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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408화 (407/650)

408화 부탁이 아닌 결정을 하려 한다

한진영은 자기에게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가를 반 토막을 내려면 테라 혼자만의 재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장 분위기까지 도와줘야지 가능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시장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네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적당한 자리에서 손실을 확정 짓고 포지션을 무리 없이 교체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적당한 자리라면…… 한 사장님이 생각하는 자리가 있으십니까?”

짐 카론이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로 세이지가 생각하는 유증 타겟 가격을 알고 싶다는 뜻에서 건넨 질문이었다.

“블랙문이 솔직히 말씀해주시니 저도 속이는 것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유증 타겟 가격은 60달러입니다.”

“60달러…….”

“60달러면 뭐…….”

“괜찮지 않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릭 앤더슨을 제외한 세 사람 모두 그 정도면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예상했던 가격은 60달러하고 차이가 크게 나는 80달러 선이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릭 앤더슨이 한진영을 향해 질문했다.

“60달러에 가능하시겠습니까?”

“할인율을 10% 정도 받을 걸 예상하고 65달러 근방까지만 빠져 내려오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블랙문 혼자서도 찍어 누를 수 있지 않으십니까?”

“65달러. 말씀대로 그 정도는 찍어 누를 수 있습니다. 작업 중에 이상한 이야기만 나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힘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오도록 할 테니 그 부분에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진영의 말에 짐 카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힘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요? 도움을 주신다는 게 바로 그거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약 당사자이니 이야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흘려보낼 수 있으니까요.”

안소니 킴이 한진영의 말에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테라가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안소니 킴의 걱정에 한진영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테라는 그러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러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테라의 유증을 받아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유증 계약이 깨지더라도 우리는 손해 보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테라 말고도 돈을 벌 곳이 무지무지 많으니까요. 블랙문 입장에서도 나쁜 것이 없지 않습니까? 계약이 깨지면 그야말로 수문장 없는 빈 골대나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릭 앤더슨은 한진영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진영을 불렀다.

“잠시 나와 사무실로 따로 가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있으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결론 내지 않으시고요?”

릭 앤더슨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본 뒤 지시를 내렸다.

“이번 일에 대하여 한 사장님의 지시를 받도록 해. 한 사장님이 짜놓은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얼마의 손해를 보던 다 털고 나오는 것으로 생각해.”

짧은 지시였지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블랙문이 그것도 외부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라는 말이 최고 투자책임자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어떻습니까? 이러면 이번 일은 깔끔하게 정리가 된 것이지요?”

“어…… 그렇겠네요.”

한진영은 기다리는 듯한 릭 앤더슨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실까요?”

릭 앤더슨이 한진영에게 손짓하고 먼저 앞서 걸어갔다.

한진영은 자리에 있는 세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릭 앤더슨을 따라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

릭 앤더슨의 사무실은 블랙문 자산운용 건물의 제일 꼭대기 층 바로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릭 앤더슨이 직접 열어준 문을 통해 사무실에 들어온 한진영은 문 앞에서 잠시 사무실을 살폈다.

한진영 사무실의 족히 다섯 배는 넘을 듯한 크기의 릭 앤더슨의 사무실은 거대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크고 무거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좋네요.”

“토미 랜스 설립자께서 저에게 과분한 사무실을 내어주셨지요. 앉으시겠습니까?”

커다란 사무실 한쪽에 자리한 응접용 소파를 릭 앤더슨이 가리켰다.

한진영은 사무실을 구경하고 천천히 소파로 다가갔다.

릭 앤더슨은 그런 한진영을 잠시 바라본 뒤 비서에게 차를 내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한진영이 앉아있는 소파로 다가가 맞은 편에 앉았다.

“뉴욕에 사무실을 얻으셨다고요?”

“그 소식이 여기까지 전해졌습니까?”

“한 사장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이곳에서도 한 사장님의 움직임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남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요?”

릭 앤더슨이 빙긋이 웃으며 한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진영은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앉은 채로 사무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름이 알려지는 걸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앤더슨 CIO께서 관심을 가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세 친구의 보고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더군요.”

릭 앤더슨은 가볍게 웃으며 비서가 내온 차를 한진영에게 권했다.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시지요.”

한진영은 찻잔을 들어 찻물을 마시고는 의외라는 듯이 릭 앤더슨에게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라 뉴욕에서 군산은침을 맛볼 줄은 몰랐습니다. 차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한진영의 말에 릭 앤더슨이 오히려 한진영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를 좋아하시는군요. 단번에 내온 차가 무엇인지 알아보시니 말입니다. 보통은 차 색깔이 홍차와 비슷한 것을 보고 홍차 계열인 줄 알고는 하던데…… 차 맛만 보고 알아맞히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저도 최근에 군산은침을 맛볼 기회가 있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이곳에서 제가 맛보지 못했던 제대로 된 황차를 맛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붉은 기가 어린 찻물을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을 보고 릭 앤더슨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비서에게 찻물을 우려낸 주전자를 가지고 오도록 했다.

그리고 한진영에게 주전자 안에서 위아래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삼기삼락의 군산은침 찻잎을 보여주며 자랑하듯이 이야기했다.

“직접 동정호 군산도에 가서 가지고 온 찻잎입니다.”

“직접 가서 가지고 오셨다고요?”

“마침 중국에 갈 일이 있어 갔다가 들려서 가지고 온 겁니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일부러 시간 내서 다녀온 값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한진영의 칭찬에 릭 앤더슨은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블랙문이 아시아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나 보구나.’

릭 앤더슨이 중국에 방문한 이유를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지난 시절의 경험을 통해 블랙문이 이맘때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런 생각을 숨긴 채 차 맛을 음미했다.

어쨌든 지금은 블랙문의 중국 진출보다 더 중요한 일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잠시 차 맛을 음미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릭 앤더슨이 먼저 찻잔을 내려놓고 한진영에게 운을 띄웠다.

“한 사장님을 제 사무실로 모신 이유를 아십니까?”

“글쎄요? 하실 말씀이 있어 저를 이곳에 오게 한 것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할 줄도 아십니까?”

한진영은 릭 앤더슨의 말에 잠시 찻잔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릭 앤더슨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업무적으로 제안을 하려 하셨다면 이렇게 따로 사무실로까지 저를 부르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릭 앤더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자기가 유추한 것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렇게 따로 부른 것은 조금 전 회의실에 있었던 사람들 앞에서 하기 어려운 혹은 민망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릭 앤더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가만히 눈을 감고 한진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릭 앤더슨을 향해 마지막 말을 건넸다.

“마치 부탁 같은 것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짝짝짝짝.

릭 앤더슨은 한진영의 말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대단합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네요.”

“제가 추론한 게 마음에 드신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딱 맞추셨습니다.”

릭 앤더슨은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부탁하기 위해 한 사장님을 이곳으로 부른 건데 지금의 모습을 보고 부탁이 아닌 결정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부탁이 아닌 결정? 무엇을 결정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한진영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릭 앤더슨이 팔을 무릎에 걸친 채로 대답했다.

“먼저 부탁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 그래야 결정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진영은 릭 앤더슨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릭 앤더슨은 경청하는 한진영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한진영에게 부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하려는 부탁은 다름 아니라 대한민국에 투자된 블랙문의 자원을 넘긴다는 제안을 취소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했던 세 가지 제안 중 마지막 것 말씀입니까?”

“네. 세 친구들이 조금 흥분하여 많은 것을 내어놓은 듯싶어 조율이 가능하나 여쭙기 위해 이곳에 모신 겁니다.”

말이 조율이지 실상은 주기 싫다는 말을 하기 위해 부른 것임을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탁을 하더라도 블랙문이 염치없는 짓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블랙문이 세이지에게 주겠다는 것들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진영도 모든 것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 가지 중에서 일이 잘 풀렸을 때는 두 가지,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는 한 가지를 받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 제안들은 한진영이 돈을 버는 것의 부가적으로 딸려오는 것들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기도 했다.

‘부탁을 이야기해야 결정을 말할 수 있다? 설마…….’

한진영은 릭 앤더슨의 말에 한가지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릭 앤드슨이 금방 한진영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사장님을 만나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어떻게 바꿨다는 말씀이십니까?”

“한 사장님과 함께한다면 대한민국에 블랙문의 아시아 투자본부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블랙문의 아시아 투자본부를 대한민국에 두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리고 그 투자본부는 세이지와 공동출자로 설립했으면 합니다.”

한진영의 릭 앤더슨을 바라보는 눈은 점차 가늘어졌다.

그가 알고 있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릭 앤더슨의 입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릭 앤더슨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떠보듯이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한진영은 릭 앤더슨을 자세히 쳐다봤다.

“저희와 아시아 시장에서 함께 움직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동업하자고요?”

릭 앤더슨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풀어내자면 그런 뜻이지요. 어떻습니까? 제안이 꽤 괜찮지 않습니까?”

한진영은 릭 앤더슨의 자신 있어 하는 말에 가만히 팔짱을 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릭 앤더슨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걸 생각하려 하시는 겁니까? 이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 같은데요?”

“글쎄요. 블랙문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충분히 생각해볼 문제 같습니다.”

“이게 생각해볼 문제라고요?”

릭 앤더슨은 한진영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동 출자하여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는 것은 세이지에게 아시아 시장에 무혈 입성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구축해놓은 자원을 바탕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건…… 세이지에 엄청난 기회를 블랙문에서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흐음…….”

열정적인 릭 앤더슨의 제안에도 한진영은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짧은 신음과 함께 깊은 고민을 하는 모습만 보여줄 뿐이었다.

“이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참 만에 내놓은 대답은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는 말이었다.

한진영의 이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릭 앤더슨은 화가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릭 앤더슨의 말에 한진영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릭 앤더슨을 똑바로 바라봤다.

“친한 친구끼리 동업을 할 때도 서로 다투기 마련입니다. 특히, 누군가의 우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툼은 더욱 커지지요. 그런데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친구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다툼이 걱정이신 겁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릭 앤더슨은 한진영의 말에 양미간을 찌푸렸다.

세이지에 기회를 제공하는 거로 생각한 자기의 제안에 한진영이 반대에 가까운 의견을 하나둘 내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릭 앤더슨의 모습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저희가 비록 신생 회사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에서 가지고 있는 자원이 블랙문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빈약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출자로 회사를 세워 함께 운용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원을 내놓는 쪽은 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신 우리는 아시아 시장에 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이지가 가지지 못한 것을요.”

“글쎄요. 투자본부를 설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진영의 말에 릭 앤더슨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릭 앤더슨을 대신하여 답을 말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자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본부를 세우려는 것 아닙니까? 결국, 새롭게 해보자는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인데…… 기존의 것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한진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조금 더 생각할 여지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생각해보고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릭 앤더슨은 생각도 못 한 한진영의 반응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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