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지금의 상황은 보통과는 다르다
2,600을 깼던 시장이 날개 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다는 삼선전자가 10%가 넘는 폭락을 보이며 지수의 하락을 이끌었다.
지수는 단번에 2,500을 깼고 이제는 횡보하며 에너지를 응축했던 2,300과 2,400 사이에서 지수가 제발 멈춰주기를 바랄 정도로 시장은 악화일로로 번져갔다.
“거…… 이보게.”
“네. 어르신. 말씀하세요.”
“나 기억하나?”
모두은행 창구 직원은 노인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인의 얼굴을 살폈다.
하루에서 수십 명의 고객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고객들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눈앞의 노인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노인 덕분에 단번에 한 달 할당치를 채웠던 것을 창구 직원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럼요. 기억하죠. 어르신을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어쩐 일이십니까? 새로운 펀드에 또 가입하시려고요?”
창구 직원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온 걸 깨닫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인은 그런 창구 직원보다 더욱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로운 펀드에 가입하려는 건 아니고…… 세이지 말이야.”
“네. 어르신이 해지하신 펀드의 운용사인 세이지증권이요?”
창구 직원은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노인의 말에 반응했다.
노인에게 친절을 베풀다 보면 이번에도 노인이 실적을 채워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창구 직원의 친절한 미소를 보자 꺼내기 어렵던 말을 꺼낼 수 있게 됐다.
저렇게 친절한 직원이라면 어려운 부탁도 들어줄 것으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 그래. 거기. 거기 다시 돈을 넣고 싶은데 말이야.”
“다시 넣고 싶으시다고요?”
창구 직원은 여전히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리둥절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노인은 창구 직원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자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그게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투자 보류라는 것도 하나의 투자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다시 세이지에 가입하고 싶네. 자네가 추천한 펀드가 지금 수익률이 마이너스인데 다시 세이지로 옮겨 준다면 거기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할 테니까 다시 가입시켜주게.”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가입한다니요?”
노인은 창구 직원이 못 알아듣는 척한다는 생각에 언짢은 기분을 내보였다.
“왜 이러나? 내가 자네가 추천한 펀드에 들기 전에 세이지증권 펀드에 가입해 있었지 않았나? 설마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요. 기억합니다. 네. 기억하죠. 제가 직접 어르신 펀드를 해지하고 가입까지 시켜드렸는데요. 그런데…… 다시 가입이라니요?”
“다시 가입시켜줘. 세이지로 말이야. 그럼 아까 말한 대로 수익률 마이너스인 거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어르신. 수익률 마이너스는 제가 충분히 설명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증시 상황에 따라 수익률 마이너스도 나올 수 있다고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쾅!
노인은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창구는 물론이고 안에서 볼일을 보던 모두은행 직원들과 순번을 기다리던 사람까지 모두 노인이 있는 곳으로 시선이 모였다.
쾅!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소리는 노인이 있던 곳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고객님. 세이지증권 펀드를 해지할 때 충분히 설명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해지하면 재가입이 다시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럼 재가입 말고 신규 가입으로 해달라고요.”
“펀드 모집이 마감됐습니다.”
“내가 빠진 자리는 남아있을 거 아닙니까? 거기에 다시 들어가겠다고요.”
“고객님. 그것도 안 됩니다. 세이지증권에서 모두 막아놨습니다.”
쾅!
“돈 여기 있다고. 돈 주겠다는데 왜 그래? 내가 나간 자리 다시 들어가겠다는데 왜 막는 거야?”
막무가내로 세이지증권 펀드에 재가입 시켜달라는 고객이 노인 옆에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고객은 창구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뭐야? 지금 세이지증권 펀드 재가입이 안 된다고 이러는 겁니까?”
대기 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다른 고객이 소리를 지른 창구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한창 씩씩대던 사람은 뒤에서 다가온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선생님도 저랑 같은 일 때문에 모두은행에 찾아오신 겁니까?”
“네. 저도 재가입 때문에 왔는데…….”
창구로 찾아온 고객은 난감해하는 창구 직원을 향해 직접 물었다.
“뭡니까? 재가입 안 되는 겁니까?”
“고객님. 분명 해지할 때 설명해 드렸습니다. 재가입은 힘들다고요.”
“나도 여기 계신 분처럼 내가 빠져나간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는 건데 그것도 안 된다는 말입니까?”
창구 직원은 안 된다는 말에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고객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리고 같은 문제로 뒤를 이어 창구로 다가오는 고객들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세이지증권 펀드에 재가입하려는 모습은 비단 이곳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모두은행의 전 지점에 걸쳐 세이지증권 해지 고객들이 몰려들어 다시 가입시켜달라는 문의가 빗발쳤다.
그리고 문의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낮지 않았다.
특유의 우기면 해 줄지 모른다는 마인드의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소동은 대부분 지점에서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모두은행은 난감한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적극적으로 해지를 방어하지 않았다면서 해지 고객의 불만이 모두은행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게다가 해지 고객을 타 펀드로 돌린 바람에 고객들의 불만이 더욱 커지는 사태를 겪고 말았다.
타 펀드는 벌써 -10%에 가까운 손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정작 모두은행의 고민은 다른 것에 쏠려 있었다.
“사장님. 지난 일을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모두은행 은행장이 한진영 앞에서 고개 숙여 사과했다.
머리가 탁자에 닿을 것 같이 숙인 은행장의 모습에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은행장을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눈이 멀어 세이지증권과 한진영 사장님께 큰 결례를 끼친 것 같습니다.”
“결례라니요? 사업을 하다 보면 왕왕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크게 괘념치 마십시오.”
“이해해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은행장은 시원스레 용서해준 한진영의 모습에 안도했다.
그리고 이런 한진영의 모습에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조금 더 쉽게 꺼낼 수 있게 됐다.
지금의 모습이라면 부탁을 들어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장님. 처음 계약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 개의 펀드를 독점적으로 팔 기회를 다시 주십시오. 그 부탁을 하기 위해 제가 직접 왔습니다.”
은행장이 한진영의 표정을 살핀 뒤 앉은 채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진영은 이번에는 고개 숙인 은행장을 일으켜 세우지 않은 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은행장님. 한 번 어그러뜨려진 계약이 다시 원복 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기존의 계약은 다시 되돌리지 못합니다.”
“사장님.”
은행장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단 하루 만에 세이지증권에 대한 평가가 바뀌고 말았다.
시류를 제대로 타지 못하고 뒤처져 뒷짐만 지고 있는 멍청한 놈들이라는 시각에서 지금은 앞날을 내다보고 절벽을 향해 달려 나가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현자라는 평가를 받는 중이었다.
세이지증권만이 지금 시기에 제대로 된 선택을 한 채로 대한민국 기관들을 바보로 만든 것이었다.
주식시장은 일본의 제재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며 환율은 급등했다.
채권 시장 또한 흔들리는 것이 모든 금융시장에 일본의 무역 제재가 영향을 미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이지증권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사장님.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세이지증권의 펀드 판매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은행장님과 모두은행이 도와주지 않으셔도 판매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한진영의 말에 은행장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시점에 세이지증권의 펀드 판매를 걱정한다는 것은 여름에 더울 것을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팔릴 것.
세이지증권의 펀드는 그런 것이었고 그래서 은행장이 찾아왔던 것이었다.
은행장은 한진영의 말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그럼 독점을 다섯 번으로…… 그건 어떻습니까?”
“그건 오히려 모두은행에 좋은 조건이지요. 저희에게 좋은 건 아닙니다.”
은행장은 한진영의 말에 머쓱하게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 조건을 말씀해보십시오. 뭐든지 들어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든 하지 못하는 일이든 말입니다.”
한진영은 처절하게 보일 정도로 맹렬히 달려드는 모두은행의 은행장을 가만히 바라본 채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부터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왜 저희와 계약하려 하시는 겁니까?”
한진영의 말에 은행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안 되게 생겼습니다.”
“계약이라도 해야 되게 생겼다고요?”
“네.”
은행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이야기했다.
“해지 고객들의 원성이 하늘을 뚫을 기세입니다. 게다가 자회사의 펀드를 해지 고객에게 추천한 것 때문에 분위기는 더 안 좋은 상태이고요.”
한진영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해지 고객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저희와의 계약이 절실하게 필요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나요?”
“네. 그러니 꼭 부탁드립니다. 세이지증권은 지점이 많지 않으니 위탁판매처를 이용해서 판매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왕 판매처를 구하는 것 저희를 이용해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사장님. 꼭 저희 은행을 이용해 주십시오.”
은행장은 머리가 탁자에 닿을 것처럼 숙였다.
한진영은 은행장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은행장님께서도 참 고생이십니다. 이사회에서 많이 눈치 줬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은행장은 다시 한번 씁쓸하게 웃었다.
“월급쟁이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 세이지증권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리에 다들 반가워하던 이사님들이 세이지증권의 펀드 투자 보류 소식에 당장 계약을 파기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이제는 해지 고객들을 어떻게 하겠냐고 그러고 있습니다.”
자기 처지를 토로하듯이 이야기한 은행장의 모습을 한진영은 말없이 바라봤다.
은행장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한진영 앞에 앉아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이렇게 하시죠.”
한진영은 기운이 빠져 보이는 은행장을 향해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기존과 같은 제안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저희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무시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희가 세이지를 무시하겠습니까?”
은행장은 손을 휘젓고 기대에 찬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마지막 끄나풀을 잡은 것 같은 눈을 하는 은행장을 향해 말했다.
“기존에 받는 취급 수수료의 절반 가격으로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시죠.”
“기본 받는 것의 절반이라면…… 처음 저희가 제안했던 수준 아닙니까? 좋습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한진영은 새로운 계약을 맺자는 말에 흥분한 은행장을 잠시 진정시켰다.
“은행장님. 아직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게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잔뜩 긴장한 표정의 은행장은 한진영을 향해 몸을 살짝 들어 올리기까지 했다.
한진영은 은행장을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대로 계약을 진행해도 사람들이 저희를 향해 손가락질할 겁니다.”
“이해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저희가 너무 염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3개가 아닌 단독 계약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단독이라면…….”
“이번에 하나 계약하고 판매가 끝이 나면 다음 펀드는 이전 펀드의 판매 성적을 가지고 새롭게 계약조건을 따져 진행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묶어서 하지 말고요.”
은행장은 잠시 한진영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네. 진심입니다.”
“그건…… 오히려 저희에게 좋은 것 아닙니까?”
지난번에 계약을 파기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러 개를 묶어 계약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단건으로 나누어 계약을 진행한다면 모두은행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게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잘 팔리면 취급 수수료 인하를 요청하기 더 쉬울 테고 반대로 펀드 판매가 순조롭지 못하다면 모두은행이 계약을 더는 진행하지 않아도 되고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은행장은 몇 번이나 진심이냐고 물은 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진영에게 건넸다.
계약을 다시 살리는 것도 모자라 큰 선물까지 받은 것에 은행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이지증권의 펀드를 판매 최우선에 놓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세이지증권을 나섰다.
한진영과 조지훈은 떠나는 모두은행의 은행장을 배웅했다.
“사장님. 모두은행에게 너무 좋은 조건을 제시하신 것 아닌가요? 분명 전에는 벌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차에 탄 상태에서도 몸을 창문 밖으로 빼내 한진영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든 은행장을 바라보고 조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진영은 은행장의 손 인사에 마주 손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나는 벌을 줬는데?”
“벌을 주셨다고요?”
“그래. 단건 계약이면 충분히 벌을 준 거야.”
“선물을 주신 게 아니라요?”
“하하하.”
한진영은 재미있다는 듯이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말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말이 맞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아. 두고 봐. 다음에 저들이 들고 올 계약서에 뭐가 적혀 있을지 말이야.”
한진영은 모두은행 은행장이 떠나간 쪽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한진영이 모두은행 은행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대한민국 증시는 2,400마저 깨고 내려가며 지지대로 기대하는 라인을 결국 터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