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답을 알고 있다고 해도 답안지에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세이지증권의 2차 펀드 판매도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모집 금액이 조 단위를 넘어갔던 만큼 판매하자마자 마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약 사흘간에 걸쳐 사람들의 관심 속에 모든 판매가 이루어졌다.
모두은행은 사흘 만에 펀드가 모두 판매가 된 것에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세이지증권 덕분에 모두은행의 신규계좌 개설 건수도 폭등했으며, 방문고객들 덕분에 오랜만에 지점 분위기도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모두은행의 은행장은 한진영과의 만남 자리에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기존 취급수수료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저희와 앞으로 3건의 펀드 판매 위탁계약을 맺어주십시오.”
파격적인 조건으로 모두은행이 세이지에 구애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다.
모두은행은 하나의 펀드를 팔아본 것만으로도 세이지증권의 파괴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사 증권사를 보유하여 모두증권의 여러 펀드를 판매하며 쌓은 경험이 세이지증권은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신호를 줬기 때문이다.
모두은행은 이런 신호에 즉각 반응했다.
민한은행처럼 쓸데없는 짓을 할 생각 없이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세이지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취급수수료 절반의 계약서를 내려다본 채 은행장을 향해 말했다.
“저희는 수수료에 크게 연연하는 회사가 아닙니다.”
은행장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표정을 굳혔다.
수수료를 다운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어진 한진영의 말에 모두은행 은행장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수수료는 그대로 진행해도 됩니다. 대신 판매 금액에 대한 결정권을 전적으로 저희에게 위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저희는 세이지증권이 원하는 걸 받아 파는 역할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설정액을 얼마로 잡으시건 그건 전적으로 세이지의 결정을 따르도록 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은행장은 한진영이 내일이면 마음이라도 바꿀까 걱정하여 바로 수수료 부분을 수정한 서류를 가지고 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서류가 오면 이 자리에서 바로 사인하고 계약을 진행하자고 한진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사실 펀드의 설정액은 취급하는 곳과 사전에 교감이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취급하는 곳에서의 입김에 의해 설정액이 바뀌는 것이 현재 펀드시장의 형태였다.
하지만 세이지증권의 한진영은 그런 주도권을 취급하는 곳에 주려 하지 않았다.
철저히 세이지증권의 주도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그걸 원해 모두은행에게 수수료 부분을 오히려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었다.
취급수수료로 300억의 돈을 지불하는 것보다 주도권을 가지는 편이 돈 이상의 값어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한진영이었다.
모두은행과 계약이 끝나자마자 모두은행 쪽에서 발표가 나왔다.
[세이지증권과 펀드 판매에 관한 독점계약 체결]
제한적인 펀드 판매권을 가졌음에도 모두은행은 그런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
세이지는 모두은행이 머리를 쓴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두은행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
모두은행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설정액 권한을 손에 넣은 만큼 모두은행의 행동은 귀여운 아이들의 장난으로 세이지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이지와 모두은행이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사이 가칭 세이지 성장형 펀드의 3차 판매가 예고됐다.
2차보다는 낮은 금액이었지만 화제의 펀드였던 만큼 관계자들의 예상보다는 높은 7,000억에 판매가 모두은행을 통해 조만간 개시가 될 것임을 알린 것이었다.
조지훈은 펀드 판매와 관련하여 한진영에게 보고했다.
“모두은행에서 예상한 판매 종료시점은 판매개시 후 6개월 뒤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앞에 것들보다 예상 종료 시점이 많이 뒤에 있네?”
”네. 아무래도 2차 판매 종료 후 바로 이어진 판매에 구매력이 1차와 2차 보다는 떨어졌을 것으로 예상한 게 판매 기간을 길게 잡은 이유로 보였습니다.”
“그렇겠지?”
한진영도 모두은행의 판단을 이해한다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차와 2차에 거액의 자금이 들어온 만큼 시중에 남아있는 구매력은 1차와 2차 때만 하지 못한 게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펀드의 수익률이 어떻게 나올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돈을 넣는 사람은 한정적일 거라는 것이 모두은행을 비롯한 관계자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한진영은 들고 있던 펜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말했다.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펀드에 돈을 넣으면 이득이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네?”
“네. 가장 1차원적이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높은 수익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판매종료 시점을 6개월이 아닌 조금 더 당겨 잡아도 될 것으로 상품개발본부에서는 판단했습니다.”
한진영은 간단한 해결법을 찾은 것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조지훈을 올려다봤다.
“그럼 뭐 간단하네.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 펀드의 높은 수익률을 보여주면 되는 거 아냐? 가입하면 돈을 벌 수 있다. 그걸 알려주면 된다는 이야기잖아.”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조지훈도 한진영이 찾은 답을 모르지는 않았다.
조지훈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자는 그게 답이라는 것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답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답안지에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익률을 올리는 일은 원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우물거리는 조지훈을 바라보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그렇게 정신 빼놓고 있어?”
“네?”
“돈 벌 방법을 알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돈 벌 방법이요?”
조지훈은 한진영이 하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이런 행동이 우습기만 한 건지 조지훈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운용본부로 가자.”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급히 차를 준비할 것을 지시한 후 한진영의 뒤를 쫓았다.
한진영은 당황한 조지훈을 뒤로한 채 느긋한 걸음으로 운용본부로 향했다.
***
한진영은 홍대민과 함께 건물을 둘러봤다.
프라임리츠에 이야기하여 모든 건물을 사용하기로 한 세이지증권은 이곳에 운용에 관한 모든 부서를 몰아 하나의 캠퍼스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유기적인 협력을 위해 전략실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혹시 모를 일에 대응하기 위해 IT센터 또한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의 다 됐네요.”
“네. 70% 이상 자리를 채웠고 나머지도 조만간 모두 채울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자리가 모자라지 않습니까?”
한진영은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살핀 뒤 홍대민에게 물었다.
협소하다고 느끼지 않은 공간이지만 운용 인력만 1,000명이 넘어가다 보니 이제는 이곳도 좁아 보였던 것이었다.
“프라임리츠에서 원한다면 블록 건너 빌딩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정확히 실측해야겠지만 이곳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보이는 규모더군요. 그곳까지 사용한다면 지금보다 공간이 넉넉할 것 같으니 원한다면 말씀만 하세요.”
원하면 말만 하라는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3년 안에 지금 있는 인력의 절반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또 다른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게 빨리 가능합니까?”
한진영은 홍대민의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4~5년은 줄어든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홍대민은 놀란 한진영의 표정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깨가 올라간 채로 지금 상황을 이야기했다.
“전략실에서 나온 알고리즘이 굉장합니다. 그리고 그걸 실제로 움직이는 프로그램 또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준이고요.”
“제가 봤을 때보다 업그레이드가 많이 됐나 봅니다.”
“네. 사장님께서 확인한 두 달 전과 비교한다면 천지개벽 수준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가 난 상태입니다.”
“그래요? 그 정도입니까?”
“네.”
홍대민은 믿기 어렵다는 한진영의 모습에 자신 있게 말하고는 계속 이야기했다.
“탄력이 붙어 나가는 정도가 굉장합니다. 특이점이라 부를만한 곳을 넘어서자 오히려 운용파트에서 따라가기 버겁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사람이 만져줘야 움직이는 것의 경우에는 올해 안에 운용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표로 했던 매매의 자동화의 경우에는 3년 안에 자리를 잡을 것으로 현재 파악한 상황입니다.”
홍대민은 한진영을 향해 보고하고 가슴을 활짝 폈다.
보고한 내용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모습에 가만히 미소를 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욕심부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만들어 팔았던 초단타매매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미국 SEC에서 불법으로 판단 내려 사용 금지를 때린 상황입니다. 여기에 또다시 컴퓨터가 매매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용한다고 하면 우리를 감시하는 눈초리가 따라붙게 될 겁니다. 그리고 뭐 하나라도 잘못하게 된다면 탈탈 털리게 될 테고요.”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살만한 기능들은 모두 삭제해 나가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욕심보다는 안정에 최우선으로 하여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홍대민의 대답에 한진영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3년. 좋습니다. 많은 부분이 컴퓨터로 자동화가 이루어진다면 필요로 하는 사람 또한 많이 줄어들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너무 자르지는 마세요. 인력을 키우기도 어려운데 키운 인력을 헌신짝처럼 버려서는 안 되니까요.”
사람을 자르지 못해 안달인 다른 곳들과 달리 대체하는 것을 확인하고도 자르지 말라는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사장이 가장 아까워하는 부분이 인건비였다.
그래서 한 명이라도 잘라낼 수 있다면 눈에 불을 켜고 이유를 만들어 자르려 했고,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사람을 자르는 것이 보통 사장의 마인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진영은 오히려 자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홍대민으로서는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다시 키우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시간은 돈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사장님. 필요한 사람을 억지로 자르는 것도 아니고 필요 없는 사람을 정리하는 건데…… 굳이 필요 없는 사람까지 데리고 갈 이유가 있는 건가요?”
건물을 모두 둘러보고 예전 대표실이자 지금은 본부장실로 사용하는 곳으로 향하는 한진영의 뒤를 따르며 홍대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진영은 뒤따라오는 홍대민을 슬쩍 돌아보고 말했다.
“일이 많아지면 그만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지니까요. 예를 들어 10조의 자금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사람 1,000명이 프로그램으로 300명으로 줄어들지만, 움직이는 자금이 100조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3,000명이 필요하겠네요.”
“맞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산수에 대답하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홍대민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자동화되어 운용 인력이 줄어들더라도 그보다 많은 돈을 움직이게 된다면 운용 인력은 더 필요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 말씀은…… 줄어드는 인원보다 움직이는 돈이 더 많아진다는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어떻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말하려던 홍대민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한진영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 안에 서서 한진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은 홍대민의 사무실로 사용하는 곳이었지만 한진영이 오래 써서 그런지 방 주인에 한진영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서 있는 홍대민에게 응접용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서 있는 홍대민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온 것이지요.”
한진영은 말을 하고는 다리를 꼰 채로 홍대민에게 어서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홍대민은 자기 사무실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손님인 것처럼 한진영 앞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눈으로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궁금증이 가득 담긴 홍대민의 눈빛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운용 금액을 계속 늘려갈 생각입니다. 펀드 자금을 계속 모집할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장 잘하는 분야인 기업자금 운용 파트도 계속 키워나갈 것이고요. 준비되면 연금 파트에도 진출할 생각입니다.”
한진영은 꼰 다리 위에 손을 올리고 무릎을 잡은 채로 말했다.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으니 바쁘게 움직인다면 시중에서 자금을 끌어오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올해 안으로 지금 우리가 움직이는 자금의 2배까지 늘릴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2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홍대민은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2차 펀드 판매까지 이루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하기에는 2배로 불리겠다는 것이 너무 큰 목표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홍대민이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펀드를 출시하고 자금이 급격하게 늘어나기는 했습니다. 아직 정리가 다 되지 않을 정도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금을 2배로 더 늘리겠다니 이해가 안 가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자금을 어떻게 끌어모을지 궁금하기도 할 테고요.”
“정말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자금을 두 배 늘리신다는 생각이십니까?”
“맞습니다.”
홍대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장님 현재 우리가 움직이는 자금이 약 8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2배라니요? 15조까지 자금을 늘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홍 본부장님. 그렇게 놀랄 필요 없습니다. 블랙문은 3조 달러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3,000조가 넘는 자금이지요. 우리와 협력하기로 한 브릿지랜드의 경우는 1,000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00조가 넘는 돈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겨우 15조를 목표로 한다는 것에 그렇게 놀라서야 하겠습니까? 저는 블랙문을 뛰어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허…….”
홍대민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1차, 2차 펀드를 통해 대한민국의 시중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 먹었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 자금이 2조가 채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3,000조를 넘기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홍대민으로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