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과거와 사이즈가 달라진다
한진영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조지훈에게 보고받았다.
“기업들에서 우리 앱에 광고를 넣을 수 없느냐는 제안이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홈 화면 상단에 위치한 배너에 넣어주는 조건으로 타사 대비 2배가 넘는 금액을 제안한 곳도 있었습니다.”
한진영은 짧게 피식하고 웃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안색을 잠시 살피고 보고를 계속 이어갔다.
“지시하신 대로 들어오는 제안은 모두 거절했습니다. 내부에서 펀드 수익률 창을 조금 더 크게 해달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거절했습니다.”
“잘했어. 아무리 의도가 있어 띄워놓는 거라고 하더라도 은은하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노골적인 것보다 훨씬 나니까.”
한진영은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조지훈을 향해 다음 보고를 지시했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펀드 출시는 어떻게 됐어?”
한진영의 이야기에 조지훈은 가지고 있던 태블릿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이미 출시한 인덱스 펀드와 가치투자 펀드 그리고 배당주 펀드 등은 모두 목표액을 달성하여 1차 판매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다음 달에 2차 판매가 예정되어 있고 2차 펀드도 조기 마감이 예상됩니다.”
“좋아. 그럼 우리의 주력은?”
“가칭 세이지증권 성장우선형 펀드의 출시가 다음 주로 잡혔습니다. 설정액은 현재 1차 5,000억, 2차 8,000억으로 2차 판매는 마감 뒤 30일 안에 출시할 예정이라고 조수아 부문장이 계획표를 제출했습니다.”
“1차 5,000에 2차 8,000이라…….”
한진영은 잠시 생각을 한 뒤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설정액을 늘리라고 해. 각각 30% 이상.”
“30% 이상이요?”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에 놀란 듯이 잠시 태블릿을 든 채로 오른편에 앉아있는 한진영을 빤히 바라봤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시선에 웃으며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적어.”
“아! 네. 죄송합니다.”
조지훈은 자기가 실수한 걸 깨닫고 급히 고개를 숙여 태블릿에 한진영이 말한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적어 넣으면서도 한진영을 살피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뭘 그렇게 눈치를 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이야기한 게 아니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말해.”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을 적어 넣는 것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설정액을 늘리는 것 말입니다.”
“어.”
“30%는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어서요.”
“하하하.”
한진영은 무슨 대단한 질문을 하나 싶어 조지훈을 쳐다보던 것을 멈추고 크게 웃었다.
한진영과 조지훈이 어떤 대화를 하든지 간에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김 기사조차 놀라 룸미러를 바라볼 정도로 한진영의 웃음소리는 컸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커다란 웃음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건가요?”
“아니야. 그럴 수 있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한진영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두드리며 조지훈을 향해 물었다.
“30%를 올리면 다 채우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솔직히 첫 번째는 가능해도 두 번째는…… 8,000억에서 30%를 올리면 조 단위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도 총설정액이 아닌 2차 설정액만으로 조 단위인 거죠. 어찌어찌 설정액을 다 모을 수 있다고 해도 마감이 늦게 된다면 3차나 4차 혹은 차수를 나누어 가입자를 모집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됩니다.”
“맞아. 마감을 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차수를 정해 가입자를 받는다는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고 마는 거지.”
한진영이 자기 말에 동의하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걱정이 된 조지훈은 한진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항상 이때쯤 ‘그러나’라는 말과 함께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래. 총액 2조에서 3조까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야.”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2조에서 3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가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멍한 표정의 조지훈을 바라보고는 멈춰 선 차에서 내렸다.
지난번에도 찾아왔던 동우산의 오피스텔 앞에 차가 멈춰 선 것이었다.
한진영은 다급히 차에서 내려 곁으로 다가온 조지훈의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익숙해져. 앞으로 우리가 진행하는 모든 사업의 사이즈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질 거야. 과거에 수천억을 모아 일을 진행했다면 이제부터는 무조건 조 단위 사업이야. 펀드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을 애타게 만들기 위해 차수를 구분한 것일 뿐 총액 규모로 2조에서 3조쯤은 우습게 모을 수 있어. 오히려 나는 차수를 구분한 덕분에 4조 가까이 자금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중이야.”
“4조라면 사장님께서 뉴욕으로 떠나기 전 우리의 자금 규모 아닙니까? 그걸 단번에 모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개인들에게요?”
과거에 한진영 같은 경우는 기업을 상대로 수천억의 투자금을 받아 펀드를 조성했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운용 자금의 규모를 늘릴 수 있었고 덕분에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개인들의 투자금을 아예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기업들의 투자금에 비하면 가벼운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 도착한 오피스텔의 박수무당이 모시는 기업인의 투자금 하나가 수천 명, 수만 명의 투자금을 합한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4조를 모으기 위해서는 1억을 투자하는 투자자 4만 명이 모여야만 했다.
개인 투자자가 펀드에 1억을 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투자자를 4만 명 모으는 일은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아는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이 꿈속의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었다.
2조에서 3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4조를 기대하고 있다.
조지훈은 한진영이 어떻게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진영의 말에 정신이 없는 조지훈은 어느새 동우산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한진영은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조지훈을 바라보고 벨이 있는 곳을 턱짓했다.
“눌러. 안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우선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이야기 들을 뒤로 밀어둔 채로 초인종을 누르려 할 때 안에서 문이 열리며 사람이 나왔다.
***
한진영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동우산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는 일반인도 봐주시는 겁니까?”
“아니. 뭐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동우산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한진영이 오기 전에 빨리 한 타임 받으려고 한 것이 일이 꼬여 한진영과 손님이 오피스텔 문 앞에서 마주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한진영이 동우산의 본 모습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우산이 어떤 사람인지 알리기도 전에 먼저 알고 온 사람이 한진영이었기에 동우산으로서 자기 신분이 한진영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다만, 약속해놓고 손님을 받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었다.
선강그룹의 부사장씩이나 돼서 외부 손님을 받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 보기에 썩 좋아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당황한 모습을 어떻게든 숨기려 하는 동우산을 바라보고 속으로 웃었다.
‘그래. 역시 예상대로 구나.’
동우산이 비록 그룹에서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섰지만, 자리의 견고함은 오히려 상무였을 때보다 못함을 알게 됐다.
그래서 살길을 찾기 위해 외부 손님을 받기 시작한 것이었고 그걸 한진영에게 들키고 만 것이었다.
한진영은 예상대로의 상황에 이야기를 편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하고 우선 동우산의 불안부터 풀어주는 말을 건넸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저도 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한진영의 뜻밖의 말에 자꾸 시선을 회피하던 동우산이 놀란 표정으로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도 봐달라는 말씀입니까?”
“네. 저도 봐주세요.”
한진영은 동우산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요새 진행하는 일이 많은데 일의 성패를 가늠하기 어려워 도움 좀 받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동우산은 조금 전까지 머쓱해 하던 모습을 어느새 지우고 한진영을 향해 바짝 다가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 그렇게 궁금하신 겁니까?”
동우산은 한진영을 데리고 지금이라도 당장 신이 모셔져 있는 신당으로 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한진영은 그런 동우산을 진정시켰다.
“그건 나중에 하도록 하고요.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이곳에 왔으니 그 이야기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진영의 입에서 중요한 일이라는 말이 나오자 들썩였던 동우산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중요하다는 일이 먼저라는 것을 동우산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겁니까?”
“요즘 하이식스는 어떤가요?”
“하이식스요?”
동우산은 중요한 일 이야기를 할 것 같던 한진영이 대뜸 하이식스부터 물어오자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뭐……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회사가 오랫동안 주인 없이 굴러갔던 만큼 체계를 다시 잡고 투자해서 수익을 뽑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지금은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게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인지 말은 하지 않고 질문만 던지는 한진영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동우산은 한진영의 질문에 최대한 성의껏 대답했다.
지난 시절의 좋은 기억이 아직 동우산의 머릿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회장님이요? 회장님의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하이식스에 대한 회장님의 생각이요. 예를 들어 투자해서 얻을 수익이 있으니 지금의 손해쯤은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괜히 인수해서 돈만 나가게 생겼다고 화가 나 있는지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 궁금하신 거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동우산은 이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타이밍이 좋지 못하십니다.”
“좋지 못하다고요?”
“네.”
동우산은 한진영에게만 말한다는 듯이 몸을 굽히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사장님만 아세요. 지금 회장님 분위기가 좋지 못해요. 그러니 투자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에 오시도록 하세요. 제가 따로 연락드릴 테니 말입니다.”
동우산의 말에 한진영이 오히려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분이 좋지 못하시다고요? 그거 잘됐네요.”
“잘 됐다고요?”
“네. 제가 회장님의 상태를 여쭌 건 다름이 아니라 회장님의 기분이 좋을까 걱정해서 물어본 거였습니다.”
“회장님의 상태가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걸 걱정하셨다고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동우산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상식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정신이 없어 보이는 동우산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자기가 왜 최대일 회장이 기분 나쁘기를 바랐는지 이야기했다.
“동 부사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곳에 찾아오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말입니다.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무언가 꺼림직한 것이 있어 답을 찾기를 바라는 분들이 오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그러니 잘된 일이지요. 모든 일이 원 하는 대로 흘러간다면 최 회장님이 동 부사장님을 찾겠습니까?”
“어…….”
동우산은 한진영의 그럴듯한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한진영을 향해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한진영의 뒤에서 대화를 듣던 조지훈은 누가 박수무당이고 누가 일반인인지 이 장면만 보고는 맞추는 사람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동우산은 한진영의 말에 흠뻑 빠진 상태로 한진영이 이끄는 대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멍한 표정의 동우산을 향해 짙게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답답함을 참지 못해 동 부사장님을 찾아오면 저를 만나보라고 하세요.”
“한 부사장님을요?”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동우산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몸을 급히 곧추세웠다.
“설마 방법이 있는 겁니까?”
“네. 있지요.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곳에 찾아온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 사장님이 오시면 항상 좋은 일만 있어서 기대하기는 했는데…… 그럴 줄 알았습니다.”
동우산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제가 아까 말을 하다 말았는데 하이식스 때문에 그룹 내부에서도 말이 많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 불편한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조금 전 입구에서 마주친…….”
동우산은 손을 들어 왼손과 오른손으로 문 앞에서 있었던 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이야기하겠다는 심정으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
“에이. 그냥 다 말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미래요?”
“네. 그룹에서 쫓겨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왜요? 회장님이 나가라고 하실까 봐 걱정하고 계셨던 겁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인수 초반에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은 것에 좋아하셨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그룹 내에서도 돈 먹는 하마라면서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세력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반도체라는 것이 그렇지요. 끊임없이 투자해야 하는 산업이라서 쉽지 않습니다.”
“알고 덤빈 건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하이식스를 인수하라고 이야기한 저부터 제일 먼저 목이 날아갈 테니 저도 저 살길을 준비하고 있어야지요.”
시원하게 자기의 처한 상황을 이야기한 동우산이었다.
한진영은 이야기를 마치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동우산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제가 그럼 잘 왔군요. 동 부사장님도 돕고 회장님도 도울 방법이 있으니 말입니다.”
동우산은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다시 기울였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조금 전보다 더욱 가까이 몸을 들이밀고 물었다.
“정말 방법이 있으신 거죠?”
“단번에 해결하기는 어렵지만 터닝포인트를 만들만한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회장님께서 하이식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시거든…… 저에게…… 아시죠? 지난번에 한 번 했으니 말입니다.”
“그럼요. 잘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동우산이 고개까지 숙여 한진영에게 부탁했다.
깜깜하기만 하던 미래에 한 줄기 희망이 보인 것 같은 상황에 저절로 한진영을 향해 부탁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동우산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고 조지훈은 이런 광경을 보며 확실히 한진영이 박수무당을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