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다음에 만났을 때 지금과 똑같을지 기대하겠다
한진영과 조지훈이 탄 차는 한남동으로 향했다.
고급 빌라 주차장에 도착한 한진영은 차에서 내려 주차장을 살피고는 웃었다.
“여기서 보자고 했다고?”
“네.”
조지훈도 빌라에서 만나는 것이 어색했던지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저도 이상해서 몇 번이나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자기들이 자주 사용하는 사무실이 있다고 그곳으로 오면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무실이라고?”
고급빌라를 사무실이라고 이야기하는 삼선그룹의 모습에 한진영은 가볍게 웃었다.
삼선그룹이기에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지훈을 돌아봤다.
조지훈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유리문 앞에 선 조지훈은 삼선전자 측으로 받은 번호를 눌러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또 다른 번호를 눌러 엘리베이터 버튼이 작동되도록 했다.
뒤에서 이런 조지훈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진영은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나도 여기에 집 한 채 살까?”
“집이요?”
비밀번호가 적혀있던 종이를 찢어 주머니에 넣은 조지훈은 한진영을 향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물었다.
한진영은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올려다보고 대답했다.
“처음에 고급빌라를 이런 식으로 사용한다기에 이상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곳에서 미팅을 잡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서 말이야. 맨날 음식점이나 술집 같은 곳에서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여기가 더 안전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어쨌든 내 구역에 있는 곳이라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잖아. 보안도 누구나 들락날락하는 음식점보다 훨씬 좋은 것 같고…….”
한진영은 열린 문을 통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역시 삼선그룹이야. 머리 잘 썼어.”
조지훈은 한진영의 감탄 소리를 들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삼선 측에서 오라고 하는 5층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총 5층으로 되어 있는 빌라의 한 층을 온전히 다 쓰는 삼선 측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진영과 조지훈이 등장하자 삼선의 비서실 직원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세이지증권입니다.”
“부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이미 언론과 방송을 통해 한진영의 얼굴은 널리 알려졌기에 부회장 비서는 한진영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은 채 그대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한진영과 조지훈은 비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며 빌라 내부를 살폈다.
복층으로 되어있는 빌라는 가정집 분위기가 아닌 사무실 분위기를 물씬 보여주고 있었다.
삼선이 어째서 빌라를 사무실이라고 이야기 한 것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곳입니다.”
거실을 지나 방 앞에 선 부회장 비서는 문을 가리키고 삼선그룹 부회장이 이곳에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한진영이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뒤 문을 노크했다.
똑똑.
“안으로 모셔.”
방 안에서 지시가 나오자 부회장 비서는 문을 열고 한진영에게 들어갈 것을 권했다.
“잠시 기다려.”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밖에서 기다릴 것을 지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방으로 나온 듯한 방안은 누가 보더라도 집무실 같이 꾸며져 있었다.
집무실용 책상과 책꽂이 그리고 방안의 인테리어 등이 이곳을 자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먼저 앉으세요.”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확인하던 삼선 부회장은 회의용 책상을 가리키고 한진영에게 먼저 앉을 것을 권했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용 탁자로 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한진영이 자리에 앉자 조금 전 방 앞에까지 한진영을 안내해줬던 비서가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한진영은 차를 내준 비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가만히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부회장이 자리로 오기를 기다렸다.
금방 자리로 올 것 같았던 부회장은 10여 분이 흐르는 동안에도 책상에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할 일이 많은 것처럼 서류를 이것저것 확인하며 바쁘게 펜을 움직였다.
부회장이 책상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듯이 한진영도 회의용 탁자에 앉아 창밖만 계속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대화도 하지 않은 채 10여 분을 더 보냈다.
한진영이 방에 들어온 지 20분이 흐르자 한진영 앞에 놓여 있던 차도 모두 식어 버리고 말았다.
한진영은 뜨거운 차가 차가운 차가 되는 시간 동안 조금씩 마시던 것을 마지막에는 단숨에 들이키고 차를 찻잔에 놓았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부회장은 시계를 보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책상 앞에 앉아있던 부회장은 깜짝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아직도 계셨습니까?”
마치 왜 나가지 않았느냐는 듯한 물음에 한진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차 잘 마셔서 일어나려던 참이었습니다.”
한진영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부회장을 향해 인사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부회장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원래는 하지 않으려던 말을 한진영에게 내뱉었다.
“일본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부회장을 향해 시시콜콜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상대가 마음이 없는 것에 굳이 그를 붙잡고 감정을 소모해가며 에너지를 쏟을 생각이 없던 것이었다.
“잘 쉬었다 갑니다.”
한진영이 인사하고 몸을 돌려 문을 나왔다.
뒤에서 한진영을 잡는 소리도 그렇다고 잘 가라는 인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따가운 눈빛만 한진영의 뒤통수에 느껴질 뿐이었다.
한진영은 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 조지훈을 향해 손짓했다.
“가자.”
부회장 비서는 별말 없이 나온 한진영의 표정을 조심히 살폈다.
그는 부회장이 한진영을 앉혀놓고 말도 걸지 않은 채 시간만 보낼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진영이 화가 난 채로 방 안에서 소리를 지른다면 뛰어 들어갈 준비를 한 채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방에서 나온 한진영의 표정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너무나 이상하기만 했다.
당황해하는 부회장 비서의 표정을 본 조지훈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안에서 이야기가 잘 안되셨습니까?”
“잘 안 됐다? 잘 되고 안 되고 이야기할 것도 없었어. 대화를 나누지를 않았으니까.”
“네? 들어가신 지 20분이 지나셨는데요? 그런데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다고요?”
한진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잠시 뒤를 돌아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아니. 너무 쉽게 생각했어.”
“그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삼선그룹이 어떻게 생겨나고 그룹이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간과했어. 내 잘못이야.”
한진영은 자기의 실책을 탓하며 차에 올라탔다.
조지훈은 조수석에 앉고는 몸을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김 기사에게 차를 몰 것을 지시하고 조지훈에게 이야기했다.
“서 후보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거야. 그리고 이야기를 들었다면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할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누가 말씀이십니까? 설마 삼선 부회장이 서 후보에게 이야기를 듣고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 겁니까?”
“그랬으니 나에게 질문 하나 던지지 않았겠지?”
“그럼…… 삼선도 이번 일에 동조한 공범인 건가요?”
한진영은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공범은 아닐 거야.”
지난 시절 분명 삼선도 원재료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원재료를 구했던 걸 기억하고 있는 한진영이었다.
물론 그들이 연극을 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미리 원재료를 확보한 상태에서 구하지 못해 생산에 어려움을 겪는 거짓된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남몰래 즐겼을지도 몰랐다.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거라는 이야기만으로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는 모습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래도 혹시 모를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오너가 쓰러진 상태에서 그런 모험을 벌일 리가 없어.”
“아~ 맞네요. 지금 삼선 오너인 회장이 쓰러진 상태에서 리스크 있는 행동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네요.”
“그래. 지금은 그룹 내부를 수습해야 하는 상황인데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친다? 그러지는 않을 거야. 부회장이 그 정도로 배포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면 왜 만났는데 말도 걸지 않은 건가요?”
“나보다는 일본을 더 믿어서겠지.”
“서 후보도 믿지 않고요?”
“그거야 내 말에 홀렸다거나 아니면 나에게 큰 투자금을 받아 연락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잖아.”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의 정치헌금은 평소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는 했다.
특히 지금같이 계획되어 있던 것이 아닌 급히 치르는 선거의 경우에는 그 힘이 더 강했다.
그래서 삼선 측에서는 세이지증권의 돈에 서규철이 움직였다고 생각했고 한진영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었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기에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사장님.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삼선이 도와주지 않으면 일본의 농간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조지훈의 눈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자칫 준비했던 일들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의 표정은 이곳에 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듯한 홀가분한 표정까지 지을 정도로 한진영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따로 생각해두신 게 있으시나요?”
“당연히 있지.”
“어떤 건가요?”
“어떤 거긴? 우리나라에 반도체를 만드는 게 삼선전자만이 아니잖아.”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그제야 깨달았다.
한진영은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조지훈을 향해 지시했다.
“동 상무 아니 지금은 동 부사장이던가?”
“네. 부사장으로 올라갔습니다.”
“동우산 부사장에게 이야기해. 한번 보고 싶다고 말이야.”
“최대일 회장이 아니라 동 부사장과 약속을 잡으시는 겁니까?”
“잊었어?”
한진영은 오른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말했다.
“최대일 회장을 직접 만나는 것보다 동 부사장을 이용하는 편이 최대일 회장에게는 더 잘 먹힌다는 거 말이야.”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늘은 한마디도 제대로 말을 걸지 않던 삼선 부회장이 다음에 만났을 때 어떤 모습으로 자기를 대할지 상상하며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
세이지증권이 발표한 증권 앱은 돌풍을 일으켰다.
출시 한 달 만에 천만 다운로드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가입자 500만이라는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빠른 매매 환경과 단순한 UI는 젊은 사람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모두 편하게 매매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수수료 무료와 로그인 없이 실행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시스템은 접근성을 높여주어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것과 달리 동종업계에서는 세이지증권이 앱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수수료 무료라는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으며, 로그인 없이 실행시킬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다만 출시 후 그들도 사용해보며 느낀 빠른 속도와 단순한 화면 구성에는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였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세이지증권이 출시한 앱은 모순덩어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이지증권이 최근 놀랄만한 실적을 올리고 있다지만 수수료 무료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게 첫 번째 근거였다.
상장사가 아니기에 과감하게 결정한 것이지 만약 상장사였다면 주주들의 등쌀에 시도도 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수수료 무료는 모험과도 같은 선택이었다.
로그인 없는 사용환경도 그들의 눈에는 어설픈 선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그인 없이 누구나 들어와 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을 생각한다면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은 거의 없고 오히려 큰 마이너스만이 남아 세이지증권을 압박하리라는 것이 업계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동종업계의 사람들은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 하고 있지만 오래되지 않아 큰 손해를 보고 모두 철수하든가 아니면 기능의 축소 혹은 광고를 비롯하여 돈이 될만한 무언가를 덕지덕지 붙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한다는 것은 그들 머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업계의 반응만큼 사람들의 걱정도 크게 불거졌다.
써보니 너무 좋고 너무 편한 만큼 과거의 다른 곳들과 달리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과거 대부분의 회사가 이렇게 얻은 관심을 이용하여 수익 창출에 나섰던 것을 떠올리며 세이지증권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앱을 지켜봤다.
그때 세이지증권에서 한가지 발표가 나왔다.
[세이지증권, 국내 주식 수수료 무료와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영구적으로 지속하겠다고 약속. 오히려 이달부터 한 달간 해외주식의 수수료 절반 이벤트를 실행하여 해외 주식에 대한 관심을 끌어 올리겠다고 발표]
세이지증권은 사람들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절대 수수료 무료를 바꾸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0.1% 수수료에 불과한 해외 주식의 경우에는 오히려 반값 할인 이벤트를 진행하여 0.05%라는 다른 증권사들이 따라오지 못할만한 수수료를 제시하여 고객들을 끌어당겼다.
세이지증권의 이와 같은 발표는 사람들에게 큰 어필을 하게 됐다.
타 증권사를 이용하던 사람들도 한 번쯤은 세이지증권의 앱을 사용해봤으며 그런 열 명의 사람 중 세 사람 정도는 증권사를 세이지증권으로 옮기는 선택을 할 정도였다.
세이지증권의 앱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결국, 세이지증권 앱은 출시 두 달 만에 업계 점유율 1위라는 기염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