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복잡한 건 싫다
안소니 킴의 자신 대로 지난번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블랙문 자산운용이 보여줬다.
우선 한진영을 태우고 갈 차부터가 달라졌다.
최고급 세단이 번쩍이는 자태를 자랑하며 한진영이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를 운전할 기사 또한 지난번과 달랐다.
한진영을 보자마자 바로 깍듯이 인사한 것이 마치 주의를 받고 나온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진영이 차에 올라타자 안소니 킴은 바로 한진영의 옆자리에 자리했다.
한진영을 혼자 보냈던 지난번과 달리 곁에 붙어서 한진영을 안내하겠다는 뜻이 나타난 행동이었다.
안소니 킴은 한진영이 만족한 듯한 표정을 보이자 안심하고는 차를 블랙문 본사가 있는 곳으로 가도록 지시했다.
차가 블랙문을 향해 출발하자 안소니 킴은 한진영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렇게 라이징 스타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이징 스타라니요? 놀리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한진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안소니 킴은 급히 양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시아 쪽을 담당하는 저는 한 사장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 가장 기세 좋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꼽자면 한 사장님을 제외하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니까요.”
한진영은 안소니킴의 진지한 말에 굳었던 표정을 풀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직 회사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얼굴에 이렇게 금칠을 해주시는 것을 보니 오늘 나눌 이야기가 심상치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웃는 표정에서 날카로운 말을 건넨 한진영이었다.
안소니 킴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긴장을 한 채로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할 테지만 결코 한 사장님과 세이지증권에 손해가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그래요? 저도 그러길 바라는데…….”
“믿어주십시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보통 그런 말들을 하실 때가 상대방에게 큰 걸 요구할 때이던데…….”
한진영이 은근한 눈빛으로 안소니 킴을 바라보자 안소니 킴은 땀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날이 참 덥네요.”
한진영은 말을 돌리는 안소니 킴을 바라보고 웃으며 반대편 창문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안소니 킴과 블랙문 자산운용이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안소니 킴이 한진영과 세이지증권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손해를 보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차를 타고 블랙문을 향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너희들이 나를 이용하려 하듯이 내가 너희들을 이용하겠다.’
한진영은 블랙문을 이용하여 테라와의 협상에서 더 좋은 조건을 끌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협상 이후의 일까지도 블랙문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블랙문이 한진영을 원한다기보다는 어쩌면 한진영이 블랙문을 원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한진영은 블랙문을 쪽쪽 빨아먹을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한 안소니 킴은 한진영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인 채로 차를 타고 블랙문 자산운용의 본사로 향했다.
***
한진영을 태운 차가 블랙문 자산운용에 도착하자 지난번과 다른 모습이 펼쳐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까지 한진영을 직접 안소니 킴이 안내하여 갔고, 차를 몰고 온 기사는 한진영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는 지난번에 한진영을 태우고 왔던 기사가 한진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끝까지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불편을 끼쳐드렸습니다.”
한진영에게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손가락질하고는 떠났던 남자는 자기가 한진영을 안내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한진영은 자기에게 고개까지 숙여가며 잘못을 비는 기사를 향해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기사는 쉽게 용서해주는 한진영의 모습에 감격했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한진영은 가만히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안소니 킴에게 넌지시 물었다.
“보통 이곳 정서에는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지 않나요?”
“한 사장님께 사과하기 위해서는 동양 문화에 따라야 한다고 제가 주장했습니다.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고생하셨겠습니다.”
“고생이라니요? 저희가 한 사장님께 한 행동을 생각한다면 이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시키고 싶은 심정입니다.”
“도대체 들어가서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걱정이 됩니다.”
한진영이 살짝 흥분한 듯한 안소니 킴을 향해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안소니 킴은 마른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행동이 너무 앞서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안소니 킴을 향해 슬쩍 웃고는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곳은 지난번에 왔을 때 한진영에게 가라고 했던 12층이 아니었다.
회의실만이 죽 이어져 있는 곳으로 내부 인사들은 물론이고 외부 인사를 초청하여 회의할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았다.
즉, 한진영의 예측대로 12층은 회의실이 아닌 일반 사무실이라는 것을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한진영은 엘리베이터에 내려 안소니 킴을 돌아봤다.
그러자 안소니 킴이 한진영이 바라보는 이유를 단숨에 알아채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왜 사장님께 12층으로 가라고 했는지 저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12층은 대외협력 부서가 모여 있는 곳으로 사장님께서 가실 이유가 없는 곳입니다.”
빠른 인정을 한 안소니 킴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왜 그곳으로 가라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뭐 그럴 수 있지요. 일하다 보면 헷갈릴 수도 있으니까요.”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가실까요?”
한진영이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자 안소니 킴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고 한진영을 안으로 안내했다.
한진영은 앞으로 더 재미있는 일이 남아있기에 과거를 따지지 않은 채 안소니 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 자리한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먼저 와있던 사람들이 들어온 한진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커다란 키의 백인 남자는 한진영을 향해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블랙문 자산운용의 주식 파트 수석 전략가인 짐 카론입니다.”
한진영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짐 카론을 바라봤다.
짐 카론의 위치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짐 카론에 대한 생각도 옆에 있는 중년의 아일랜드계 남자를 본 뒤에 바뀌고 말았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글로벌 투자 전략 헤드를 맡은 앤드류 볼튼입니다.”
한진영은 자칫 놀라 탄성을 지를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아무리 증권사의 사장이라고 하지만, 아시아 변방에 불과한 자기를 만나러 나오기에는 앤드류 볼튼이 가지고 있는 이름의 무게가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침 카론의 주식 파트 수석 전략가라는 자리는 블랙문이 투자하는 주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설계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앤드류 볼튼은 주식과 채권, 리츠는 물론이고 블랙문이 투자하는 모든 것의 최종 투자 결정권자였다.
즉, 지금 눈앞의 두 사람이 블랙문에 있어서 핵심 인사라는 뜻이었다.
한진영은 예상외의 사람들이 등장한 것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짐 카론은 그런 한진영의 인사를 받은 뒤, 바로 밖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데리고 와.”
짐 카론의 지시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난번 방문 때 로비에서 한진영과 마주했던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와 큰 덩치를 자랑하는 흑인은 보이는 것과 달리 잔뜩 주눅 든 모습으로 한진영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니요. 됐습니다.”
한진영은 이제는 지루해져 버린 사과 페스티벌을 이쯤에서 끝내고 싶어 했다.
“됐으니까. 이건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사과는 충분히 받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 직원들의 잘못은 철저히 따지라는 것이 회사 설립자셨던 토미 랜스 씨의 철학이셨습니다.”
“이분 표정을 보니 충분히 따진 것 같으니 저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싶습니다. 사과를 받는 것도 피곤하네요.”
보이는 것과 달리 잔뜩 주눅 들어 당장에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흑인의 모습에 한진영이 피곤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짐 카론은 한진영의 모습에 충분히 자기들의 뜻이 전해진 것을 깨닫고 손을 들어 직원을 내보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이곳에 오며 보고 느낀 것으로 보아 말씀대로 앞으로 지난번 일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저도 들었습니다.”
한진영이 말을 하고 자리에 앉자 앞쪽으로 짐 카론, 앤드류 볼튼, 안소니 킴이 나란히 앉았다.
세 사람은 자기들끼리 번갈아 시선을 교환한 후 안소니 킴이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한 사장님을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닙니다.”
“테라 때문에 그러신가요?”
“알고 계셨군요?”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그것 말고는 없을 테니까요.”
바로 본론을 꺼낸 한진영의 모습에 짐 카론이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알고 계시니 돌려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짐 카론은 앤드류 볼튼을 돌아봤다.
앤드류 볼튼이 고개를 끄덕이자 짐 카론은 다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세이지 증권의 테라 유증 참여 때문에 저희가 곤란함을 겪고 있습니다.”
“공매도 때문이십니까?”
앤드류 볼튼은 한진영의 말에 미소를 띄우고는 양손을 탁자 위로 올려 맞잡았다.
“그것도 알고 있으니 이야기가 편하겠군요. 맞습니다. 공매도 때문입니다.”
앤드류 볼튼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자 조금 전까지 말을 하던 짐 카론과 안소니 킴 모두 몸을 뒤로 물리며 조용히 앤드류 볼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모습으로 오늘 자리의 주최자는 앤드류 볼튼이라는 것을 한진영은 알 수 있었다.
앤드류 볼튼은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현재 세이지증권의 유증 참여 이야기로 정신이 없는 지경입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이지증권의 관계자가 방송에 나와 이야기할 때마다 주가가 요동쳤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블랙문은 테라를 아주 안 좋게 보고 있군요.”
앤드류 볼튼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테라를 지속 가능한 회사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전기차 산업 자체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앤드류 볼튼은 노골적인 한진영의 질문에 입술을 꾹 눌러 굳은 의지를 보여주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기차 산업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한진영은 팔짱을 끼고 블랙문의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과거 그가 경험했던 지난 시절에도 블랙문의 전기차에 대한 스탠스는 부정적이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얼마 전까지의 스탠스라는 것을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한진영은 지금은 블랙문이 바뀐 스탠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를 속일 수는 없지.’
한진영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자 짐 카론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사실 이렇게 외부인에게 우리의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한 사장님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한 사장님의 도움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짐 카론은 안소니 킴을 슬쩍 돌아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킴 본부장에게 한 사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입지전적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엄청난 실적을 올리고 있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내놓은 성적이 운이 아님을 이야기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도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테라에 대한 공매도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게 저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상대를 추켜세우고 있지만 블랙문과 비교했을 때 한진영은 달빛 아래 반딧불과 다름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한진영이 테라를 좋게 본다고 하여 테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바뀔 정도로 세이지가 블랙문에 주는 영향력이 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그저 생각할 때 한번 함께 이야기를 들어볼 정도가 블랙문에게 있어 세이지의 위치였다.
짐 카론은 한진영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보이는 것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노련미가 상당하다고 하더니…….”
짐 카론은 안소니 킴을 돌아봤다.
정확하게 한진영을 분석한 것에 대한 칭찬이 담긴 눈빛을 안소니 킴에게 건네고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 정도 이야기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기 마련인데 한 사장님께서는 다르시군요. 한 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기차 시장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최근에 조금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저…….”
“복잡합니다. 어지럽고요.”
한진영은 짐 카론의 말에 손을 휘저으며 말을 막아 세웠다.
“블랙문이 복잡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듣던 것 이상이네요. 처음 이곳에 방문했을 때도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하시더니 지금 자리에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계속 주제에서 벗어나 뱅뱅 도는 이야기만을 하십니다.”
한진영은 세 사람을 향해 어지럽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고는 이야기했다.
“정리하자면 이거 아닙니까?”
한진영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짚으며 말했다.
“공매도를 치고 있는 지금 포지션을 정리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보고 빠질 수는 없다. 세이지증권이 유상증자에 참여하게 된다면 주가가 상승하여 공매도 포지션에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유상증자 참여를 취소해달라. 혹은 보류해달라. 우리가 빠져나갈 때까지…… 이거 아닙니까?”
한진영의 말에 앤드류 볼튼과 짐 카론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습니다.”
“네?”
“싫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유증 참여를 보류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취소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한진영은 자기의 생각을 똑바로 세 사람을 향해 전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