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415화 (414/650)

415화 어려운 사람

“사실 앞에 두 가지 이유는 마지막 이유에 비하면 숫자를 채우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마지막 이유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중요한 정도가 아닙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릭 앤더슨은 한진영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한진영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중요도가 남다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자기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네 쌍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이지의 미국 진출을 위해서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네 쌍의 눈이 동시에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앤드류 볼튼이 네 사람 중 대표로 나서 입을 열었다.

한진영은 그런 앤드류 볼튼을 바라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세이지증권은 미국 진출을 원합니다. 블랙문이 도와주십시오.”

“저희가 어떻게 도우란 말입니까?”

이번에는 짐 카론이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이 짐 카론을 돌아본 채로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저희 프로모션에 블랙문이 참여해주시면 됩니다. 이번 펀드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된다는 표정으로 릭 앤더슨이 고개를 뒤로 뺐다.

“그래서 우리에게 펀드 참여를 이야기한 것이었군요.”

“서로 오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펀드 자리를 내어드린 값을 치러주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자릿값을 치러달라.”

릭 앤더슨은 혼잣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값을 너무 과하게 받으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느껴지셨나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한진영도 릭 앤더슨의 말에 마주 고개를 흔들었다.

릭 앤더슨은 한진영의 모습에 눈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과하다고 느끼신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포기하겠습니다.”

“미국 진출을 포기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것만 취소하신다면 테라의 주가 상승은 저희가 책임지고 밀어 올리도록 할 테니 세이지증권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릭 앤더슨은 말을 마치고는 짐 카론과 앤드류 볼턴을 번갈아 바라봤다.

두 사람은 릭 앤더슨의 시선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채고는 급히 한진영을 향해 약속했다.

“이미 매수 리포트와 언론을 통한 인터뷰 준비 등이 홍보전략실을 통해 작업이 들어간 상태입니다. 운용부서에서도 매수 준비를 마친 상태이고요. 우리가 지시를 내리기만 하면 바로 움직일 준비가 끝난 상황입니다.”

“한 사장님께서는 주가 걱정은 더는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도 10억 달러의 물량이 들어가는 만큼 확실하게 밀어줄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번갈아 말하는 짐 카론과 앤드류 볼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진영은 고개를 흔들고는 릭 앤더슨을 바라봤다.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습니다.”

“잘못 알아듣다니요? 뭘 잘못 알아들었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한 건 블랙문의 유증 참여 제안을 거둬들이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유증 참여 제안을 거둔다니요? 설마 세이지증권의 미국 진출을 돕지 못하겠다는 제 이야기에 블랙문의 유증 참여를 취소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제가 가증 크게 기대하고 온 이유가 거절당했는데 제가 왜 블랙문 참여를 부탁하겠습니까? CIO께서 처음 말씀하셨던 대로 유증 참여는 선물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릭 앤더슨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했다.

자기가 건넨 제안을 거절한 것에 이렇게 바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확실히 누가 협상 자리에서 우위에 서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유증 가격을 55달러로 맞춰왔나 궁금했는데…… 어려워. 어려운 사람이야.’

릭 앤더슨은 한진영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만하지 않은 것을 넘어 상대는 이런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치고 블랙문을 몰아넣은 뒤 선택을 강요했다.

릭 앤더슨으로서는 꼼짝없이 당한 수에 깊은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휴우~ 좋습니다. 이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군요.”

“적절한 결정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쪽에서 유증 참여 의사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리포트 발표 때와 참여 의사 발표 시기를 조율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저희야 언제나 환영이니까요.”

한진영이 느긋한 표정으로 승자의 여유를 보여줬다.

릭 앤더슨은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혹시 회사를 파실 생각은 없습니까?”

자리에 있던 블랙문의 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릭 앤더슨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릭 앤더슨의 말에 세 사람은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진영만은 당황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까지 지어 보인 한진영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릭 앤더슨을 향해 물었다.

“얼마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우선 시작을 50억 달러부터 생각해 볼 생각입니다.”

“50억 달러. 나름 괜찮은 가격이군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 조건입니까?”

“한 사장님이 와서 일하신다는 조건입니다. 물론 연봉은 물론이고 성과금 등은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릭 앤더슨의 제안에 한진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제가 세이지증권의 지분을 100% 가지고 있다는 것 아십니까? 50억 달러로 회사를 매각한다면 제 주머니에 그 돈이 모두 들어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해서 받는 돈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분 100%를 가지고 계신다고요? 그건 몰랐군요.”

릭 앤더슨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지분을 100% 가지고 계신다면 뭐 제가 다른 제안을 하더라도 한 사장님을 만족시킬 수 없겠군요. 차라리 인수 제안보다는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앞으로 함께 일을 해나갈 테니 많은 지도와 편달 바랍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릭 앤더슨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이길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

한진영은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은 후 블랙문을 나섰다.

조지훈은 조용히 한진영이 블랙문을 나설 때까지 뒤를 따른 후 차에 올라타고 난 뒤에 조금 전 일을 묻기 시작했다.

“사장님. 블랙문에 선물을 받으러 가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오히려 선물을 주고 오신 것 아닙니까?”

“10억 달러나 양보한 게 아까워서 그래?”

“네.”

조지훈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테라가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굳이 블랙문에게 양보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조지훈은 말을 마친 뒤 한진영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혹시 제가 너무 건방진 행동을 한 건가요? 사장님의 결정에 토를 달아서 혹 기분이 언짢은 것은 아닌지…….”

“아니야. 말 잘했어. 조 실장이 할 일은 바로 그런 것들이야. 내가 한 행동을 계속 환기해주는 역할. 나한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니까.”

한진영은 차 밖으로 보이는 뉴욕 시내를 바라보고 말했다.

“나와 세이지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거야. 내 선택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없어질 테고, 내 선택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말겠지. 그런 건 좋은 게 아니야.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가는 나도 독단이라는 늪에 빠질 수 있으니까.”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이야기 잘했다는 뜻을 전한 후 조지훈이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건넸다.

“조 실장의 말대로 내가 엄청나게 양보한 거야. 지금 10억 달러가 앞으로 5년 뒤에는 100억 달러는 우습게 넘는 가치를 지니게 될 테니까.”

“10억이 100억이 된다고요?”

조지훈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한진영이 양보를 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조지훈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배까지 보고 계셨습니까?”

“10배? 나는 그보다도 더 높은 곳을 보고 있어.”

“테라가…… 그 정도였습니까?”

한진영의 추천으로 조지훈도 꽤 많은 테라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도 처음 들어간 돈에 5배를 벌어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10배가 더 넘게 상승할 거라 이야기하니 조지훈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장 패러다임을 바꾸는 회사는 언제나 폭발적인 상승을 하고는 해. 테라가 그런 곳이고 잠재력 또한 지금 충분해. 게다가 우리 자금이 들어가 시장 선점을 위한 작업까지 마친다면 10배는 우습게 성장할 거야.”

“그럼 더더욱 블랙문에게 내어줘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었나요? 10억 달러가 100억 달러가 되는 거라면……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조지훈이 아깝다는 생각을 넘어 안타깝다는 모습까지 보이자 한진영은 웃음 터트렸다.

“왜 조 실장이 그렇게 아까워해?”

“세이지증권이 곧 저이니까요.”

“하하하.”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많은 회사 사장들이 직원이 어떻게 하면 주인의식을 가지게 할까 고민하고는 하는데 역시 정답은 돈이었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걱정되어…….”

“괜찮아. 돈 많이 주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도 그걸 바라고 돈을 주는 거니 그렇게 아니라고 펄쩍 뛰지 않아도 돼.”

한진영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조지훈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돈에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 속물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한진영은 그런 속물적인 모습을 좋아하는 모습에 조지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대만을 잡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웃음을 터트린 한진영은 웃음을 멈추고 조금 전 조지훈이 질문했던 것에 대해 대답했다.

“100억 달러를 넘겨줬으면 1,000억 달러를 받아오면 되는 거야.”

“그 말씀은 블랙문에게 1,000억 달러 값어치의 것을 가져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가져오겠다가 아니라 가지고 왔어.”

“가지고 오셨다고요?

놀라는 조지훈의 모습에 한진영은 가볍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미국진출은 쉬운 일이 아니야. 게다가 블랙문과 협력한다는 사실은 이곳에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그게 1,000억 달러의 값어치가 있는 건가요?”

“1,000억 달러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지. 누가 쓰냐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지니까. 그리고 난 그걸 가장 잘 사용할 사람이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지는 것을 한진영이 가지게 됐을 때 최고의 능력을 뿜어낼 수 있다는 것에 조지훈도 동의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화도 아닌 달러로 1,000억 달러의 값어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겨우 미국진출에 블랙문이 도와주는 것 하나 가지고 무슨 1,000억 달러의 값어치가 되냐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여줄게. 그게 왜 1,000억 달러의 값어치가 되는지.”

한진영은 멈춰 선 차에 운전대를 잡고 있는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린 후 차에서 내렸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뒷모습에서 커다란 선물을 안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한진영이 정말로 블랙문에게서 큰 선물을 가지고 온 게 아니냐는 느낌이 전해졌다.

***

테라와 세이지증권 간의 유상증자 협상 테이블이 치워졌다는 이야기에 결국 테라의 주가는 60달러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지점까지 오고 말았다.

주주들을 비롯한 시장 참여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테라에 설명을 요구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루머가 돌아다니는 상황에서는 유상증자 취소 소식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됐건 간에 명확한 지금 상황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지금 사태를 잠재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라는 이런 요구에도 침묵을 지킨 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테라가 입을 다물자 사람들은 이제 세이지증권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라가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세이지증권이라도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시장참여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시장참여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였다.

“국회에서 국정감사 출석을 요청했습니다.”

TV에 게임기를 연결하여 놀고 있던 한진영은 조지훈의 보고에 게임을 멈췄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조지훈을 올려다보고 물었다.

“어디서 뭘 했다고?”

조지훈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는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한진영에게 연락해 온 것을 다시 이야기했다.

“국회에서 국정감사에 참석하셔서 테라와의 문제를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지랄들 하네.”

한진영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 조지훈에게 물었다.

“태훈로펌하고 상의해봤어? 국정감사 출석 요청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한대?”

“안 그래도 사장님께 보고드리기 전에 태훈 측에 국정감사 문제를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뭐래?

“증인이나 참고인은 출석이 어려울 수 있다는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 불출석해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태훈로펌 측에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할 테니 사장님께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은 게임기 패드를 소파에 내려놓고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지금 공매도 친 건 얼마나 정리됐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보고를 오전에 받았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얼추 다 됐고…… 저쪽은?”

한진영이 말한 저쪽이 블랙문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안 조지훈은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블랙문도 오전에 연락이 왔었습니다. 자기들은 다 정리를 마쳤다고 합니다.”

“블랙문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모두 다 정리가 된 거네?”

“네.”

한진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그럼 발표해.”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정국이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이 새끼들이 나를 잡고 늘어지려고 하네. 하여튼 호구 놈들 아니라고 할까 봐 하는 짓도 호구 짓 그대로네. 자기네들 살길이나 찾아야지 누구를 걸고넘어져?”

한진영은 탄핵정국에 돌입한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기생하는 정치인들이 자기를 이용하여 이슈를 흐리려는 짓을 보고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이 당황하게 할 지시를 조지훈에게 내렸다.

테라와 세이지증권간의 유상증자 체결 소식을 발표할 것을 지시한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