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고전이 사랑받는 이유
블랙문은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사였다.
블랙문이 직접 움직이는 자산의 규모만 3조 달러가 넘을 정도였으며 간접적으로 투자자문을 해주는 기업만 3,000여 곳이 넘을 정도였다.
전 세계에 지사가 존재했으며 블랙문의 코멘트 한 방에 기업과 산업이 출렁일 정도로 그들이 가진 권력은 막강했다.
그런 곳에서 한진영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간단하게 세계 경제 흐름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초대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실제로 그들이 나누고 싶다는 이야기는 다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한진영이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수행원도 없이 가신다는 것은…… 지금이라도 비서실 직원을 불러올까요?”
나창운이 한진영을 수행하면 가장 어울리는 일이지만 나창운은 테라와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어제 비행기로 캘리포니아로 떠난 상태였다.
아무리 같은 미국에 있다고 하더라도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를 불러 한진영을 수행하게 하고 다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 차라리 대한민국에 있는 비서진을 데리고 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조지훈이었다.
조지훈이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진영은 가볍게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내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한국으로 가는 자네를 막았겠지. 하지만 지금 자리는 중요한 자리가 아니야. 오히려 자네가 가는 한국이 더 중요한 일이니까 내 걱정은 말고 잘 다녀오도록 해.”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그리고 조 실장이 없는 편이 일하기 더 편해.”
조지훈은 한진영이 자기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살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나 혼자 있어야 저쪽이 더 마음 놓고 행동해. 나는 그 편이 일하기 더 편하니까 마음 편히 다녀와도 돼.”
한진영이 조지훈이 없어야 일하기 편하다고 말하자 그제야 조금은 안심이 된 조지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어깨를 다시 한번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한진영이 의도했고 조지훈이 없는 것이 일하기 더 편하다고 하여 자리의 중요성 또한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창운이 캘리포니아에서 진행하고 있는 협상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블랙문과 한진영 사이에서 오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결과에 따라 협상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창운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한진영이 이야기하는 자리가 테라의 유증 협상에 더 중요한 자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한진영이 괜찮다고 이야기 한 것은 괜한 허풍이 아니었다.
바로 한진영은 블랙문과의 대화에서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가벼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거실로 향해 TV를 켰다.
미국 입장에서 변방에 불과한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TV를 통해 나오는 중이었다.
***
긴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한 조지훈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기를 마중 나올 세이지증권 비서실의 직원들을 대신하여 수십 명은 될 듯한 기자들이 게이트 문을 열고 나오는 조지훈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이지증권의 한진영 사장님을 수행하시는 분이신가요? 한진영 사장님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
“오늘 비행기로 같이 들어오는 게 아니었습니까?”
“한진영 사장님은 언제까지 해외에 체류할 계획이시라고 하십니까?”
“말씀 좀 해주십시오. 한진영 사장님은 지금 상황에 이야기할 계획이 없으신 겁니까?”
조지훈은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터지는 플래시 세례와 질문 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도대체 무얼 이야기하는지 정신이 몽롱한 조지훈은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실장님.”
플래시 세례에 눈이 부셔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조지훈을 누군가가 불렀다.
그리고 조지훈의 손에 들려있는 캐리어를 건네받으려는 손짓에 조지훈은 그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차 비서.”
“실장님. 앞에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조지훈과 차 비서가 짧은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도 질문은 계속 나왔다.
조지훈은 반가운 마음에 차 비서와 인사를 나눈 뒤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사람들은 다 뭐야?”
“실장님. 우선 차로 가시죠.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지훈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캐리어를 건네줬다.
그리고 차로 가는 도중에 비서실 직원 몇몇이 더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서실 직원들은 조지훈에게 인사하고는 주변을 막아 기자들이 조지훈에게 달려드는 것을 막았다.
조지훈은 슈퍼스타의 내한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왜 자기의 입국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는 배우도 아니고 가수도 아니었으며 유명 인사도 아니었다.
그런 자기를 향해 사진을 찍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기만 한 조지훈이었다.
입구에 준비된 차에 올라타자 그 광경조차 사진에 담으려고 기자들이 열성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조지훈은 그런 기자들을 뚫고 겨우 차에 몸을 싫은 뒤 창문 밖을 바라봤다.
까맣게 썬팅되어 안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기자들은 창문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지훈은 그런 기자들을 바라보고 자기 뒤를 이어 차에 올라탄 비서를 향해 물었다.
“왜 저러는지 알아?”
“실장님. 모르셨습니까?”
“어?”
이유를 물었는데 몰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지훈은 함께 뒷자리에 올라탄 차 비서를 돌아보고 다시 물었다.
“몰랐냐니? 내가 뭘 몰라?”
“실장님께서도 유명 인사세요. 여기 대한민국에서는요.”
“내가? 내가 왜 유명 인사야?”
영문을 모르게는 조지훈이 손가락을 가슴으로 가리키고 물었다.
차 비서는 그런 조지훈을 향해 잠시 손을 들어 올려 양해를 구했다.
“실장님. 잠시만요. 우선은 차부터 이동하고 말씀드릴게요.”
조지훈은 차 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여기 계속 서 있다가는 기자들이 차 문을 열고 마이크를 들이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분위기가 고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차 비서는 운전을 맡은 동료에게 갈 곳을 알렸다.
“동부호텔로 가도록 해.”
“동부호텔?”
목적지에 조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동부호텔로 가? 난 바로 집으로 가고 싶은데? 가는 차 안에서 왜 이런 건지 이유나 말해줘.”
“아니요. 실장님 자택으로는 못 가세요.”
“내 집으로는 못 간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실장님이 귀국한다는 소식에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거든요. 집으로 가시면 지금 보신 장면보다 더 대단한 걸 보실 수도 있어요.”
조지훈은 기자들이 집에까지 진을 쳤다는 이야기에 어이없어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데 그래? 차 출발했으니까 말 좀 해봐. 뭔데 그래?”
차 비서는 조지훈의 말에 자세를 틀어 조지훈 쪽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이 모든 게 사장님을 찾으려는 기자들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장님? 사장님을 기자들이 왜 찾아? 사장님은 미국 건너가 있으셔서 사고 칠만한 일도 없었을 텐데……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막아야지 왜 보고도하지 않고 있었어?”
조지훈이 차 비서를 향해 질타하고는 한진영과 관련된 스캔들이 무엇이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차 비서는 조지훈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지금 상황이 왜 일어난 것인지 설명했다.
“사장님의 스캔들 때문이 아니라 국정감사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국정감사? 무슨 국정감사?”
“대통령과 민정수석에 관한 국정감사요.”
한진영이 미국에 나가 있는 사이 이야기는 점점 더 커져 결국 곪은 게 터지고 말았다.
한진영이 문서영에게 주목하라고 했던 민정수석 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지훈은 국정감사와 한진영이 무슨 상관인지 여전히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차 비서를 향해 물었다.
“그건 대통령 문제고 사장님하고 국정감사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
“국회의원들이 사장님을 증인으로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해서요.”
“사장님을 증인으로? 무슨 증인?”
“정부에 압박받아 유배가 있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거죠.”
“하하.”
조지훈은 차 비서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차 비서는 조지훈이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계속 이야기했다.
“지금 국내에서는 한 사장님이 억울하게 현 정부에서 찍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 사장님이 경제수석에 거론됐을 때 민정수석 같은 사람들이 사장님을 쫓아내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경제가 더 잘 돌아가지 않았겠냐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서 더욱 사장님을 찾고 있어요.”
“나와서 억울하게 당한 일을 제대로 증언해주고 국내에서 활동해달라는 거야?”
“네. 그런 이야기죠. 그런데 사장님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얼굴이 보이지 않자 답답해하는 눈치였어요.”
“그런데 마침 내가 국내로 귀국했으니 나를 통해 사장님 찾겠다는 거고?”
“네.”
조지훈은 고개를 흔들고는 웃었다.
차 비서는 그런 조지훈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차 비서.”
“네?”
조지훈은 고개를 들어 차 비서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시계를 차 비서에게 보여줬다.
차 비서는 조지훈의 손목에 메어있는 시계를 요리조리 살폈다.
“시계 사셨어요? 이거 엄청 좋은 시계잖아요. 저도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사려고 마음먹은 브랜드인데…….”
“좋아 보여?”
“그럼요. 좋아 보일 뿐이겠어요?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는 워너비인 제품이잖아요.”
“나도 처음 내 손목에 이 시계가 채워졌을 때 기분이 좋았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조지훈은 손을 털어 시계를 손목에서 헐겁게 만들고 차 비서에게 말했다.
“나중에 사장님이 뭔 선물을 주잖아. 그럼 의심부터 하도록 해. 고마워하다가는 나처럼 된다.”
조지훈은 자기가 건넨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차 비서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이 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급히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
“방문자가 있습니다. 블랙문 자산운용에서 왔다고 합니다.”
월패드 앞에 선 한진영은 로비에서 온 연락을 듣고 옷을 한번 털었다.
그리고 월패드를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려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세요.”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한진영은 들어왔던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살피고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큰일 났다. 이제는 조 실장 없으면 옷도 못 찾아 입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이를 어쩌냐? 어휴. 완전 바보 다 됐어.”
한진영은 홀로 옷을 찾아 입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린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로비에 도착하자 경비업체 직원들이 한진영에게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어줬다.
“한진영 세이지증권 사장님 되십니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한진영을 살피고는 질문했다.
“네. 제가 세이지증권의 한진영입니다.”
“타시죠.”
남자가 타라고 한 차는 생각보다 ‘많이’ 작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준중형에 가까운 차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택시가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질 정도의 크기였다.
남자는 한진영을 위해 앞에 놓인 차의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을 권했다.
한진영은 잠시 차를 내려보다 주저 없이 올라탔다.
남자는 한진영이 차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 차 문을 닫은 뒤 대기하고 있던 기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차로 이동하여 그곳에 몸을 실었다.
기사까지 차에 올라타자 차는 한진영을 태운 채로 블랙문 자산운용의 본사가 위치한 곳으로 움직였다.
10여 분을 달린 차는 블랙문 자산운용의 본사에 도착하게 됐다.
한진영은 도착했음에도 정문이 아니라 주차장을 향해 내려가는 차를 보고 가만히 실소를 내뱉었다.
보통은 정문에 차가 서면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나와 손님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데리러 온 사람이 약속 장소까지 안내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였다.
그건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바로 이곳 미국에서도 통상적으로 상대를 초대했을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차는 지하로 내려갔고, 자기를 데리러 온 사람이 탄 차는 뒤를 따르지 않은 것이 확인됐다.
“다 왔습니다.”
차를 주차까지 한 기사는 한진영이 앉아있는 뒷자리를 향해 말하고는 먼저 운전석에서 내렸다.
“이럴 거면 주소 주고 택시 타고 오라고 할 것이지. 이게 뭐야?”
한진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고는 조심스럽게 옆 차가 다치지 않도록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좁은 공간에 몸을 뒤틀어 내렸다.
쿵.
한진영이 차에서 내려 차 문을 닫자 기사가 지하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기서 12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 혼자 말입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기사가 오히려 이상한 듯이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럼 누구랑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안내해주는 사람도 없는 겁니까?”
“저는 그냥 운전해서 회사로 모시고 오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기사는 무심하게 인사하고는 주차장에 있는 고급 승용차의 문을 열었다.
한진영은 그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화를 냈겠어.”
알고 있었으면서도 기분이 나쁜데 모르는 채로 당했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는 생각이 들만한 상황이었다.
너무나 유치하고 너무나 오래된 방법이었다.
상대를 도발하여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잡기 위한 방법으로 오랜 세월 많은 곳에서 애용했던 도발법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에게는 먹히지 않는 방법이었다.
이미 지난 시절 한번 겪어봤었기 때문이다.
“역시 고전이 사랑받는 이유가 있어. 한번 당했는데도 기분이 나쁜 건 여전하네.”
한진영은 낮게 혼잣말을 내뱉고 기사가 가리킨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