’이라고 말했어.”
“어? 무슨 차이가 있는데?”
이성우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한진영이 조금 더 이성우 쪽으로 다가와 앉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전기차는 분명 좋은 아이디어야. 플랫폼만 잘 구성해 놓는다면 그 위에 외관만 덮어씌워 여러 종류를 내놓을 수 있는 만큼 제조사 입장에서도 엄청난 이득이 되는 사업이니까.”
한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가락을 튕기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무슨 생각을 할 때 이런 표정을 짓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을 발견했을 때 늘 한진영이 짓던 표정이었다.
한진영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로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기존 자동차 업체들은 전기차로의 시장 변화에 동의하지 않고 있어. 지금까지 기름으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잘 이어왔던 시장이 단번에 전기차 시장으로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지. 그리고 그렇게 되더라도 따라갈 자신이 있어서 전기차 시장을 등한시 하고 있는 거야. 어차피 큰 기술이 필요하고 엄청난 설비투자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술에 이미 깔려있는 생산라인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기존 업체들이 테라를 무시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정확히 맞췄어.”
한진영은 손가락을 들어 이성우를 가리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존 업체들이 무시하고 있어. 그리고 그렇게 무시를 받으니 시장에서는 테라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보다 더 못한 평가를 받는 게 사실이야. 그래서 공매도를 치고 있는 거고…… 어쨌든 테라는 적자기업이니까.”
“그럼 이대로 진짜 망하는 거 아니냐?”
“망해?”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의 입꼬리가 더욱 높이 올라갔다.
“천만에. 오히려 몇 년 뒤면 너도나도 전기차를 만들겠다고 날뛰게 될 거다. 그때 테라는 이미 저만치 뛰어나간 상태가 돼서 따라잡기 어렵게 되어 있을 거야.”
“그래?”
이성우는 테라의 미래가 밝다는 말에 니켈 광산을 매입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드는 것이 있었다.
“야. 그럼 아까 말한 대로 노아 스미스 제안을 받아들이지. 뭐 하러 그렇게 보냈냐?”
“테라는 밝아. 그런데 노아 스미스는…… 밝지 않아.”
“에?”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테라는 괜찮은 데 CEO인 노아 스미스는 별로라는 이야기야?”
“어. 많이 별로야. 관종력이 너무 높아.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걸 너무 좋아해. 그리고 자존심도 강해서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손안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한진영은 말을 하면 할수록 별로라고 느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이번 일 같은 게 있지 않았다면 우리한테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았을 사람이야.”
“그래? 그 정도야?”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이지증권과 내 지분만으로 경영에 관한 노선을 틀 수 있는 수준이건만 지금까지 연락 한번 하지 않았어. 그러다 어려움에 처하자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나를 보겠다고 뉴욕까지 날아온 거지. 그런데 그냥 돌아갈 것 같아? 다시 와. 다시 와서 다시 부탁할 거야.”
“그러면 다시 올 걸 알고 오늘 그런 거야?”
“그래. 기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으니까.”
한진영의 찌푸렸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그리고 다시 돈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야 더 많은 걸 얻어낼 수가 있거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줄 존재가 나밖에 없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한진영은 말을 하고 벌써 해가 져 어둑해진 뉴욕을 바라보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