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악순환을 끊어낼 기회를 주겠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한 채 한 시간여를 사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아우는 결혼 안 하나?”
“저야 아직 한창 일할 나이니까요.”
“그래도 일찍 결혼해야지. 남자는 안정감이 생겨야 사회생활 하는데 더 편해.”
최대일은 한진영을 향해 충고하고는 비어있는 자기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잠시 술잔을 내려본 뒤 조금 전 자기가 한 말을 고쳤다.
“아니다. 그냥 안 하는 게 좋다. 그게 훨씬 나아.”
최대일은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처럼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고 불편해하는 것보다 혼자인 게 훨씬 나.”
“형님께서는 행복하지 않으세요?”
한진영은 술병을 건네받아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넌지시 물었다.
최대일의 결혼생활이 어떤 상황이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 알면서도 물어본 질문이었다.
최대일은 한진영의 질문에 얼굴을 찌푸리고는 대답했다.
“행복? 나는 결혼생활 이후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어.”
“그래도 아드님과 따님까지 다복하지 않으십니까?”
“다복? 어쩔 수 없이 나으려다 보니 애를 낳은 거지 계획한 건 아니야.”
최대일은 아이들 이야기에 더 입맛이 썼던지 얼굴을 더욱 찌푸리고는 물었다.
“내가 누구랑 결혼했는지는 알지?”
한진영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최대일은 한진영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단숨에 술을 들이켠 뒤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보다 아버지가 원한 결혼이었어. 원래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결혼을 하고는 하지만…… 뭐 나도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결혼으로 인해 얻을 게 많다고 생각했으니 결혼을 승낙한 거지. 하지만 결혼생활이 이 정도로 지옥일 줄은 몰랐어. 자기 덕분에 회사가 이렇게까지 성장했으니 자기에게 지분이 있다고 말하는 여자부터 시작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처가, 특히 장모의 등쌀은…… 괴롭다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어.”
취기가 오른 것인지 한진영을 향해 처연한 말을 내뱉은 최대일은 술잔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제 겨우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데 30년 만에 와이프 노릇을 하려는 건 뭐야? 분명 돈 때문이야. 돈 달라고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거라고.”
최대일은 말을 하면 할수록 짜증이 몰려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진영은 그런 최대일을 가만히 바라보고 그가 모든 울분을 토해낼 수 있게 조용히 기다렸다.
이 울분이 끝이 나야 한진영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의 생각대로였다.
자기의 결혼생활의 우울함을 한참 쏟아낸 최대일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손을 들어 사과했다.
“미안하다. 형이 좀 우울해서 쓸데없는 말을 다 한 것 같다. 아우가 이해해.”
“그럼요. 형님이 이런 말을 저 아니면 누구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 말씀하시고 툭툭 터세요.”
술 먹는 것만 호쾌한 것이 아닌 한진영의 모습에 최대일은 물끄러미 한진영을 바라봤다.
“왜 너하고 이제야 형 동생을 하기로 한 건지 후회된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하거나 아니면 그전에 만나서 의형제를 맺을 걸 그랬어. 오히려 지금 와서 의형제를 맺은 게 아쉬울 지경이야.”
“다르게 생각하면 이제라도 의형제를 맺어 다행인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형님께서 저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하. 맞아. 아우 말이 맞아.”
최대일은 한진영의 긍정적인 말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내가 아우에게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우와 형 동생을 맺지 못했겠지?”
한진영의 말에 동의하며 잠시 혼잣말과 같은 말을 내뱉은 최대일은 한진영을 이곳에 부른 이유를 떠올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
한진영은 이제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려는 최대일을 가만히 바라봤다.
최대일은 감정을 가라앉힌 뒤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소연도 할 만큼 했고 한진영과 대화를 하며 분위기도 끌어올린 만큼 이제 제대로 이야기할 준비가 된 최대일이었다.
최대일은 한진영을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우님. 형이 아우님께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말씀하십시오. 형님이 저에게 못 할 말이 뭐 있겠습니까? 오늘 형님으로 모신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드릴 테니 이야기하세요. 무슨 일입니까?”
한진영의 말에 최대일이 부끄러운 기색을 뒤로 넘기고 한진영을 향해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우님 회사에서 이번에 펀드로 꽤 많은 금액을 모집했다고 들었네. 그리고 그 금액을 반도체 쪽에 쓰고 싶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네.”
한진영이 짧게 최대일의 말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일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다 부탁 이야기를 꺼냈다.
“그걸…… 우리 쪽에 투자하는 것은 어떤가?”
최대일은 어렵게 한진영을 향해 말을 꺼내고 술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기업 대 기업의 오너로서가 아닌 형과 아우 사이에 건네는 부탁으로 포장하여 던진 부탁이었건만 최대일은 말을 하고 나서도 부끄러움에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할 정도였다.
한진영은 최대일을 바라보고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회사가 많이 좋지 못합니까?”
“돈 먹는 하마야.”
최대일은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고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반도체는 투자를 멈추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지금까지 집어넣은 돈만 3조야. 3조. 그런데 그조차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어. 이러니 어쩌겠나? 이대로 계속 투자를 이어 하다가는 그룹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지경까지 갈지도 몰라.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다시 내놓고 싶은 심정이야.”
최대일은 속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이식스를 인수한 이후 일이 제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놈의 반도체 가격은 안정이라는 단어를 모르는지 매일매일 널뛰듯이 움직여. 그것도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말이야. 이 상태면 언제 적자 전환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야. 설비투자에 돈을 쏟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운영비에도 돈을 퍼부어야 할지 몰라. 완전 사기당했어. 그러니 채권단 놈들이 우리가 인수하겠다니 그리 좋아했던 거지.”
최대일은 사기당했다는 말을 몇 차례나 연거푸 내뱉었다.
그리고 억울했던지 이번에는 술이 아닌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타는 속의 갈증을 술만으로는 다스리기 어려웠던 듯했다.
한진영은 최대일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입을 열었다.
“결국 문제는 반도체 가격 때문이 아닙니까? 반도체 가격이 안정되고 거기서 수익이 난다면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뭐…… 그렇기야 하지.”
최대일이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최대일이 자기 말을 수긍하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반도체는 결제가 후불제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부분 고정거래 가격으로 정해진 가격에 맞춰 돈을 먼저 낸 뒤 물건을 받아 가는 시스템이죠.”
“그것도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고정거래 가격이 올라 받는 돈이 많아져 운영비를 쓰고도 돈이 남으면 그 돈으로 설비투자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모두 맞게 말한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려워 이렇게 한진영 앞에 최대일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시장이 안정된다면 반도체 가격은 우하향하여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공정이 개선되고 생산이 안정을 찾으면 나오는 물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에 항상 신기술을 개발하여 조금이라도 비쌀 때 팔아먹어야 살아남는 곳이 바로 반도체 시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 놓은 돈으로 또다시 다른 이들보다 한발 먼저 신공정을 손에 넣기 위해 투자를 해야 하는 것도 반도체 사업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하이식스는 그 사이클에서 잠시 이탈된 상태였다.
주인이 없는 상황에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기에 사이클에서 튕겨 나와 어려움이 더 컸던 것이었다.
최대일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한진영을 빤히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최대일 회장을 향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
“다른 사람에서 돈을 빌리면 그 또한 채무로 남아 회사를 압박하게 될 겁니다. 악순환의 고리가 끊기지 않는 것이죠. 이걸 끊어내야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내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일세. 설마 돈을 빌려주기 싫어 그러는 건가?”
최대일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하게 변하고 말았다.
자존심까지 버리고 한진영을 향해 부탁하는 자기의 모습이 우습게 보인 것만 같은 느낌에 최대일은 당장에라도 상을 엎어 버릴 것처럼 화를 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최대일의 모습에도 흔들리는 모습 하나 없이 자리에 앉아 반쯤 몸을 일으킨 최대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진영이 차갑게 가라앉은 모습을 보이자 최대일은 잠시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솔직한 대답을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돈 빌려주기 싫다면 빌려주기 싫다고 그냥 말해. 괜히 사람 놀리듯이 이상한 소리 할 생각일랑 하지 말고…….”
“이상한 소리가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한 말입니다.”
“진심? 무슨 진심?”
“악순환을 끊어낼 기회를 형님께 드리고 싶다는 진심. 그걸 몰라주시면 저야말로 섭섭합니다.”
“기회?”
최대일의 귀에 기회라는 말이 들렸다.
최대일은 한진영을 향해 눈을 찌푸리자 한진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삼선전자 부회장을 만났었습니다.”
“무용이를 만났다고?”
“네. 이 부회장을 만났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최대일의 찌푸리던 눈은 조금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최대일의 눈은 한진영을 옆으로 흘겨보는 중이었다.
한진영에게 토해내던 불만 섞인 마음이 아직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용이를 왜?”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기회라니? 나한테 주겠다는 그 기회를 말하는 건가?”
“네.”
한진영은 짧게 대답하고는 이무용 삼선전자 부회장에게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최대일 회장에게 이야기했다.
최대일 회장은 한진영의 말이 계속될수록 눈이 점점 커졌다.
한진영의 말대로라면 기회라는 한진영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한진영의 말을 듣던 최대일은 불만 섞인 말투로 이야기하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그게 정말이야?”
“제가 브릿지랜드와 홀리스를 소개했습니다. 정보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용이가 자네 말을 듣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최대일은 말을 한 뒤 바로 이야기하려는 한진영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잠깐! 변명을 하려거든 그러지 말게. 무용이에게 이야기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나에게 이야기한 것 알고 있으니까.”
“형님. 오늘 자리를 제가 마련한 건가요?”
한진영의 질문에 최대일은 손을 들어 올린 채로 그대로 멈췄다.
한진영은 그런 최대일의 모습에 가만히 웃고는 여전히 자기를 향해 보이는 손바닥에 술잔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이무용 부회장 그러니까 삼선그룹이 일본과의 관계가 어떤지 형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나도 알고 있기는 해. 지금 쓰러져 계시는 회장님이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을 정도로 일본과는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지.”
“그뿐입니까? 삼선그룹이 일본에서 밀수해서 돈을 번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뭐…… 그것도 맞는 말이야.”
최대일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한진영이 건넨 술잔에 술이 차는 것을 확인하고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삼선이 거절했다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거절을 한 것도 아니지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최대일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혼자서 생각하더니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한진영은 그런 최대일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는 기회라며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회의 타당성과 기회를 잡는 방법까지 다 이야기하는 사람이지요.”
“기회를 잡는 방법?”
“네.”
한진영은 잔을 채워 넣는 최대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일본이 반도체에 들어가는 불화수소를 움켜쥐고 반도체 산업을 흔들게 분명합니다. 그때 미리 확보한 불화수소를 숨겨두고 삼선전자의 죽는소리에 장단만 맞춰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반도체 가격에 단번에 숨통이 트이게 될 테니까요.”
“확실히 삼선전자가 타격을 받으면 반도체 가격이 고공행진을 할 게 분명해. 반도체 수급에도 문제가 되니 가격은 오르고 우리만 제대로 돌아간다면 시장점유율도 빼앗아 올 수 있어.”
“그렇기만 된다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번 기회를 통해 얻은 이익으로 선순환의 고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한진영은 술잔을 내밀어 최대일과 가볍게 건배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최대일의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어떻습니까? 형님. 이게 제 말대로 조금 더 근본적인 해결책 같지 않으십니까?”
“하하하. 그렇지. 맞아. 근본적인 해결책이 맞아.”
최대일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까지 보여주던 화난 표정은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한진영을 향해 의형제를 맺자고 했을 때의 그 표정으로 돌아와 있는 최대일이었다.
“역시 자네를 만나기를 잘했어. 동 부사장이 자네를…….”
자기도 모르게 점을 봤다는 얘기하려 했던 최대일은 급히 말을 멈췄다.
답답한 마음에 점을 쳐 동우산 부사장이 한진영을 만나라는 점괘가 나와서 한진영을 불렀다는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어색하게 말을 중간에 끊어낸 최대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색하지 않게 오히려 한진영이 최대일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네며 최대일의 마음속에 있는 마지막 불안감까지 지워줬다.
“이번 일은 우리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서 후보와 이야기도 마쳤습니다. 이번 일은 정부와 함께 진행하게 될 테니 회장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이 부회장과의 만남도 서 후보가 주선해주어 만난 자리였습니다.”
최대일은 한진영의 말에 얼굴이 한없이 밝아졌다.
이미 다음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큰 서 후보까지 이번 일에 엮여있다면 일이 그르치게 될 일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우님. 내 술 한잔 받게. 역시 내가 동생 하나는 제대로 둔 것 같아.”
최대일은 이제 나서서 자기 동생은 한진영이라고 말할 것처럼 한진영을 향해 친형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한진영과 최대일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즐겁게 술자리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