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그동안 잘 놀았으니 돈 벌러 가자
CNBC는 섭외 요청이 쇄도하는 지금 자기 방송사를 선택해준 것에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저 양반은 실제하고 화면으로 볼 때하고 차이가 너무 심해.”
한진영은 벽에 테니스공을 한 번 튀기고 의자에 앉았다.
인터뷰가 최소 30분 이상 진행될 테니 앉아서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진영의 말대로 최석영은 평소에 보여주지 않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CNBC의 질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해나갔다.
정치 문제에 관해서는 교묘한 언변으로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흘려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려 했다면 이곳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방송에 나왔을 거라는 말로 더는 정치 관련 이야기를 하지 말기를 부탁했다.
한진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절대 정치적인 보복에 의한 도피나 유배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살짝 뉘앙스를 남겨 놓는 것으로 듣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는 남겨 놓기도 했다.
“하여튼 잘해.”
한진영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조지훈을 통해 주문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상상했던 그림보다 120% 잘해주는 최석영의 모습에 한진영은 만족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 한 바퀴 돌고 난 뒤 본격적인 본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테라에 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 테라.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기 위해 저를 부르셨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 이야기가 오늘 자리의 중심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인터뷰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최석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바로 직진하여 질문을 던졌다.
-테라의 유증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네. 유증 참여를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인 것은 맞습니다.
인터뷰어가 질문을 직진으로 던졌듯이 최석영도 돌아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고 그 모습에 인터뷰어가 놀랄 정도였다.
인터뷰어는 잠시 통역을 돌아봤다.
자기가 들은 것이 맞느냐는 듯한 눈빛의 인터뷰어였다.
통역자는 인터뷰어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그의 눈빛을 보고 깨닫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못 듣지 않으셨습니다. 유증 참여를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이기에 이런 사고도 터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한다면 생방송에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몰라 언제나 대비하고 있던 인터뷰어조차 당황할 정도로 최석영의 대답은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파격적인 인터뷰에 대한 반응은 주식시장에 바로 반영됐다.
“하하하. 하여튼 여기 놈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어. 아니. 우리보다 더 감정적이라고 할까? 움직임 한번 다이나믹하네.”
한진영은 화면 옆에 보이는 모니터링 화면에 나오는 테라의 주가 흐름을 보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세이지증권의 유증 참여 루머로 우상향하던 그래프가 공식적인 세이지증권의 인정으로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아 오른 것이었다.
단번에 10%가 넘는 상승이 테라에서 나왔다.
90달러의 주가가 100달러를 넘기고도 힘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테라의 움직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유증 협상에 돌입한 것은 맞지만 아직 가격 차이로 인해 협상이 교착상태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양측은 현재 심각한 가격 차이로 인해 협상에 진전을 보기 어려운 것이 현재의 정확한 상황입니다.
협상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교착상태이며 진행이 어려운 상황이다.
최석영의 고백에 치솟던 테라의 주가가 단번에 아래로 꽂혀 들어갔다.
100달러를 넘기던 주가가 어느새 보합까지 빠져 내려와 이제는 90달러를 깨고 아래로 행했다.
10%가 넘게 오르던 테라의 주가가 이제는 -5% 선까지 밀려 내려간 것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주는 이펙트가 블록버스터급으로 테라를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협상은 결렬될 상황인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렬이 아니라 지지부진하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편이 지금의 상황을 표현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결렬은 아니라는 말에 하락하던 주가가 반등을 보였다.
그러자 마치 주가의 흐름을 보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최석영은 한숨 섞인 비관적인 이야기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 상태로 오래간다면 협상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건 회사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 저의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주가는 재차 하락했다.
-10%까지 단숨에 빠져 내려가 80달러 초반대에 돌입하고 말았다.
최석영의 한마디 한마디에 춤을 추는 주가의 흐름에 한진영은 가만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그동안 전화를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면 전화기의 벨소리를 무음으로 꺼놓고 있던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치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기라도 하다는 듯이 전화기의 벨소리를 올렸다.
-부재중 메시지가 55건 저장돼 있습니다.
한진영은 여전히 쌓인 부재중 메시지 숫자에 이번에도 확인하지 않고 바로 메시지를 지웠다.
그리고 책상에 엉덩이를 걸친 채로 최석영의 인터뷰를 계속 바라봤다.
-그렇다면 유증의 걸림돌은 결국 가격이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가격이 조율할 수 있는 정도로 떨어지게 된다면 유증은 진행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세이지증권은 유증에 참여할 자금을 모두 확보한 상태이며 언제라도 투입될 준비를 마쳐놓고 있습니다.
인터뷰어는 놀란 모습을 조금은 가라앉히고 최석영을 향해 물었다.
-가격만 맞는다면 이른 시일 안에 타결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유증에 맞추어야 할 부분은 모두 맞추어놓은 상황입니다. 가격이 문제인데…… 가격만 맞는다면 내일이라도 타결 소식을 들을 수 있으십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모든 것은 다 맞춰진 상태이니까요.
최석영의 말에 이제는 다시 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지진계가 따로 없는 모습의 움직임이었다.
한진영은 가볍게 테니스공을 벽에 던졌다.
벽에 맞고 튀어 오른 공이 한진영 앞에 도착했을 때쯤 전화기 벨이 울렸다.
따르릉.
철컥.
오른손으로 테니스공을 받아낸 한진영은 왼손으로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전화를 받으시네요? 혹시 세이지증권의 한진영 사장님 되세요?
“네. 제가 한진영입니다.”
-어…… 어…… 본부장님. 한진영 사장님께서 전화를 받으시는데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에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한진영은 상대의 반응이 예상됐다는 듯이 웃으며 스피커폰으로 바꾸고는 벽에다 공을 다시 튕겼다.
퉁.
퉁.
약 두 번의 공이 튀기고 나자 스피커폰을 통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진영 사장님?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이제서야 연락이 닿았군요. 저는 블랙문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의 본부장을 맡은 안소니 킴입니다. 제가 지금 바로 차를 보낼 테니 혹시 저희 회사에 오실 수 있으신지요?
퉁.
벽에 테니스공을 던진 한진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블랙문에서 초대해서 본사에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좋은 기억이 남아있지 않아 조금 꺼려집니다.”
-그 일은 제가 직접 만나 사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직접 찾아뵐 테니 지난번과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 본부장님이시라고요? 블랙문은 아시아 지역본부는 해당 지역에서 운용하지 않고 본사에서 모든 일을 진행하시나 봅니다.”
왜 본사에 아시아-태평양 본부장이 자리하고 있냐고 말을 돌려 이야기한 한진영이었다.
지역본부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본사에 있다는 것에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안소니 킴도 그런 한진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마침 회의가 있어 본사에 들어와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세이지증권의 한진영 사장님께서 뉴욕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직접 모시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여 말씀드린 겁니다.
“우연히 계셨던 게 맞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스피커폰에서는 짧은 한숨이 나왔다.
-아닙니다. 사실은 본사에서 급히 저를 불러오게 된 겁니다.
“저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세이지증권의 한 사장님에 대해 알고 싶고, 이야기 나누기 좋은 상대를 찾으려 저를 부른 겁니다. 사장님.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직접 사죄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되겠습니까?
스피커폰을 통해 안소니 킴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한진영은 안소니 킴의 목소리를 듣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테니스공만 벽에 튕겼다.
퉁.
공이 울리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방 안을 채워갈 때 스피커폰을 통해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한진영은 한숨 소리를 들으며 공을 받아낸 뒤 짧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바로 차를 보내세요.”
한진영의 좋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안소니 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30분. 아니.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소니 킴은 날개가 없는 것이 아쉽다는 듯이 날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한진영은 애달파 하는 안소니 킴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퉁.
테니스공이 두어 번 벽을 치고 한진영의 손에 돌아왔을 때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잘 놀았으니 이제 돈 벌러 가야지.”
한진영은 며칠 전부터 블랙문에 갈 때 입고 가려 준비해놨던 옷이 걸려 있는 옷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안소니 킴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진영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며 테라와 협상을 진행 중인 나창운 본부장과 통화했다.
-죄송합니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아닙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사과하는 나창운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거울에 입은 옷을 살핀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나창운을 향해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60달러로 낮춰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세요.”
-네?
스피커폰이 찢어질 듯이 나창운의 큰 소리가 들려왔다.
65달러도 테라 측이 받아들이기 어려워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65달러도 아닌 60달러로까지 가격을 낮추라는 지시에 나창운은 자기가 잘못들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조금 전 60달러라고 말씀하신 게 맞으십니까?
“네. 60달러 맞습니다.”
-60달러가 맞다고요?
몇 차례나 물어보는 나창운의 모습에 한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1, 2…… 5, 6. 60달러 맞습니다.”
직접 숫자까지 불러주는 한진영의 모습에 나창운은 더는 60달러가 맞는 건지 묻지 않았다.
나창운은 잠시 머뭇거리며 이유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이유를 묻지 못한 채 전화를 끊고 말았다.
“본부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사장님께서 가격을 좀 올려도 된다고 하시던가요?”
한진영과 통화하는 걸 알고 있던 협상단의 직원 하나가 나창운을 향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협상의 교착상태는 협상단에게도 골치가 아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격을 바꾸라고 하셨어.”
“역시 올리는 게 맞는 거였습니다. 얼마로 올리라고 하시던가요? 80달러는 무리겠지요? 우선 70달러부터 차분히 올려보라고 하시던가요?”
직원의 말에 협상단의 다른 직원들도 하나둘 나창운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현재 협상단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이자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이는 가격이 어떻게 지시되어 내려온 것인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나창운은 자기에게 모여든 협상단 여덟 명의 시선을 한번 돌아본 후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진영이 지시한 금액을 이야기했다.
“60달러.”
“네? 얼마라고요?”
나창운은 자기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직원을 향해 한진영과 같은 방식으로 숫자를 알려줬다.
“하나, 둘…… 다섯, 여섯. 육십 달러.”
“60달러라고요? 65달러에서 오히려 5달러를 낮춰 60달러로 진행하라고요?”
“그래. 그리고 한가지 말을 덧붙이셨어.”
“무슨 말씀이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이 덧붙였다는 말까지 듣고 반응해도 된다는 생각에 모두 나창운의 입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협상은 결렬돼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어.”
“결렬이요? 그럼 60달러를 목표가로 잡으라고 하신 게 결렬을 원하셔서 그런 건가요?”
“그건 아니야. 결렬이 돼도 괜찮다는 뜻은…… 물러서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야. 절대 테라의 의도대로 해주지 말고 우리 페이스로 밀어붙이라는 뜻이니까 다들 그렇게 알아들어. 우리는 무조건 60달러야. 65달러에서 계약이 성사될 수 있었는데 미적지근한 테라의 반응 때문에 오히려 가격을 다운해서 들어간다는 거로 컨셉을 잡고 협상에 돌입하라는 사장님의 의도니까 다들 명심하고 자리에 임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나창운의 말을 마치고 한진영이 마지막에 건넨 말을 떠올렸다.
‘블랙문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마지막 카드로 가지고 있으라고 하셨는데…… 그건 무슨 말씀이실까?’
나창운은 60달러로 강하게 밀고 가라는 뜻이 바로 블랙문이라는 키워드 속에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창운을 비롯한 테라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협상단이 캘리포니아에서 한진영의 말뜻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한진영은 로비로 내려왔다.
“한진영 사장님 맞으시죠?”
로비에 내려온 한진영을 향해 검은 머리의 동양인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는 한진영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블랙문 자산운용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담당자인 안소니 킴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한진영은 안소니 킴의 인사를 시큰둥하게 받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소니 킴은 그런 한진영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밖에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저희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회사로 모셔서 제대로 사과하고 싶습니다.”
“지난번에 탄 차는 둘이 타기 작은 차던데…….”
한진영의 말에 안소니 킴이 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디선가 혼선이 있었던 것인지 차를 너무 작은 것으로 보냈었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요?”
한진영은 안절부절못하는 안소니 킴의 모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혼선이 있었다니 이해하겠습니다. 지금 뭐 딱히 할 일이 없으니 다시 한번 가보도록 하죠.”
한진영의 말에 안소니 킴은 고맙다는 인사하고는 먼저 앞서 밖으로 나갔다.
한진영은 그런 안소니 킴의 모습에 건물을 지키고 있던 보안 요원들에게 인사하고는 안소니 킴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