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정치란 가장 먼 사람부터 제거해 나가는 것
뉴스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는 방송과 시사 방송까지 모든 광고 시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까만 화면과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세이지증권이라는 글자만 나온 광고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광고는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리밍 사이트와 검색 사이트 그리고 유머 게시판이 즐비한 사이트 등 카테고리를 가리지 않은 채 무차별 폭격을 하듯이 광고가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이런 광고는 길거리를 걸을 때조차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전광판과 벽보는 물론이고 버스와 택시 등등 광고가 붙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세이지증권이라는 글자와 티저 광고로 보이는 것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사람들은 슬슬 도대체 세이지증권이 뭘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얼굴로 광고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진영이 지시한 대로 돈 생각하지 말고 모든 곳에 광고를 뿌리라고 이야기하는 사이 세이지증권으로 정치권에서의 연락이 들어왔다.
거대 양당은 물론이고 중소 당에서까지 한진영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온 것이었다.
한진영은 조지훈이 가지고 온 당 이름이 적힌 쪽지를 살핀 뒤 그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와 약속 잡아.”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조지훈의 질문에 한진영은 나머지 당 이름을 살핀 뒤 한 곳 이름이 적힌 종이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나머지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여기는…… 마냥 무시할 수는 없지. 좋게 거부하는 거로 이야기해.”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조지훈은 한진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종이 위에 적혀진 당 이름을 보고 이야기했다.
“저쪽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시간으로 약속 시간을 잡아서 저쪽에서 자연스럽게 거절하게 만드는 건 어떨까요?”
“그런 시간도 있어?”
한진영이 재미있다는 듯이 조지훈을 올려다보자 조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을 다니며 유세를 진행할 계획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번 주에 만나자는 것이고요. 그러니 이번 주는 힘들고 다음 주에 만나자고 한다면 저쪽에서 먼저 시간이 안 된다고 이야기할 게 분명합니다.”
“그래도 이번 주에 보자고 한다면? 혹은 다다음 주에 보자고 한다면 어쩔 생각인데?”
“그렇게까지 시간을 바꿔가며 만나자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진영은 자신 있게 말하는 조지훈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물었다.
“왜 그렇게 자신하지?”
“만나자는 연락을 해올 때 절실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 당이 만나자고 하니 그냥 따라 만나자고 했나 보구나.”
“네. 그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시간이 맞지 않으면 다른 시간을 잡아서라도 만날 정도로 의욕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번 주는?”
“이번 주에 만나자고 하는 건…….”
조지훈은 한진영의 질문에 처음 약속을 잡으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당명으로 시선을 돌린 뒤 대답했다.
“이곳과의 약속을 다음 주로 잡으면 이번 주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또 왜 그렇지?”
“애초에 우리와의 만남 자체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라 이곳이 우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한 것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곳보다 먼저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릴 것이 분명합니다.”
한진영의 계속된 질문에도 조지훈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모습이 한진영은 조지훈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조 실장도 많이 성장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 조 실장을 졸업식장에서 데리고 올 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는 뜻이야.”
“감사합니다.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해. 정말 대단해.”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과거와도 다른 그의 모습을 보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실감했다.
과거에도 한진영과 호흡이 잘 맞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믿을만한 존재이기에 그를 다시 데리고 오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성장하는 모습을 보일 줄은 한진영도 예상하지 못했다.
과거보다 회사가 더 커지고 하는 일이 조금 더 방대해졌으며 만나는 사람들의 위치가 다른 것이 그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된 것처럼 보였다.
지금의 조지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한진영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이제는 조지훈이 있기에 한진영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진영은 진심으로 조지훈의 모습에 감탄하며 손으로 조금 전까지 짚고 있던 종이를 밀어내고 말했다.
“조 실장이 알아서 시간 잡아.”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자기를 믿고 맡겨주자 한진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한진영을 위한 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조지훈이 이야기한 대로 각 당에 회신을 보내자 즉각 반응이 나왔다.
얼마 전까지 여당이었던 곳은 한진영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조지훈의 말대로였다.
한진영과 최순옥 사이의 이야기가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잊힌 것이 아니기에 한진영을 만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진영에 대한 관심도 상대측보다 덜했다.
애송이의 껍질은 벗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한진영이 자기들에게 큰 도움을 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 눈에 한진영은 어려 보이기만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한진영에게 만나자고 이야기한 것은 조지훈의 생각대로 야당이었던 곳이 한진영을 향해 먼저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야당이었던 곳이 만나는 데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반발심이 한진영과의 만남을 진행하게 했다.
그래서 다음 주에 만나자는 말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럼 다음에 만나자는 말을 세이지증권에 건넸다.
만나자는 말을 한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그들은 이번 주에 만나자는 제안조차 하지 않은 것이었다.
***
세이지증권 본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야당 당사에 한진영이 도착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당사 입구에 자리한 안내원이 한진영과 조지훈 그리고 한진영을 수행하는 비서들을 바라보고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수행비서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려 할 때 대선캠프의 선대 본부장이 호들갑스러운 표정으로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안내원은 선대 본부장의 등장에 뒤로 물러나며 누구이길래 한창 바쁜 선대 본부장이 직접 찾아온 것인지 궁금한 눈으로 한진영 일행을 살폈다.
그리고 눈에 익은 사람을 발견하고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을 여기까지 오시라고 한 것도 모자라 제가 늦기까지 했네요.”
육중한 몸을 자랑하는 선대 본부장인 강선호 의원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한진영을 바라봤다.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실물이 훨씬 낫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진영은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강선호를 바라보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몸이 어디 안 좋아 보이십니다.”
“아닙니다. 늦었을까 걱정하여 조금 서둘렀더니 그런 겁니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한진영은 서둘러 봤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게 전부였을 강선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안내하는 강선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당사 내부는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바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대선의 열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많이 어수선하지요?”
“아닙니다. 오히려 바쁜데 저희가 찾아와서 번잡스럽게 하는 건 아닌가 걱정입니다.”
“그럴 리가요. 저희가 먼저 뵙자고 했는데요.”
강선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고 손수건으로 다시 한번 땀을 닦아냈다.
땀으로 와이셔츠 뒤편이 흠뻑 젖어갈 정도로 열심히 안내한 강선호는 그래도 다른 곳보다 조용하게 느껴지는 방 앞으로 한진영을 안내했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뒤 한진영에게 말했다.
“여기입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후보님께서 오실 겁니다. 저기 나머지 분들은…….”
“아, 네.”
한진영은 강선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조지훈을 바라보고 지시했다.
“조 실장. 잠시 밖에서 대기해.”
“네. 알겠습니다.”
강선호는 단번에 알아듣는 한진영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지금까지 대선후보와 독대했던 경제인 중에 홀로 들어가라는 말을 순순히 받아주는 사람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제가 후보님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강선호가 인사하고 다시 한번 땀을 흘리며 왔던 곳을 되짚어 나갔다.
한진영은 그런 강선호의 뒷모습을 보고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진영이 기다리는 방 안은 책상과 의자만 구비되어 단출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벽을 치장하는 그림 한 장 없는 방안은 당사를 옮기자마자 예상치 못한 큰 행사에 정신이 없는 야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덜컥.
한진영이 자그마한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사이 문이 열리고 강선호와 익숙한 얼굴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와이셔츠 팔을 걷어붙인 모습으로 등장한 남자는 한진영을 향해 기운차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이지증권의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한진영 사장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서규철이라고 합니다.”
서글서글한 외모의 남자는 염색하지 않은 하얀 머리를 한 채로 한진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유명하신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로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앉아서 이야기하실까요?”
서규철이 앉을 것을 권하자 한진영은 의자를 빼고 서규철의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서규철은 긴장하는 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한진영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는 한진영의 뒤를 이어 자리에 앉았다.
강선호는 서규철과 한진영이 모두 자리에 앉자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오늘은 독대의 자리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것이 서규철의 지시였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닫히는 문을 바라본 뒤 서규철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서규철은 한진영의 말에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한 사장님을 이곳으로 오라고 한 이유를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저를 대선캠프에 영입하기 위해 부르신 것 아니십니까?”
“저희 행동이 그렇게 티가 나던가요?”
“티가 났다기보다는 지금 타이밍에 저를 부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으니 알아보기 쉬웠습니다.”
“이런…… 대선에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서규철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그의 모습이 괜한 엄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여론조사에서 더블 스코어 이상의 차이를 보여 천재지변급의 일이 터지지 않는 한 대선의 승자로 서규철이 될 거라는 것은 이성우의 딸조차 알 정도였기 때문이다.
대선 투표는 그야말로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차기 대통령은 바로 눈앞의 서규철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지난 경험을 통해 한진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진영이 서규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저는 주식쟁이입니다. 돈 버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하는 사람입니다.”
한진영의 노골적인 말에 서규철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기 앞에서 솔직하다 못해 이렇게 세속적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사람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의 서규철을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제가 대선캠프에 합류하면 앞으로 어떤 구설수에 오르내릴지 저는 물론이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게 결코 후보님께 좋은 영향으로 다가오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저는 합류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위해서요?”
“아니요. 저를 위해서입니다.”
한진영은 가슴을 살짝 오른손으로 두드리고는 말했다.
“후보님께 누가 되는 이야기가 돌아다니면 후보님께서는 저를 쳐내실 테니까요.”
“저는 그렇게 의리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후보님께서는 그러시겠지만 지금 밖에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강 의원님을 비롯하여 다른 분들 모두 의리로 저를 지켜줄 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강력하게 후보님을 압박한다면 저와의 의리만큼이나 그분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저울에 저를 올려놓으시겠지요.”
“저울에 올려놓고 의리가 작은 사람을 내친다?”
“정치란 게 그런 것 아닙니까? 가장 먼 사람부터 제거해 나가는 것 말입니다.”
“하하하.”
서규철은 한진영의 말에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선호가 서규철의 지시도 잊은 채 살짝 문을 열었을 정도였다.
서규철은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는 웃음소리를 멈췄다.
그러자 문이 다시 닫혔고 서규철은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치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데 차라리 본격적으로 정치를 할 생각이 없습니까? 경제인 분 중에서도 정치로 자리를 옮기신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당에도 몇 분 계시고요. 제가 공천권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몇 마디 말은 해줄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후보님께서 말을 해주시는 것이 공천권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뽑은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당선이 되도록 당 차원에서의 지원이 들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은 서로 멀수록 좋다는 게 제 신념이니까요.”
“대화하면 할수록 탐이 납니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실에 제안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청와대에 입성한다면 경제특보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특보는 자리에 메어있지 않습니다. 가끔 청와대에 오셔서 오찬이나 하면서 저와 대화하시면 됩니다. 이것도 싫으십니까?”
“네. 그 자리도 제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서규철은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싫다고 하는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처음부터 제가 무슨 제안을 하든지 간에 거절할 생각으로 오신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네. 후보님께서 하시는 제안은 모두 거절할 생각입니다.”
서규철은 한진영의 말에 화가 날 법도 하건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럼 왜 오신 겁니까? 거절하실 생각이었다면 우리 쪽에서 연락이 들어갔을 때 만나는 것을 거절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제안을 듣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한가지 정보를 알려드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정보요?”
서규철은 한진영의 말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한진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