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진심이 담긴 편지
회의를 마치고 나온 임원들은 모두 홍대민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도대체 뭡니까?”
김석현 외환거래본부장이 가장 먼저 홍대민에게 물었다.
홍대민은 김석현의 질문에 잘됐다는 듯이 옷자락을 살짝 잡아끌고는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김 본부장님과 의견을 나누려 했습니다. 2,500부터 운용본부에서는 적극적인 하방 배팅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김 본부장님께서는 이 내용을 숙지하시고 외환거래를 할 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조금 전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이유가 있는 겁니까?”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으니 이상하기만 해요. 이런 일방적인 포지션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근거를 말씀하지 않으셨잖아요.”
이진경 리스크관리센터 센터장도 곁에서 이야기를 듣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홍대민은 이진경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이유는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말하기 어렵다고요?”
조수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홍대민에게 물었다.
홍대민은 이번엔 조수아를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네. 대답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 거예요? 사장님께서는 알고 계신 거예요?”
홍대민은 조수아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께서 알려 주시고 지시하신 일입니다. 펀드 자금의 투자 보류. 사장님의 판단이셨습니다.”
자리에 있던 임원들은 한진영의 판단이었다는 말에 모두 말을 멈추고 홍대민을 바라보기만 했다.
홍대민은 그런 임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고는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이거 하나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이유는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에 운용본부가 움직인다. 여기까지만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홍대민의 말에 자리에 있던 임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홍대민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에 더는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의아해하는 조수아가 홍대민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럼 펀드 고객들은요? 펀드 고객들은 어떻게 하신다고 해요?”
“그건…….”
홍대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아직 한진영이 남아있는 회의실을 바라본 뒤 대답했다.
“사장님께서 알아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알아서 하신다고요?”
조수아는 홍대민이 바라보고 있는 회의실 쪽으로 시선을 따라 옮겼다.
한진영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조수아는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
새로운 대통령으로 뽑힌 서규철은 인수위 시절부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개혁과 적폐 청산이라는 슬로건에 따라 낡은 규제를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기업들은 미래를 낙관했고, 국민들은 안정된 상황에 지갑을 열 준비를 마쳤다.
환율은 안정됐으며 채권금리 또한 지난 시절과 달리 잔잔한 움직임으로 시장이 안정되어 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장은 새로운 정부의 앞으로의 5년을 희망찬 모습으로 지켜봤다.
주식시장은 이런 안정을 바탕으로 또다시 상승하는 모습을 보일 준비를 마쳤다.
5주 연속 상승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2,400을 돌파한 지수는 2,500이라는 신세계를 향해 한 걸음만을 남겨 놓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어떻게 됐지?”
한진영은 상황판을 바라보고 조지훈을 향해 물었다.
“공매도 및 대차거래에 관한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규모는 약 8,000억으로 인덱스펀드를 포함한 코스피와 코스닥 전 종목에 걸쳐 집행할 계획이라고 운용본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2,600을 보기 전에 모두 마무리 지어야 해.”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숙이는 조지훈을 슬쩍 돌아본 후 다시 상황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취임식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자 숨 고르기를 하던 지수는 결국 2,500 돌파 시도에 들어갔다.
시장은 당분간 하락이라는 것을 잊어야 한다는 것처럼 계속 오르기만 했으며 시장의 분위기는 장밋빛 이야기만 가득했다.
경제에 불안 요소라고 보일 만한 것이 없었다.
대한민국을 억누르고 있던 모든 악재가 사라져 버렸기에 어쩌면 2,500이 아닌 3,000까지 오를 수도 있지 않냐는 이야기까지 낙관론자들 입에서 이야기 나올 정도였다.
주식시장은 거칠 것이 없이 하루하루 신고가를 갱신하는 중이었다.
상황판을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과 조지훈이 있는 곳으로 비서실 직원이 다가왔다.
그녀는 조지훈에게 A4용지를 하나 건넸고 조지훈은 알겠다는 말을 건넨 후 먼저 A4용지를 확인했다.
“사장님.”
A4용지 속에 쓰인 글을 모두 확인한 조지훈은 한진영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A4용지를 내밀었다.
“펀드 가입 고객에게 보낼 편지 내용이 완성됐습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지훈이 내민 A4용지를 건네받았다.
천천히 머리말부터 읽어 내린 한진영은 다시 A4용지를 조지훈에게 돌려주고는 지시했다.
“이대로 진행해.”
한진영이 알려 준 글에 여러 가지 수식어를 더해 만든 편지였다.
조지훈은 과연 이렇게 보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한진영이 하라는 것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진영이 내린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
우편함에 오랜만에 보이는 편지에 남편은 한껏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편지를 집에 가지고 온 남편은 들어오자마자 부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편지를 흔들었다.
“여보. 요즘 세상에 누가 편지를 다 보냈네.”
남편의 식사 준비로 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부인은 남편의 말에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어 남편이 흔드는 편지 봉투를 바라봤다.
“편지예요?”
“그래. 편지. 이거 봐. 누가 나한테 편지를 다 보냈어.”
부인은 남편의 손에 들려진 편지 봉투를 바라보고 신기한 듯이 말했다.
“그러게요. 저도 편지 못 받아 본 지 10년은 넘은 것 같은데…….”
“10년이 뭐야. 15년 아니 20년은 된 것 같다. 연애할 때 당신이 나한테 보낸 편지가 마지막 편지였어.”
남자는 부인에게 즐거운 얼굴로 이야기하고는 편지 봉투를 내려다봤다.
“도대체 누가 보낸 거지?”
한껏 들뜬 표정의 남자는 보낸 이의 이름을 보고 김이 샌 얼굴로 부인에게 말했다.
“에이. 어쩐지. 요즘 세상에 누가 편지를 보내나 했더니…….”
“왜요? 누군데요?”
“세이지증권. 내가 얼마 전에 직원들 말 듣고 들었다는 그 펀드 말이야. 그거 만든 곳에서 보냈네.”
남자는 부인에게 편지가 온 곳을 이야기하고 혀를 찼다.
“아니. 얘네들은 무슨 우편물을 편지처럼 만들어서 보내. 사람 설레게 말이야.”
남자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편지 봉투를 식탁 위에 던져 놓고는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나 손만 씻고 바로 밥 먹을 테니까 준비해줘.”
“다 됐어요. 얼른 다녀와서 드세요.”
남자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바로 식탁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로 저녁 식사를 한 남자는 부인과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다 식탁 끝에 올려져 있는 편지 봉투를 가만히 바라봤다.
부인도 남편을 따라 편지 봉투로 시선을 돌리고는 남편에게 물었다.
“무슨 편지에요?”
“나도 모르지. 그런데 뻔하지 않겠어? 새로운 상품이 나왔다는 광고 전단이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뭐…… 내가 가입한 상품에 뭐 약관이 바뀌었다는 내용의 종이가 들어 있겠지.”
“그런 것을 저렇게 좋아 보이는 편지 봉투에 담아 준다고요? 보통은…… 이거. 이거처럼 보내잖아요.”
부인은 식탁 한쪽에 올려져 있는 일반 봉투를 들어 남편 앞에 가져다 놨다.
하얀 종이에 주소가 보이는 곳에 투명한 비닐이 쓰여 있는 봉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양의 것이었다.
그러나 세이지에서 보낸 것은 그런 것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남편은 손을 뻗어 편지 봉투를 잡아당겨 앞에 놓았다.
부인은 봉투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편과 같이 봉투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어서 뜯어봐요. 도대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저도 궁금하네요.”
“그렇지? 궁금하지?”
“궁금해요. 그러니 어서 뜯어봐요.”
부인의 말에 남편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봉투 안을 들여다보고는 놀란 목소리를 냈다.
“어?”
“왜요?”
“진짜 편지지가 들어 있는데?”
남편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편지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뭐라고 쓰여 있어요?”
광고 전단이 들어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은 곱게 접힌 편지지를 펴서 안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안녕하십니까? 세이지증권의 한진영입니다. 저희 세이지증권은…… 뭐야? 진짜 편지네.”
남편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부인을 바라보자 부인은 편지지로 눈짓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읽어나 보세요. 제가 읽을까요?”
“아니야. 내가 할게.”
편지지를 향해 손을 뻗은 부인의 손을 막은 남편은 편지지 속에 적혀 있는 글을 다시 읽어 내렸다.
“저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고객님들이 맡긴 피 같은 자산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산을 늘리는 시점이 아닌 지키는 시점이라고 저희는 판단했습니다. 새로운 정부의 기대감과 나아진 기업환경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잔뜩 담겨 있는 지금 어째서 저희가 자산을 지켜야 할 때인지 이해하지 못하시는 고객님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것과 달리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한참을 읽어 내린 남편은 고개를 들어 부인을 바라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는 거야? 우리나라 경제가 좋지 못하다는 거야?”
“이리 줘봐요.”
부인은 답답한 나머지 남편의 손에서 편지지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뒷부분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안정된 정치 상황과 새롭게 꾸려진 정부에 기대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정된 내부와는 달리 지금 외부 상황은 기대만큼 좋지 못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놓고 벌이는 신경전, 끝나지 않은 악몽처럼 잊을만하면 나오는 유럽의 위기, 일본과의 청산되지 못한 과거 등등 외부에는 우리의 발목을 잡을 폭탄이 한가득 쌓여있는 상태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라면 일제 식민지 시절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게 지금 왜 나와?”
“잠시 기다려봐요. 나머지 더 읽어 보고요.”
부인은 남편의 말을 막아 세우고 나머지 글을 읽어 내렸다.
나머지 편지지도 앞에 부분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투자할 시기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수치와 지표를 통한 분석은 아니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도 알기 쉽도록 풀어놓은 말은 현재 상황이 좋지 못함을 잘 이해하도록 해줬다.
“그래서 우리는 펀드 자금을 집행하지 않은 채 잠시 시장을 바라보려 합니다. 투자에는 매수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 있다면 해지하셔도 괜찮습니다. 해지 수수료를 받지 않을 계획이니 언제든 판매처로 찾아와서 해지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다음에 변화가 생긴다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세이지증권 한진영 올림.”
마지막 부분까지 다 읽은 부인은 남편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러니까 투자를 안 하겠다는 말이 뭐예요?”
“그냥 가지고 있기만 하겠다는 거 아냐?”
“그렇죠? 그 말이죠?”
부인은 자기가 잘못들은 게 아님을 깨닫고 편지지를 다시 남편에게 내밀었다.
남편은 부인이 잘못 읽은 게 아닌지 다시 편지지를 앞뒤로 살폈다.
그리고 편지지에 부인이 읽은 것 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이네? 돈을 그냥 가지고만 있겠다는 말이네?”
“여보 어떡할 거예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원하지 않으면 해지하라며? 그럼 해지해야지.”
“정말 해지하실 생각이에요?”
“당연하지. 그 돈을 그냥 은행에만 넣어놔도 이자를 주는데 왜 이자도 안 주는 곳에 넣어놓겠어? 내일 문이 열리면 바로 은행으로 갈 거야.”
부인은 남편의 말에 이상한 듯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편지지를 내려다봤다.
남편은 그런 부인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고 이유를 물었다.
“왜 그래? 뭐가 이상해?”
“아니요. 이상하다기보다는…… 찜찜한 게 있어서요.”
“찜찜해? 뭐가?”
“굳이 왜 이렇게 편지까지 써서 투자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서요. 굳이 알릴 필요 없는 거잖아요.”
부인의 말에 남편은 다시 들어 올리던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말이 타당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 돈을 맡긴 순간 알아서 하는 거니까.”
“그리고 손해를 봐도 그건 감수할 문제라서 사실 회사는 이렇게 편지까지 돌리면서 구구절절 투자를 보류하겠다고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산 뒤에 장이 안 좋아서 손해를 봤다고 해도 되고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런데 보세요. 여기 종이는 복사한 것이지만 원본은 직접 손으로 적은 거잖아요. 이렇게까지 한 건 진심이라는 거 아닐까요?”
“진심?”
남편은 부인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격이 급한 자기와 달리 부인은 차분한 성격이라는 걸 남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인이 자기보다 조금 더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잘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지켜봐요. 어차피 오늘 빼나 내일 빼나 상관없잖아요. 해지 수수료도 받지 않겠다고 하니 말이에요.”
“그래도 하루라도 늦게 빼면 그 하루만큼 이자를 손해 보잖아.”
“당신 그 돈 빼서 정기예금에 넣을 생각이에요?”
“그건 아니지. 지금 정기예금 이자가 1%가 간당간당 나오는 상황에 거기다 돈 넣을 이유가 없지.”
“그러니까요. 정기예금에 넣나 펀드에 넣어놓고 있나 별반 다르지 않으니 잠시 지켜봐요.”
“그럴까?”
“그게 나아요.”
부인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지를 다시 내려봤다.
부인의 말을 듣고 나니 편지지 속에 쓰인 손글씨조차도 성의 있게 느껴진 남편이었다.
“어서 저녁 식사 마저 하세요. 다 식겠어요.”
부인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을 다시 집어 들었다.
펀드 가입자들에게 전달된 편지를 받은 고객들은 대부분 같은 반응을 보였다.
부인의 말을 들은 남편처럼 돈을 빼지 않고 조금 더 지켜보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굳이 돈을 넣고 있을 이유가 없다며 돈을 빼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장은 세이지증권의 편지로 떠들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