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그 돈도 그에게는 조금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지지대로 여기는 2,300과 2,400 사이에 코스피가 들어서자 움직임이 제한적으로 바뀌었다.
지난 상승 시점에 단단하게 자리를 다져놓았던 만큼 이곳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지수의 손을 잡아당겼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증시의 하락 폭이 줄어들자 희망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해결책이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더는 무역 제재로 발목이 잡히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 사람들의 예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지난 고점인 2,600대가 아닌 진짜로 3,000까지 가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시장 참여자는 물론이고 전문가들의 기대였다.
그만큼 지금 문제는 상승장에 조정을 주기 위한 이벤트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었다.
“외국인들의 누적 매도가 5조를 넘어섰습니다. 공매도 잔량과 대차잔량 또한 전 종목에 걸쳐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삼선전자의 공매도 잔량은 200만 주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한진영은 조정실의 보고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어떻지?”
“현재 삼선전자의 공매도 잔량 200만 주 중에 100만 주가 우리 물량입니다.”
한진영은 최수찬의 보고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잘 됐다는 듯이 몸을 돌리고 조지훈을 향해 지시했다.
“서준일보에 삼선전자 관련해서 준비했던 거 전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성우는 어떻게 됐어?”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은 한 걸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독일 쪽 업체와 인수날짜를 조율하고 있다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그래? 가격은 맞췄고?”
“가격이야 선강에서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해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흐흐흐. 그래.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지.”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지훈을 더욱 가깝게 끌어당긴 뒤 지시했다.
“웬만하면 선강이 보유하고 있는 물량을 계산해서 타이트하게 넘어올 수 있도록 하라고 해.”
“미리 당겨 받지 말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괜히 확보했다는 것을 밖에 알릴 필요는 없어.”
한진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계속 이야기했다.
“밖에서 위기라고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우리도 좋고 선강도 좋고 심지어 저기 종로에 계신 분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최대한 끌어서 가지고 들어오라고 전해. 그렇다고 너무 끌었다가 공장이 멈추어서는 안 될 테니까 그 점 명심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선강하고 잘 조율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지훈은 잠시 말을 멈춘 뒤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자기들의 회사건만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남이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의 모습을 보고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삼선전자 때문에 그래?”
조지훈은 자기 머리가 들킨 것에 더는 미적거리지 않고 바로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네. 이대로 가만히 놔둬도 되나 싶어서요.”
“자기들이 싫다고 내쳤는데 어쩌겠어. 나는 미리 이야기했고 먼저 찾아가기까지 했으니 할 만큼 다했어. 그렇다고 삼선전자에 밉보이기 싫어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물건을 구해 그들의 입에 넣어줄 필요는 없잖아.”
“어제 삼선전자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옅게 웃으며 물었다.
“첫 번째 연락이지?”
“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세 번. 연락이 세 번 오거든 그때 이야기해.”
한진영은 가만히 상황판을 바라보고 웃었다.
삼선전자는 현재 고가 대비 15%의 하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로는 부족해. 그리고 삼선전자 놈들도 아직 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같고…… 고가 대비 반 토막이 나야 정신이 번쩍 들겠지.”
“반 토막이요?”
“그래. 그래야 우리도 좀 먹은 게 있지 않겠어?”
한진영의 질문에 조지훈은 남몰래 뒤에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1조라는 돈이 조금으로 표현하게 된 것인지 조지훈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세이지증권이 삼선전자에만 공매도친 금액은 1조에 달했다.
그리고 다른 종목들까지 더한다면 세이지가 운용하는 금액의 20%가 넘는 금액이 공매도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전방위적으로 공매도를 쳐 놓은 상태였기에 돈을 벌게 된다면 결코 적은 금액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한진영에게는 그 돈조차 조금에 불과한 돈인 듯했다.
흥분하거나 행복하다는 느낌보다 한진영의 어깨로 전해지는 그의 기분은 재미가 더 컸기 때문이다.
서준일보에서는 그날 저녁 삼선전자를 곤란하게 할 만한 기사가 나왔다.
[삼선전자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수소의 양은 두 달이 채 안 되는 것으로 파악돼]
[한계치에 거의 달했음에도 삼선전자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중]
[일본이 마음을 바꿔 먹기를 바라는 것이 삼선전자의 유일한 방법인 것으로 보여]
삼선전자가 지금 사태에 손을 놓고 일본만 쳐다보고 있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원자재의 양이 두 달을 돌리는 것이 전부라는 것에 사람들의 걱정은 불을 댕긴 것처럼 번져갔다.
***
일이 커지자 언제나처럼 방송에서 각 전문가를 모아 삼선전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삼선전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인 전문가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경제는 물론이고 외교와 금융에 심지어 국방 전문가까지 온갖 전문가들이 모두 모여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러나 한참 듣기만 하던 반도체 전문가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곤란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반도체 회사들에는 최악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게 그렇게 최악인 건가요?”
“네. 반도체 공정은 매우 복잡한 여러 과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각 파트에서 필요한 것들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으며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대체재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섣불리 썼다가는 오랜 시간 쌓아온 수율이라는 탑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반도체 회사들은 같은 물건임에도 벤더사가 바뀌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자재에 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면을 보여주고는 합니다.”
반도체 전문가는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듯이 허탈해하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이대로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공장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한번 멈춰 선 공장은 당장 자재를 구한다고 해도 돌리지 못합니다. 최소 한 달에서 수개월에 걸쳐 정상화 시간을 거쳐야지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단 하루라도 공장이 멈춘다면…….”
“수개월의 시간이 날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던 전문가들은 반도체 전문가의 말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문제를 여러 가지 자재 중 하나가 없는 것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좋은 말씀입니다.”
정신을 잃고 있는 다른 전문가들을 대신해서 야당 의원이 나섰다.
오랜 시간 정치판을 굴러다니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더 일본에 사과해야 하는 겁니다. 아마추어 정부는 타국과의 자존심 싸움하느라 자국의 산업이 무너지는 것을 그냥 두고 봐서는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이십니까? 지난번에도 일방적으로 일본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더니 아직도 그 말씀밖에 할 말이 없는 겁니까?”
여당 의원이 이번에도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야당 의원은 이번만큼은 지난번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저보다 좋은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우선 그 이야기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지금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여당은 가지고 있는 겁니까?”
“크흠. 그게 그러니까.”
“없습니까?”
“없다기보다는…… 정부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지요.”
여당 의원은 해결책을 내놔보라는 야당 의원의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야당 의원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면 뭐 합니까? 아무런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한 걸 말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 당장은 없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면…….”
“조금 기다리라고요? 저기 반도체 전문가님께서 말씀하신 것 듣지 못하셨습니까? 기다리다 시간을 놓쳐 공장이 멈춘다면 수개월을 날릴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공장이 멈춰선 후 방법을 찾으면 뭐 합니까? 공장이 멈추기 전에 해결하는 게 우선이지요.”
야당 의원의 말에 여당 의원은 더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당 지도부에서 무조건 막으라는 지침을 하달해서 최전선에 나가 야당 의원과 말씨름하고 있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답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꼬리를 내린 여당 의원의 모습에 야당 의원이 큰소리로 카메라를 보고 주장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일본에 사과하고 묶여 있는 무역 제재를 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산업 전체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릅니다. 모든 게 무너지는 겁니다.”
과격하기까지 한 야당 의원의 말이었지만 그 말보다 더 지금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 없을 정도였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악화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나라 산업 자체에 엄청난 타격이 올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걱정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은 즉각적으로 증시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2,300대 위에서는 지켜주기를 바라던 지수가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삼선전자가 뾰족한 수가 없는 상태로 정부와 일본 간의 협상만을 지켜보고 있다는 소식이 증시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던 것이었다.
코스피의 대장주이자 절대적인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삼선전자가 무너져 내리자 다른 것들도 도미노처럼 쓰러져갔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도살장에 끌려간 소처럼 처분만 바라는 심정으로 협상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협상은 기대와 달리 어떤 소득도 손에 넣지 못했다.
일본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이 문을 걸어 잠근 채 찾아온 대한민국 정부에 눈길도 주지 않은 것이었다.
협상단을 꾸리고 일본으로 넘어간 대한민국 정부는 닭 쫓던 개가 되어 멍하니 호텔 방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장은 더는 희망을 품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반도체 산업을 비롯한 전자산업은 끝이 났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말았다.
***
-삼선전자가 -7% 하락한 220만 원 라인까지 후퇴했습니다. 현재 하이식스는 이보다 더 깊은 하락을 보이며 4만 원 라인을 힘겹게 버티는 중입니다. 코스피는 2,200마저 내준 채 2,000라인으로의 후퇴까지 열어놓은 상황입니다.
방송에 나온 증시 전문가는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현재 상황을 브리핑했다.
-지금 기댈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중재안뿐입니다. 미국이 나서준다면 일본도 무역 제재를 계속 이어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부는 미국 정부에 SOS를 칠 것을 진심으로 조언하는 바입니다.
증시 전문가는 이제 다른 나라에 도움의 손길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미국이라면 일본도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실행해보기도 전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한국 정부가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미국 대통령실은 대변인을 통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일은 양국 간의 문제라며 미국은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논평을 기자회견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은 홀로 무역 제재라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외국인들의 매도 공세는 점점 더 매서워져 갔다.
그리고 이런 매도 공세는 단순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량을 내어놓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외국인 투자자들 공매도 물량 쏟아내]
[헤지펀드 계열 투자자들 우리나라 시장을 공격하기 시작]
[하이식스를 비롯한 산업 전반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것으로 파악]
외국인들이 노골적으로 우리나라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었다.
삼선전자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일본과의 협상에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외국인들을 자극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숨기지도 않은 채 공매도를 쳤으며 그 물량은 코스피 시장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까지 번져갈 정도였다.
2,200에 머물러 있던 종합주가 지수가 단번에 2,100마저 깨고 말았다.
이제 최후의 보루라고 여겨진 2,000선마저 눈앞에 보일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방송에선 지금 사태를 놓고 침울한 분위기를 연일 연출했다.
한 달 전만 해도 3,000을 이야기하던 증시 전망대가 지금은 2,000을 하회할지 모른다는 상황에 자리의 모든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저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 이야기할 정도로 상황은 악화하여 가고 있었다.
이렇듯 대한민국이 온통 산업의 몰락을 걱정하고 있는 도중에도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떨어져 내리는 주가에 신난 표정으로 상황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국인 매도세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기관도 매도에 동참한 채 개인만이 매수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2,102.5, 2,101.7, 2,100.3, 2,099.8, 2,100 하향 이탈했습니다.”
“삼선전자 주가도 200만 원대를 깼습니다. 고점 대비 30% 하락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하이식스도 4만 원 라인을 하향 이탈했습니다. 현재 3만 9,000원대에 주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이지증권에서는 속속 날아오는 정보에 기쁨이 담겨 있었다.
한진영은 조정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기쁨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조지훈을 바라보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지금 상황을 좋아한다고 욕하겠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농담에 살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이야기했다.
“아닙니다. 다들 이해해줄 겁니다.”
“이해해준다고?”
“네. 조금 지나면 사장님께서 이 상황을 모두 반전시키실 테니까요.”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도 조지훈과 마찬가지로 웃었다.
그리고 상황판을 바라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를 내가 가지고 있지. 그런데 금방은 그러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이 상황을 즐기고 싶어. 삼선전자 주가가 30%가 빠졌지만, 아직 반 토막이 난 건 아니니까. 내가 너무 욕심부리는 건가?”
“아닙니다. 사장님이시라면 더 욕심부리셔도 됩니다. 이 상황 자체를 예측하고 준비를 해오셨는데 그게 뭐 그리 큰 욕심이겠습니까?”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은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리고 그는 상황판에 보이는 수익 7,000억이라는 숫자를 가만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