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수확의 시간이 다가왔다
외국인들이 노골적으로 공매도를 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수의 하락 가속도에는 불이 붙고 말았다.
2,300에서 잠시 멈칫거렸던 모습 뒤에 2,200을 넘어 2,100까지 단숨에 하향 이탈하고 만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2,000에서만큼은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00이라는 숫자가 주는 상징성과 이대로 시장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거라는 의견이 2,000에서만큼은 공통된 생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는 무색하게 2,000마저도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삼선전자와 하이식스가 연일 폭락을 보여주었고, 관계된 회사들은 물론이고 은행과 보험까지도 혹시 모르는 일을 걱정하며 같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이제 시장은 하얗게 질린 상태로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내려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 사람들의 머릿속에 잠시 잊고 있던 곳이 방송에 등장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나운서의 인사에 최석영은 자세를 고쳐 앉고는 카메라를 보고 인사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세이지증권의 최석영입니다.”
“최석영 상무님. 참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하하. 이렇게 저를 반갑게 맞아주시니 자주 찾아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주 방송에 나와 투자자 여러분의 답답함을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아나운서의 노골적인 말에 최석영은 잠시 눈치를 살핀 뒤 아나운서를 향해 말했다.
“저는 오늘 반도체 산업에 관한 토론을 하는 자리에 나와 투자자분들의 답답함을 이곳에서 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닙니다. 토론보다도 어쩌면 세이지증권의 생각을 시청자분들은 더욱 궁금해하실 겁니다.”
아나운서는 애처롭게 느껴질 만한 목소리로 최석영을 향해 애원했다.
오늘 최석영이 자리한 방송은 앞으로 반도체 산업이 어떻게 될 것이냐는 것을 가지고 토론하는 방송이었다.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지금 상황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예상하는 자리로 학계와 산업계의 전문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는 자리였다.
그곳에 특이하게도 세이지증권의 최석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도체 산업과 최석영과는 관계가 깊지 않았다.
있다면 삼선전자와 하이식스의 주가가 어떻게 될지를 이야기하는 게 전부일 정도로 최석영과 지금 자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토론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물론이고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최석영의 입을 주목했다.
마치 그가 오늘 자리의 주인공인 것처럼 모두의 시선이 최석영에게로 쏠린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장의 몰락을 정확히 세이지증권은 예상했었다.
그리고 몰락을 예상했다면 해결 방법도 알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모두 가졌다.
지금 이 터널의 끝을 아는 사람은 세이지 증권이 유일하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최석영은 자기에게 향하는 시선들을 돌아본 후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는 반도체 산업만을 주시하고 계산하는 곳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산업을 확인하고 인과관계를 따져 가능성만을 예측하는 곳이지요.”
최석영은 서두에 자기들은 반도체 산업의 전문가가 아님을 이야기했지만, 더욱 밝은 눈빛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낮은 탄식과 함께 계속 이야기했다.
“저희가 아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일본이 틀어쥐고 있는 것을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 저희가 아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최석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나운서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대표하여 최석영에게 물었다.
“일본이 틀어쥐고 있는 거라면 반도체 공정에 들어가는 자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지금 일본이 그걸 틀어쥐고 제재를 가하여 반도체 공장이 멈추느니 마느니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걸 해결한다면 일본에 휘둘리지 않게 될 겁니다.”
아나운서는 최석영의 말에 잠시 최석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여기 계시는 분 중에 모르는 분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나운서는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뜻으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돌아봤다.
자리에 있던 각계의 전문가들은 아나운서의 눈빛에 모두 같은 뜻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그걸 누가 몰라서 그러는 거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마치 본인만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 최석영의 모습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최석영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문제가 단순하면 답도 단순하게 나오는 겁니다. 저들이 물건을 쥐고 풀지 않아 문제가 된다면 해답은 우리가 원하는 물건을 가지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일본을 통해서건 아니면 다른 곳에서건 말입니다.”
“다른 곳이요?”
아나운서는 잠시 고개를 돌려 반도체 산업의 전문가인 교수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분명 제가 이야기 듣기로는 국내 업체에서는 조건에 충족하는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게 맞는 건가요?”
교수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네. 국내 업체는 반도체 회사들이 원하는 순도를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일본만이 고순도의 제품을 생산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독일이 같은 순도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교수의 대답에 아나운서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세이지증권의 말대로 독일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면 해결되는 것 아닌가요?”
아나운서는 기대에 찬 눈으로 교수를 바라봤다.
그러나 교수는 여전히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것도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쉽지 않다고요? 어째서 그렇지요?”
“일본이 처음 이런 일을 벌일 것을 알고 있었다면…… 네. 말씀대로 독일 제품을 수입하여 진행하면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습니다.”
교수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최석영을 바라보고 마치 잘 모르는 대학원생을 가르쳐 주겠다는 듯한 말투로 설명했다.
“반도체 공정은 매우 민감한 공정입니다. 같은 성분이라도 생산한 곳의 지역과 생산 시기의 날씨까지 따지는 자재도 있을 정도이지요. 그래서 99%가 아닌 소수점 다섯 자리까지 9냐 여섯 자리까지가 9냐를 놓고 따집니다. 즉, 99.999999%는 사용 가능해도 99.99999%짜리 자재는 사용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게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겁니까?”
아나운서의 질문에 교수는 고개를 돌려 아나운서를 바라보고 설명했다.
“물건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반도체 공정에서는 물건의 생산 여부만을 놓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수율이 더 중요한 게 반도체입니다. 하나의 판에서 몇 개를 살릴 수 있느냐가 생산의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일반인들이 느끼기에는 두 개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소수점 한자리 차이로 수율이 수십 퍼센트나 차이가 나게 됩니다. 한 판에 100개가 나올 게 30개, 20개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수는 다시 최석영을 바라보고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독일의 경우에는 일본과 같은 품질의 물건을 생산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수준의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라인에 적용하기 전에 테스트하고 수율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게 적어도 두 달에서 석 달이 소요됩니다. 지금 계약을 맺어 물건이 들어와도 석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라인에 적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건을 가지고 오기 위한 협상 단계는 물론이고, 독일 회사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석 달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교수의 말에 아나운서는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교수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어렵다고 말씀하신 거군요.”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유일한 방법은 일본에게 부탁하는 것 외에는 선택권이 없는 상태입니다.”
교수가 딱 잘라 이야기하자 아나운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저렇게 다 이야기해도 되는 겁니까?”
한진영은 이야기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형 탁자 오른쪽 대각선으로 서규철 대통령이 자리하고 앉아 화면을 눈짓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우리 계획인 독일 쪽에 물건이 있다는 것을 저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서규철의 말에 한진영의 왼편에 앉아있던 선강그룹의 최대일 회장이 동의했다.
“굳이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잖아.”
한진영은 서규철과 최대일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계획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대로 저렇게 교수라는 사람이 나서서 우리 이야기를 헛소리라고 말해준 덕분에 나중에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게 될 테니 오늘 방송은 우리에게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긴 그렇겠다.”
최대일은 한진영의 말을 듣자 이번에는 한진영의 말에 동조했다.
“안 된다고 저렇게 말한 일을 해내면 효과는 더 좋을 수는 있겠다. 어려운 일을 해낸 게 될 테니까.”
최대일은 말을 하고 서규철의 눈치를 살폈다.
서규철은 그런 최대일의 시선을 모른 척 흘리고는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생각입니까? 내부에서 난리입니다. 당에서도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볼멘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가는 잘못하다가 탄핵당할지도 모릅니다.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하하하.”
서규철은 웃는 얼굴로 한진영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게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최대일과 한진영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서규철이 받는 압박도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최대일은 서규철의 모습에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한진영에게 말했다.
“그냥 이쯤에서 오픈하자. 반도체 가격도 충분히 올랐고 일본 놈들도 여기서 골탕 먹이는 것도 좋을 것 같으니 말이야. 더 뜸을 들이다가는…….”
최대일은 서규철을 잠시 살피고는 떠듬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여러 사람이 피곤해질지도 몰라. 나는 물론이고…… 자네도 그렇고…… 여러 사람이…….”
대통령이 불편해하지 않냐는 뜻을 전한 최대일이었다.
이제 막 집권기를 가진 데다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한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일은 한진영에게 그만하자는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의 표정은 처음 청와대에 들어왔을 때와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평안한 모습 그대로 화면을 바라본 채로 이야기했다.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다고? 그러면 여기서 더 뜸을 들이자고?”
“네.”
한진영은 놀란 듯한 최대일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신중한 표정의 서규철을 바라본 채로 설득했다.
“불편하신 것 충분히 이해됩니다. 저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서 힘든 상황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에서도 공격받고 계시지요. 사실 집권 초기라는 힘마저 없으셨다면 버티지 못하셨을 겁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서규철은 흥미롭다는 듯이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최대일은 한진영의 말에 기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임기제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대한민국 서열 1위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 때 돌아올 것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는 편이 좋은 위치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지난 군부 시절만큼 서슬 퍼런 존재는 아니었다.
그땐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회사를 날려버리던 시절이었기에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부드럽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치 없이 이말 저말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겪은 서규철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한진영이 최대일보다 서규철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난 시절 집권 5년을 지켜봤기에 서규철 앞에서 거침없이 이야기한 것이었다.
서규철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해도 다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애매하게 멈출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멈추게 된다면 분명 일본은 지금과 같은 일을 또 하겠다고 나설지 모릅니다.”
“또 똑같은 일을 하겠다고 나선다고요?”
“네. 분명 그럴 겁니다.”
한진영은 단호하게 딱 잘라 결론부터 이야기한 후 설명했다.
“그들은 혼란한 우리나라 상황을 보고 자기들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이용하여 자기네 나라 내부를 단속할 겁니다. 자기들의 힘이 이렇게 강하다는 것을 주변국의 모습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주면서 말입니다.”
“그래소 똑같은 짓을 또 한다 이 말이군요. 여기서 어설프게 끝을 낸다면요.”
“네. 그러니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저들과 비슷한 불매운동을 벌여 우리를 건드리면 너희가 더 많은 피를 흘릴 거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불매운동? 우리를 건드리면 너희가 더 큰 피를 흘린다?”
서규철은 한진영의 말을 따라 읊은 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최대일은 한진영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본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인다는 생각할 줄은 생각도 몰랐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서규철이 생각에 잠긴 사이 최대일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매는 철저히 소비재와 연관되어 진행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의류나 음식과 같은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만한 제품을 중심으로 잡아 진행하면 됩니다. 특히, 이번 제재를 적극 지원하는 극우 업체들 위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산업생산에 필요한 자재들을 공급하는 일본 업체와는 문제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이번 무역 제재에 불매운동을 통해 그들에게 주의를 줄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여차하면 너희와 거래를 끊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라는 이야기인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차후 그들과 거래할 때 조금 더 편한 위치에서 거래를 진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최대일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까지 오히려 을인 일본 기업에 끌려다녔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기까지 했다.
“좋습니다.”
서규철은 마음을 정한 것인지 무릎을 치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버티고 그사이 우리도 똑같이 불매운동을 펼치도록 합시다. 이참에 아예 싹을 잘라 다시는 우리를 상대로 허튼짓하지 못하게 만듭시다.”
서규철의 말에 최대일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서규철과 최대일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알맹이가 여물어 수확할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와 같은 기분이 든 한진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