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
한진영은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을 팔걸이로 옮겼다.
그리고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 3차 판매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입니다. 사장님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3차 판매의 성공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한진영의 계획이 실현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두 번째 문제였다.
펀드의 3차 판매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계획은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여전히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홍 본부장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무슨 부탁을 말씀이십니까?”
“지금 들어와 있는 펀드 자금을 집행하지 말아 주십시오.”
홍대민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그대로 굳어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이야기를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한진영은 이야기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홍대민을 바라보고 그의 부탁대로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현재 판매된 펀드 자금의 집행을 멈춰주십시오.”
자기가 잘못들은 게 아님을 깨달은 홍대민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자금을 집행하지 말라고요? 얼마나 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전량입니다.”
“네?”
홍대민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량이요? 지금 들어와 있는 모든 자금의 집행을 멈추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왜? 왜 자금 집행을 멈춰야 한다는 말입니까?”
홍대민은 지금까지 한진영을 향해 이렇게 불손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자기보다 어리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믿고 지지해준 것에 한진영을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여 깍듯이 대했던 홍대민이었다.
공적인 자리가 됐건 사적인 자리가 됐건 하늘 아래 자기가 모실 분은 한진영 하나라는 식으로 상사를 대하는 것 이상으로 한진영을 생각했던 홍대민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자기도 모르게 억양이 높아졌으며 말이 짧아졌다.
그만큼 놀랍고 당황스러우며 이해가 가지 않는 지시를 한진영이 한 것이었다.
평소에도 한진영은 기괴한 지시를 자주 내리고는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놀랄만한 결과에 기괴한 지시가 사실은 누구도 생각 못 한 솔루션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그래서 웬만한 지시에는 이유도 묻지 않고 따랐던 홍대민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번 지시는 기괴하다는 표현조차 무색할 만큼 멍청한 지시라고 생각했다.
홍대민은 세이지증권에 들어와 처음으로 한진영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화를 냈다.
“펀드를 팔 때 내세워야 할 게 실적 아닙니까? 과거에 투자한 사람들이 지금 이렇게 벌었으니 너희도 들어와라 라는 슬로건으로 펀드를 팔아야 하는데 실적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잡아놓고 있으라고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어디 아픈 거 아닙니까?”
홍대민은 오른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두드리며 한진영의 머리가 잘못된 게 아니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만약 한진영이 홍대민의 밑에 있는 직원이었다면 쌍욕을 박고도 남았을 만큼 홍대민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물끄러미 홍대민을 바라보기만 했다.
홍대민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다시 한번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펀드를 판매하여 자금을 모았냐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직원을 왜 뽑았냐는 이야기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가지 않은 것들을 모조리 한진영을 향해 쏟아낸 홍대민이었다.
한진영은 화를 내는 홍대민을 앉은 채로 가만히 듣기만 했다.
홍대민은 한참 불만을 쏟아내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한진영을 보고 점점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이유를 설명하려 하거나 화를 내는 자신과 말싸움하여 설득하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한진영이었다.
마치 지금의 홍대민을 예상했다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직 한진영에게 이유를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홍대민은 조금 전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혹시 전량 자금을 묶어두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있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한 한진영은 소파를 손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이제 들을 준비가 됐으면 앉아서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저는 홍 본부장님께 이야기를 다 끝내지 못했습니다.”
홍대민은 그제야 자기가 한진영의 말 일부만 듣고 화를 냈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흥분하여 추태를 보였습니다.”
“괜찮습니다. 홍 본부장님이 그러는 것이 이해가 가니까요.”
홍대민의 사과에 한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사과를 받았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이런 모습에 더욱 자신이 부끄러워짐을 느꼈다.
한진영은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홍대민을 향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자금 집행을 멈추라고 한 것은 펀드 자금을 가지고 공매도를 칠 수는 없어 그런 겁니다.”
“공매도요?”
홍대민은 공매도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펀드와 공매도가 왜 지금 이 시점에 이야기 나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은 홍대민이었다.
“시장이 안 좋아질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억지로 들어가 손해를 보는 것은 결코 좋은 매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공매도는 왜 말씀하셨는지…….”
“시장이 나쁜 상황에서 돈을 벌 방법은 한정되어 있죠. 공매도를 쳐서 돈을 벌거나 아니면 선물과 옵션과 같은 파생에 투자하거나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고객의 돈을 가지고 공매도나 파생에 투자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자금은 파생 시장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많기도 하고요.”
한진영의 말을 가만히 듣던 홍대민은 한진영의 말이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혹시 시장이 안 좋은 상황이 될 걸 예상하신 겁니까?”
“안 좋은 정도가 아닐 겁니다.”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고요?”
홍대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 상황에서 시장이 안 좋아질 것을 예상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정부가 새롭게 세워지게 되면 항상 시장은 기대하고 미래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따라 주식시장은 올랐던 것이 과거의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루하게 움직이던 지수가 새로운 정부의 탄생을 축하하며 2,100대를 뚫고 올라가 전고점인 2,200마저도 뚫어버린 상황이었다.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2,000대에서 지루한 횡보를 해온 만큼 이번의 고점 돌파는 지수의 새로운 도약의 시작점이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과거와 달리 전고점 이후 빠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정부의 탄생과 함께 정책 수혜로 2,500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는 것을 사람들은 기대하는 중이었다.
홍대민이 화를 낸 것이 바로 이런 시장의 상황 때문이었다.
빨리 따라붙어도 모자란 상황에 상승세의 시장을 지켜만 보라는 것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진영은 하락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진영의 짧은 말속에서 그냥 안 좋은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진영은 머리가 복잡해 보이는 홍대민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서규철 대통령 후보와 최대일 회장에게 했던 이야기를 해줬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표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한진영이 해주는 이야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모두 마친 한진영은 홍대민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서규철이나 최대일과는 시장을 대하는 입장이 다른 홍대민이었기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일본이…… 정말 그런단 말씀이십니까?”
한진영은 홍대민의 질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민은 한진영이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를 놀리기 위해 이런 말을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진영의 곁에서 오랫동안 보아 온 그는 이런 일로 농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홍대민은 지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진영에게 방법을 구하며 앞으로 있을 일을 걱정하는 모습만이 홍대민에게 보이고 있었다.
“간단합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에게 앞으로 진행할 내용을 설명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금은 하방 세팅을 진행하시면 됩니다. 전자 특히 반도체 관련주들을 중점적으로 공매도를 치시고, 선물과 풋옵션의 비중을 높여 매매하는 패턴을 준비하세요. 고객자금 중 기업 쪽의 것은 주식 비중을 줄이고 채권 쪽으로 돌리세요. 개인의 경우에는…… 조금 전 이야기한 대로 멈춰놓으시면 됩니다.”
한진영의 말대로 심플한 계획이었다.
하락장을 대비하는 일반적인 포지션이 바로 한진영이 이야기한 포지션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세세한 내용을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하락장에 들어갔을 때 어떤 플랜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홍대민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펀드 자금을 집행하지 않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고객들이 이해해줄까요?”
돈을 집어넣었는데 집행하지 않는다면 고객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유를 지금 홍대민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고객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홍대민은 고객들의 반발을 어떻게 해결할지 벌써 걱정이 되어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사장님이요?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홍대민이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묻자 한진영이 가볍게 대답했다.
“진심을 담아 이야기해야지요. 그럼 이해해줄 겁니다.”
“네? 뭘 어떻게 하신다고요? 설마 저에게 한 이야기를 고객에게 하신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섣불리 이야기했다가 일본과 브릿지랜드에게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진심을 담아 잘 이야기해야지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홍대민은 두 번이나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한진영에게 더는 방법을 묻지 않았다.
한진영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니 자기는 하방 구축에 관한 문제만 신경 쓰면 됐기 때문이다.
“너무 바쁘게 진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분하게 잡아가세요. 타겟은 2,500에서 2,600입니다. 대통령이 당선되고 한껏 정책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며 2,500을 돌파하는 시점. 거기를 터닝포인트로 잡고 가시면 됩니다.”
한진영은 이제는 비장한 표정을 짓는 홍대민을 향해 오른손 검지를 들어 올리고 말했다.
“저들도 하방 구축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니 우리는 그들보다 한 걸음만 앞서면 되는 겁니다. 딱 한 걸음만 앞서도록 하세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표정에 마음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과 의문이 보이지 않는 홍대민의 얼굴이 믿고 맡겨도 된다는 뜻을 강하게 전해줬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홍대민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
예상대로 대통령 선거 결과는 서규철 후보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지난 정권의 심판과 공정을 내세운 서규철 후보의 슬로건에 사람들이 손을 들어 준 것이었다.
시장은 새로운 정권에 큰 희망을 품었다.
그동안 사라져 버렸던 정부 정책이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장을 끌어갈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2,300을 돌파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가던 지수가 이제는 2,500이라는 상징적인 가격대를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특히,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이라고 볼 수 있는 반도체와 새로운 먹거리라는 이차전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수를 밀고 끌어 새로운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지수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자 주식시장은 활발해졌다.
코스피 지수로 10%에 불과한 상승이지만 30~40%까지 오르는 개별종목이 등장하며 오랜만에 시장에 활기가 돌았다.
조수아는 주식시장의 훈풍 속에 매달 있는 임원 회의에서 WM사업부문의 실적 발표를 하는 중이었다.
“MTS 앱의 가입자 수가 2,000만을 돌파했습니다. 가입자 중 매매를 실제로 해 본 사람은 800만 명을 넘겼습니다. 현재 MTS 시장에서의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고, 거래액 기준으로는 전체 시장의 3위에 해당하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수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실적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계획을 발표했다.
“시장이 훈풍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마케팅 행사를 진행할 계획을 하고 있고, 여러 매체에 광고를 넣는 것도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정권이 안정되고 경제가 나아질 거라는 분위기가 잡힌 지금을 가입자 수를 끌어들일 가장 최적의 순간으로 판단하고 거기에 맞게 움직일 계획입니다.”
한진영은 조수아가 건넨 계획표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잠시 모든 걸 보류하시기 바랍니다.”
“보류요?”
한껏 기분이 좋아 보였던 조수아는 예상치 못한 한진영의 지시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 있던 다른 임원들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케팅 행사가 마음에 안 들면 변경하면 될 일이었다.
규모가 마음에 안 들면 규모를 바꾸면 됐다.
하지만 한진영은 바꾸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보류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자리에 있던 임원들은 ‘보류’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실적을 발표할 때와 달리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들어온 조수아에 이어 홍대민이 일어나 앞에 나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임원들은 홍대민이 준비한 자료를 먼저 훑어보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어?”
자기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낸 최석영은 급히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도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 최석영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홍대민이 내민 보고서 속에는 지금 시장과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저희 운용본부의 실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대민이 지난 한 달 동안 이룬 실적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운용본부의 실적보다 보고서에 쓰여 있는 내용이 그들의 눈을 더욱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2,400을 넘은 시점에서 공매도를 준비하여 2,500이 돌파되는 시점에 공매도를 진행할 예정. 공매도의 주요 타겟은 반도체 주를 비롯한 전자 산업 대부분을 타겟 범위로 지정. 특히, 삼선전자의 경우 대규모 공매도를 진행해도 받아줄 여력이 있는 만큼 집중적으로 공매도를 진행하려 함]
시장에 훈풍이 돌고 있는 지금 운용본부에서는 공매도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