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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456화 (456/650)

456화 사업가로서의 당연한 요구

“최대일 회장님께는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번 일을 위해 처음 찾아간 곳은 삼선전자였습니다.”

한진영은 최대일을 돌아보고 미안하다는 뜻이 남긴 고갯짓을 건넸다.

최대일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마주 고갯짓했다.

뭐가 됐든 결과적으로 삼선전자는 지금 곤란함을 겪고 있었으며, 자기는 높아진 메모리 가격에 이제 수금만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일은 이무용을 살짝 살폈다.

이무용은 마음의 병이 얼굴에까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표정이 지금 삼선전자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하이식스는 일본과 독일에서 들어온 물건이 창고에 쌓여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무역 제재가 계속된다고 해도 하이식스는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삼선전자는 벌써 생산량을 줄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메모리 업계에 몇 차례 있던 위기와 미국과 일본의 메모리 업계를 무너뜨렸던 치킨게임에서도 물량을 줄이지 않았던 삼선전자였다.

과거의 삼선전자는 오히려 생산량을 늘려 경쟁자들을 몰락시킬 정도로 물량 면에서는 압도적인 체급 차를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산량을 늘리고 싶어도 늘리지 못했다.

오히려 생산량을 줄이며 라인이 끊기는 것을 최대로 막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최대일은 앞에 놓인 차를 홀짝거리며 이무용을 곁눈질했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형동생 사이라고 하더라도 경쟁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삼선전자의 위기는 하이식스의 기회였다.

지금 자리에서 일이 잘 풀리더라도 삼선전자가 본래대로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그로 인해 올라간 메모리 가격으로 하이식스는 엄청난 이득을 얻을 게 뻔한 상황이었다.

최대일은 이번 기회로 인수에 쏟아부은 돈을 모두 회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무용은 웃음을 참지 못해 입꼬리를 실룩거리는 최대일의 모습에 속이 쓰린 것을 감추지 못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위치가 완전히 바뀌고 만 것이었다.

이무용은 한진영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제가 바보 같은 짓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순순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 이무용의 모습이었다.

서규철은 그런 이무용의 뒤에서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한 사장님. 삼선전자가 위기에 빠지면 우리나라 경제도 함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한 사장님께서 방법을 찾아주실 수 없으십니까?”

재차 부탁하는 서규철이었다.

집권 초기의 대통령이 이렇게 부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것도 그룹이 아닌 일개 증권사 사장을 향해 부탁하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만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한진영을 향해 부탁하는 이유는 한진영이라면 방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됐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두 번이나 부탁하는 서규철의 모습에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슬쩍 최대일을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제일 좋은 방법이요? 그게 뭐입니까?”

서규철이 이무용의 어깨를 짚은 채로 한진영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이무용도 어깨로 전해지는 서규철의 손아귀 힘을 느끼며 한진영에게 시선을 모았다.

“제일 좋은 방법은 하이식스에서 보유하고 있는 일본산 제품을 넘기고 바로 독일산 제품으로 생산을 하는 겁니다.”

“그건 안 됩니다.”

최대일은 한진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대했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서규철이 최대일을 바라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순히 삼선전자가 밉다거나 설득이 부족한 이야기를 꺼내면 서규철이 진압할 마음으로 물은 것이었다.

최대일은 서규철에게서 느껴지는 서늘함에도 굴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당장 투입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바로 넣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장난 같은 말입니까?”

서규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최대일은 그런 서규철의 목소리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새로운 자재를 라인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순차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한 번에 모든 라인에 기존 자재를 빼고 새로운 자재를 투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따져봤을 때 지금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일본산 제품의 양은 딱 독일산으로 라인을 교체할 수 있는 양입니다. 저희가 삼선전자에 물건을 빼주면 저희 라인이 멈춥니다.”

최대일은 말을 마치고 살짝 한진영을 바라봤다.

서규철과 이무용은 최대일의 시선이 왜 이런 말을 꺼냈냐며 한진영을 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사실은 잘했냐는 확인을 받기 위한 시선임을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지금의 말을 한진영이 미리 최대일에게 알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한진영은 최대일과 통화하여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자기가 하이식스를 걸고넘어질 거라는 걸 미리 알렸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이런 말을 하라고 한진영이 직접 알려준 것이었다.

그래서 최대일은 한진영의 말이 나오자마자 논리정연하게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최대일의 성격상 서규철 앞에서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한진영의 계획에는 최대일의 반대가 있었고 그걸 위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 계획을 이어갈 최소한의 조건이 성립됐다고 한진영은 생각했다.

“역시 안 되는군요. 그렇다면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차선이 있다는 말입니까?”

자기에게 더욱 깊게 빠져드는 서규철과 이무용을 바라보고 한진영은 살짝 미소 지은 후 이무용을 향해 이야기했다.

“독일 쪽 물건을 구해드리겠습니다. 대신 필요한 게 있습니다.”

“필요한 거라니요?”

“이번에 매각하려고 하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 지분을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뭐라고요?”

“아마 계획은 보유하고 있는 전체 지분 3% 중 절반인 1.5%만 매각을 계획하고 계실 겁니다. 저희에게 3% 전량 넘겨주십시오. 1,200만주 전부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무용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는 이무용에게 더 황당하게 다가왔다.

“4년 전 취득하셨을 때의 가격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보세요. 한 사장. 지금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제가 지금 장난하는 거로 보이십니까? 7,000억짜리 장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분위기가 날카로워짐을 느낀 서규철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 최대일을 돌아봤다.

최대일은 이무용만큼이나 당황한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규철은 최대일의 표정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한진영의 발언이 폭탄발언임을 깨달았다.

한진영은 양손을 들어 올리고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저도 명분이 필요합니다. 이번 일을 현장에서 발 벗고 뛰어다닌 이는 기풍그룹의 이성우 사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저와 친구이기도 하지만 공적으로는 기풍그룹의 후계자이지요. 그 친구가 그렇게 발 벗고 뛰어다닌 이유는 제 부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하더라도 일본과 독일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며 다른 이들은 구하지 못한 걸 구해오는 일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한진영은 삼선전자도 구하지 못한 걸 자기가 구했음을 은연중에 흘리듯이 말했다.

그리고 얼굴이 찌푸려지는 이무용을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선강은 기풍에게 이차전지 사업에 참여를 약속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약속을 꼭 지킬 생각입니다.”

최대일이 한진영의 질문에 대한 답을 건네자 한진영은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이무용을 다시 돌아보고 말했다.

“삼선은 무얼 내놓으실 생각이십니까?”

“꼭 뭘 내놓아야 해준다는 이야기입니까?”

“부회장님.”

한진영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이무용을 바라봤다.

“제가 아무렴 애국심이 남다르다고 해도 남의 회사 잘되는 일까지 무상으로 해야 하는 호구처럼 보이십니까?”

“그게 무슨…….”

“아닌 말로 저는 할 만큼 다했습니다. 미리 알리기도 했고 준비도 했으며, 오히려 일본에게 한 방 날릴 수 있는 기반까지 다 마련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삼선전자의 어려움마저 맨입으로 해결해 달라고요? 그건 너무 염치가 없는 일 아닙니까?”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서규철을 잠시 올려다봤다.

최대일은 한진영의 모습에 기겁할 만큼 놀랐다.

그리고 한진영이 이렇게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방송에 나온 거구나.’

세이지증권의 최석영이 방송에 나온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된 최대일이었다.

아무리 자기의 업적을 알리고 싶다고 하더라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심이 들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고 한 번에 이해가 됐다.

국민들 모두에게 누가 이번 일을 위해 움직였는지를 알려주는 것.

그래서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

한진영이 삼선전자의 부회장과 새롭게 대통령이 된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상황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임을 최대일은 알게 됐다.

“삼선물산이 있습니다. 그곳에 기풍제품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한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기풍과는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이야기는 저와 하셔야 합니다.”

쾅!

이무용은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BSML 주가가 얼마인지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자리에 서규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화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른 이무용이었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었고, 그 정도로 한진영이 이무용의 화를 돋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작 한진영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BSML의 주가가 얼마인지 잘 아시면서 삼선전자 반도체 라인이 멈췄을 때 얼마나 손해 볼지는 계산하지 못하시나 봅니다.”

“우리가 멈추면 대한민국이 멈추는 거야!”

“누가 먼저 멈추는지 계산도 못 하는 겁니까? 대한민국이야 아프겠지만, 삼선전자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산산조각이 날 겁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자존심 세우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삼선 공화국이라고 부른다고 진짜 삼선이 없으면 우리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줄 안 겁니까?”

한진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야기한 후 서규철을 올려다봤다.

서규철도 이무용의 이번 발언에 실망한 모습을 보였다.

“삼선전자가 망하면 큰일이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망하는 건 아닙니다.”

이무용의 어깨에서 손을 뗀 서규철은 본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 의미에서 오늘 자리를 마련하여 해결책을 찾아볼까 했더니 안 되겠군요.”

“각하.”

이무용이 서규철을 향해 애달프게 불렀다.

서규철은 그런 이무용의 부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각하라니요? 지금이 아직도 군부독재 시절인 줄 아는 겁니까?”

이무용은 자기편인 줄 알았던 서규철이 눈살을 찌푸리고 불편한 모습을 숨기지 않자 당황했다.

서규철에게서는 중재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무용은 상황이 자기에게 급격히 나쁘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이식스는 이상이 없는 게 맞죠?”

“네. 하이식스는 정상 가동 중이며 생산량을 더욱 늘리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현재 라인 가동률은 90%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우리 산업에 피해가 없어야 하니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대일이 서규철을 향해 인사하자 서규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혹시 원하는 게 있습니까? 있다면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들어드리도록 할 테니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

“아닙니다. 미안해서 그러는 거니 부담 가지지 마세요.”

서규철은 점점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는 이무용을 돌아본 후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좋은 의미로 일을 했는데 내가 욕심을 냈습니다. 한 사장님께 너무 많은 걸 요구하려 한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도움을 드려야 하는데 저의 계획 속에는 삼선전자가 존재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조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사업가로서 당연한 요구하신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이무용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모습을 보고 애가 탔다.

“잠시만. 잠깐만 제 이야기 좀 들어봐 주십시오.”

여기서 돌아가면 삼선전자는 정말로 라인이 멈춰버리기 때문에 어떻게든 결과를 받아서 와야 한다고 보좌진에게 귀가 따갑게 이야기 들은 이무용이었다.

회장이자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 그가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던 이무용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한진영에게 말했다.

“BSML 주식을 내놓으면 원료를 구할 수 있는 겁니까?”

한진영은 이무용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대답했다.

“네. 구할 수 있습니다. 하이식스의 물량을 확보하며 연결해 놓은 라인을 통한다면…… 가능합니다.”

“저희가 원하는 만큼 대줄 수 있는 겁니까?”

“그것도 가능할 겁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습니다. 미리 만들어 놓은 걸 대주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한진영은 최대일을 잠시 바라보고 웃었다.

최대일과 한 약속을 지켰다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삼선전자를 완전히 배제한 채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던 최대일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 시간 동안 최대한 이득을 취하겠다는 것이 최대일과 하이식스의 계획이었다.

최대일은 약속을 지켜준 것에 감사의 눈짓을 했고, 한진영은 그 눈짓을 받은 뒤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이무용에게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부회장님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게 있으신 것 같습니다.”

생각에 잠겼던 이무용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무용을 똑바로 바라본 채 이야기했다.

“저는 BSML 주식을 강탈하는 게 아닙니다. 돈을 내고 정당히 사겠다는 거니 그렇게 곡해해서 제 뜻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애초에 매각하려고 한 것 아닙니까? 주머니에 있는 걸 뺏는다는 듯이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무용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떻게 정당히 사겠다는 것이 4년 전 자기들이 투자했던 가격에 사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던 이무용이었다.

그리고 전체 지분 3% 중 자기들은 1.5%만 내놓을 생각이었다는 것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이무용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무용은 한진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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