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상장은 뉴욕에서 하겠다
방송에 나온 최석영은 핼쑥해진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앵커는 그런 최석영을 걱정하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굴이 많이 상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시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에 얼굴이 안 좋으신 겁니까?
-네. 솔직히 말씀드려 최근 있었던 일들 때문에 힘이 든 게 사실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세이지증권을 힘들게 한 건가요?
앵커의 질문에 최석영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과 함께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 얼굴을 더욱 검게 만들었다.
이성우는 그런 최석영의 모습을 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연기가 점점 더 늘어. 어떻게 저러는 거야? 저 양반 연기학원 보내주고 있냐?”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잠시 웃고는 옷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거울에 옷을 살피고는 이성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방송에 나오기 전에 통화하니까 이틀 밤새웠다고 하더라. 그러니 화면으로 보기에도 힘든 표정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기지.”
“이틀 동안 밤새우고 저렇게 방송을 할 수 있는 거야?”
“커피에 에너지드링크를 물 마시듯이 마시면서 버티고 있대. 저 방송 하나를 위해서……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힘이 든 거야.”
“대단하다. 대단해.”
이성우는 혀를 내두르고는 화면 속의 최석영을 바라봤다.
화면 속의 최석영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앵커가 던진 질문에 대답했다.
-회사의 결정권자인 사장님께서 해외에 나가 계신 것으로 인해 주요 의사결정에 딜레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번 테라의 유증과 관련된 것이 늦게 결정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테라의 유증 협상은 한진영 사장이 직접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로 협상 자리에 한진영 사장이 직접 자리하기도 했고요. 아닙니까?
앵커의 날카로운 듯한 질문을 했다.
그러나 최석영은 이미 그런 질문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협상 진행은 사장님께서 직접 진행하신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결정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됐습니다.
-협상 자리에 있었던 게 오히려 진행 속도를 늦췄다고요?
-네. 본사에 자리하고 협상에 관한 것을 총괄하여 정리하셔야 할 사장님이 최전선에 나가 있으니 오히려 결정에 어려움이 있었던 겁니다. 유증에 필요한 자금의 확보와 블랙문과의 협상 그리고 유증 가격의 타당성 정도를 본사에서 보고받아 결정을 내리셔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최석영의 말에 앵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화면의 모습을 보고 이성우는 가만히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손을 까닥였다.
“이제 그만 보고 일어나. 거의 시간 다 됐어.”
“아직 시간 충분하네 뭐. 이것만 마저 보고 일어날게.”
시계를 확인한 이성우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고는 조지훈을 향해 물었다.
“다 숙지했어?”
“네. 오늘 파티에 참석할 귀빈 명단 속에 담긴 인원 모두를 외웠습니다. 확보한 사진 속의 인물이 갑자기 삭발하고 오더라도 알아볼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뭘 그렇게까지 했어? 주요 인물만 외우면 된다고 했잖아. 고생했어.”
“아닙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 이성우가 보고 있는 화면을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최석영이 앵커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모든 분이 알고 있는 최근 일도 저희에게는 압박이 되고는 합니다.
-혹시 이번에 제명당한 의원들 외에도 또 다른 사람이 세이지를 압박하고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최석영은 고개를 저은 후 피곤함에 지친 얼굴로 이야기했다.
-이 자리를 빌려 확실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최석영은 힘든 표정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세이지의 생각을 알리겠다는 강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성우는 그런 최석영의 표정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캬~”
이성우의 감탄사를 마치 들은 것처럼 잠시 시간을 둔 최석영은 감탄사가 사그라들 때쯤 입을 열었다.
-세이지증권은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겁니다. 회사를 이전한다는 소문은 거짓된 것입니다. 본사 이전은 없을 거라는 말을 확실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석영의 말에 이성우가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러자 한진영이 이번에도 손을 까닥였다.
“다 봤지? 일어나.”
“굳이 저 말을 저렇게 비장하게 해야 하는 거냐?”
이성우가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한진영은 웃으며 손가락으로 조금 전까지 이성우가 바라보던 화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앵커가 감동한 표정으로 최석영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존재 때문에 외유를 나가야 했던 한진영 사장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도 홀로 지난 시장의 붕괴를 막아내셨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가슴이 저리기까지 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런 의도로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의도가 그렇지 않았더라도 결과가 그렇다면 저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앵커의 말에 최석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앵커는 그런 최석영을 바라보고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외유 중에도 엄청난 계약을 진행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세이지증권을 통해 돈을 빨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앵커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최석영을 바라봤다.
마치 최석영의 피곤한 얼굴 속에서 한진영을 보고 싶다는 듯이 아련한 눈빛을 내뿜는 앵커는 습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외 이전을 하지 않으신다고요? 얼마나 대한민국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이렇게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해외 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부당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성우는 앵커의 말에 기겁하고는 보고 있던 TV의 전원을 꺼버렸다.
“으아~”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리저리 꼬아낸 이성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저거 네가 시킨 거냐?”
“내가 시킨 건 아니지만 보고는 받았지.”
“보고 받았다면…… 방송사에서 알아서 저런 거야?”
“그게 화면이 예쁘게 나온다고 하더라.”
“아우~”
이성우는 참기 어렵다는 듯이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한진영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휘둘렀다.
“볼만한 건 다 봤으니 이제 그만 가자.”
“사람들이 저거 좋아한다고 그런 거야?”
“그렇겠지? 어쨌든 실제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한진영이 방송이 나오는 화면 옆에 보조 모니터에 나오는 실시간 반응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방송에 이어 나오는 실시간 기사들과 거기에 따른 인터넷 여론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론과 함께 주가 추이도 그려지고 있었다.
최석영의 발언 이후 세이지증권 이전 이야기로 하락했던 주식들이 모두 급등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진영은 반응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우리가 해외 이전을 하지 않는다니 다들 좋아하고 있네. 주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고…… 우리 떠난다고 했을 때 빠져 내렸던 너희 회사 주식도 오르고 있는 것을 보면 너희한테도 좋은 일인 것 같은데?”
이성우는 실제 반응을 확인하고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움켜쥐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난 아니다. 너 불러들이라는 여론도 계속 올라오고 있는데? 너 이대로 계속 놔두어야겠냐고 말이야. 이러다가 너 정치하라고 하게 생겼다. 너 대통령 되는 거 아니야?”
“그건 먼 훗날 이야기니까 신경 꺼.”
“왜 먼 훗날이야? 지금 당장 나온다고 하면 네가 대통령이 될 거 같은데?”
“만 40세가 넘어야 후보로 나갈 수 있어. 그러니까 쓸데없는데 신경 쓸 생각 말고 빨리 나와. 안 나오면 너 빼고 갈 테니까.”
한진영이 계속 뭉그적거리다가는 혼자 가겠다며 몸을 돌리자 이성우가 급히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가야지. 너 아니면 꿈도 못 꾸는 곳인데 안 가면 섭섭하지.”
이성우는 오히려 앞장까지 서며 어서 가자는 듯이 앞서 나갔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고개 돌려 한진영에게 물었다.
“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상장해라. 너희 회사 상장조건 충족시키는 건 일도 아니잖아.”
“나도 염두에 두고 있어.”
“그래. 잘했어. 상장하고 코스피에서 거래가 되면…….”
“상장하면 코스피는 아니야.”
“어?”
당연히 상장된다면 코스피를 생각하고 있던 이성우는 상장하게 된다면 코스피는 아니라는 한진영의 말에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진영은 멈춰선 이성우의 팔을 잡아끌며 이야기했다.
“회사는 이전할 생각이 없어. 하지만 상장은 코스피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할 거야.”
“다른 곳이라니? 어디에서 할 생각인데?”
“여기.”
한진영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내가 여기에 계속 자리하고 있는 이유가 뭐겠냐? 테라 일까지 마무리되었는데도 왜 돌아가지 않겠어? 사람들이야 최순옥에게 찍혀 외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닌 거 너는 알잖아.”
“알지. 그러면 상장까지도 염두에 두고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당연하지. 내가 생각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코스피가 아니라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해야 해. 그래서 오늘 같은 귀찮은 자리에도 가려는 거고…….”
말을 하던 한진영은 시간을 확인하고 이성우를 잡아끌었다.
“어서 가자. 이러다 늦겠다. 너무 여유 부렸어.”
이성우는 어서 가자는 말에 더는 계속 묻지 못했다.
한진영과 함께 가려는 곳은 늦으면 안 되는 곳이었기에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약속 장소로 향했다.
***
한진영이 사는 콘도에서 길을 따라 10여 분 더 내려가면 마찬가지로 최고급 주거시설이 센트럴 파크를 끼고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오늘 뉴욕 증권거래소가 주최하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블랙문의 릭 앤더슨이 이제 막 도착한 한진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쪽 분이 한국의 기풍그룹의 후계자입니까?”
“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기풍의 이성우라고 합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소개에 릭 앤더슨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릭 앤더슨은 이성우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말했다.
“이제 한배를 탄 사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성우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인사하자 릭 앤더슨은 손을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 한진영을 돌아보고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한 사장님을 보고 싶다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저를요?”
“모두 한 사장님이 미국에 진출할 때 큰 도움을 줄 친구들입니다.”
릭 앤더슨은 한진영을 향해 웃으며 팔을 잡아당겼다.
“저는 약속을 했으면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저를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단순히 미국 진출할 때 몇 번 이야기만 해주는 것을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저는 밀어주면 확실히 밀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한 사장님을 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 또한 지금 이런 자리를 더욱 좋아할 겁니다. 블랙문의 말을 듣고 판단하기보다 이렇게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을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니까요.”
릭 앤더슨이 한진영을 향해 부담 가지지 말라는 말을 건네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진영은 릭 앤더슨의 말에도 긴장이 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성우는 릭 앤더슨과 한진영의 말을 뒤에서 들으며 조지훈의 옆구리를 찔렀다.
“최 이사님이 누구한테 연기를 배웠나 했더니 진영이한테 배웠나 보다. 오스카 남우주연상 못지않아.”
이성우의 말에 조지훈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한진영이 이곳에 걸어오며 이성우에게 말했었다.
“파티장에 가며 미국 월가의 난다긴다하는 사람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 할 거야. 순수하게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를 통해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 나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할만한지 확인해보고 싶은 사람 등등 많은 사람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 거야.”
한진영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블랙문을 통해 연출 될 거라는 것도 예상하던 한진영이었다.
그랬음에도 한진영은 블랙문의 릭 앤더슨 CIO 앞에 당황한 듯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흔든 뒤 조용히 뒤를 따랐다.
릭 앤더슨은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민 머리의 60대 남성을 제일 먼저 소개했다.
“이쪽은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 CEO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샴페인 잔을 든 채로 릭 앤더슨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한진영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로이드라고 불러주십시오.”
“블랭크페인 씨의 명성은 제가 학생 때부터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다른 사람들이 다 저를 나이 먹은 늙은이로 생각할 겁니다.”
로이드 블랭크페인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한진영도 로이드 블랭크페인의 농담에 함께 웃고는 가벼운 말을 한마디 더 던졌다.
“늙은이라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만큼 유명한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라는 뜻으로 이야기 한 겁니다. 앞으로 많은 조언과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흥미로운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 이야기 듣고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흥미가 생겼다.
“최근 가장 이름을 높이고 있는 세이지의 한 사장님입니까?”
“네.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피고는 마치 조심하라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여기 미스터 한을 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테라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이 많거든요.”
한진영의 반응을 보기 위한 로이드 블랭크페인의 농담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로이드 블랭크페인의 농담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했다.
“테라로 인해 피해를 받으셨다고 하더라도 저에게 화를 내실 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자신이 내린 판단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지우는 사람은 이곳에 초대받지 못했을 게 분명할 테니까요.”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로이드 블랭크페인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테라 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이곳에 초대받지 못할 정도로 이곳의 수준이 높지 않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반대로 자기에게 시비를 걸게 된다면 시비를 거는 사람과 이곳의 수준이 단번에 격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돌려 이야기하기도 한 말이었다.
단순한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생각하게 만드는 말을 단숨에 내뱉는 모습에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