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의심의 싹이 돋아난다
원탁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는 여섯 명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곤란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들은 지금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들에게 지금과 같은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손해가 막심하니 우리의 제안을 더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외국인들의 손해가 심하다는 것을 오히려 이용하는 게 어떠냐고 생각한 메리트증권의 대표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자리에 있는 다른 증권사 대표들은 메리트증권의 말에 고개를 젓기만 했다.
“돕고 싶기야 하겠지요. 하지만 도울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손해를 봤다는 게 근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손해를 봐서 다시 주가를 끌어내릴 근거 말입니다.”
코리아투자증권의 대표는 메리트증권의 대표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말했다.
메리트증권 대표는 코리아투자증권 대표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근거는 무슨 근거?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코리아투자증권 대표는 메리트증권 대표의 혼잣말과 같은 말에 발끈하여 소리를 내지르려 했다.
이렇게 무식한 사람과 함께 앉아 있는 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던 남부증권 대표가 먼저 나서며 괜한 싸움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자자. 그러지들 마시고 다시 한번 지금 상황을 잘 따져보도록 합시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메리트증권 대표가 자기를 쳐다보고, 소리를 지르려던 코리아투자증권 대표 또한 자기를 바라보자 남부증권 대표가 계속 이야기했다.
“공매도로 인해 지금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닙니다. 분명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의 곤란함을 겪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들을 끌어들여 어떻게든 상황을 되돌려야 합니다. 그게 억지로 주가를 찍어 누르는 게 됐든 아니면 허무맹랑한 찌라시를 흘리든 말입니다.”
남부증권의 말은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다들 남부증권의 말에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그래서 어떻게 지금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홍우증권 대표의 말에 남부증권 대표의 입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상황을 정리한 그도 방법까지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한동안 원탁에는 다시 침묵만이 감돌았다.
아무리 머리를 맞대 보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더 앉아있어 봤자 소용이 없다고 느낀 코리아투자증권의 대표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다고 바뀌는 것은 없으니 우선 돌아가 각자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각자 다른 외국 증권사들과 친분이 있으니 그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정부 관계자들이나 언론 쪽과도 계속 만나며 방법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결국 자리에 계속 있어봤자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이곳에서 계속 있어봤자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돌아가더라도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쉬지 않고 궁리하고 협회 회원사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도록 약속했다.
그리고 방법을 찾거나 어떤 변화가 있을 때 다시 자리할 것을 이야기하고 마무리했다.
모두 다음에 만날 것을 이야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남부증권 대표가 잠시 손을 들어 떠나려는 사람들을 막았다.
“잠시만요.”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던 사람들은 남부증권 대표의 말에 잠시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코리아투자증권 대표는 손을 들고 있는 남부증권 대표를 향해 물었다.
남부증권 대표는 여전히 손을 들어 올린 채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절대 먼저 물량을 풀지 않는다. 청산절차는 여기 있는 회원사들이 동시에 혹은 약속에 의해 순서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부증권 대표의 말에 자리에 있던 다른 대표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손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겠다고 동료를 배신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저희 코리아투자증권은 남부증권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런 제안은 제가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동의합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동의해 나갈 때 마지막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던 메리트증권 대표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남부증권 대표는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메리트증권 대표를 향해 물었다.
“혹 메리트증권에서는 이런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다섯 쌍의 눈이 모두 자기에게 모이자 메리트증권 대표는 급히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불만이 있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는 건 아닙니다. 단지…….”
“단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시는 겁니까?”
“각자 회사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입은 피해가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꼭…….”
“지금 메리트증권은 협회 회원사들이 정한 룰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메리트증권 대표는 자기를 향해 날 선 시선을 보내는 다른 증권사 대표들을 둘러보고 급히 주눅 든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키겠습니다. 약속을 저희도 지키겠습니다.”
메리트증권 대표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는 다른 증권사 대표들을 둘러보고 다시 약속했다.
“절대 먼저 파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협회에서 정한 룰에 따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메리트증권이 직접 자기 입으로 협회의 룰을 따르겠다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그러나 시선은 거뒀다고 하더라도 그들 마음속에는 의심 싹이 돋아나고 말았다.
***
브릿지랜드와 홀리스 인베스트먼트의 입국은 극비리에 진행됐다.
헤지펀드가 가지는 이미지보다 대한민국에서의 두 곳 이미지는 현재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을 만큼 험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이지증권조차도 두 곳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띵동.
철컥.
“들어와.”
가운을 걸친 채 월패드를 통해 문을 열어준 한진영은 현관 쪽을 향해 소리치고 천천히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잠이 덜 깬 한진영은 물컵에 물을 담아 마신 뒤 찾아온 조지훈을 향해 몸을 돌리고 말했다.
“조 실장이 고생하네.”
“아닙니다.”
조지훈은 그래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은 한진영밖에 없다는 생각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아니야.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깨워야지. 그리고 다음부터는 전화부터 하지 말고 그냥 집으로 바로 와. 번잡스럽게 전화하느니 말이야.”
“그래도 한밤에 바로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내가 괜찮다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괜찮은 거야.”
한진영은 마셨던 물컵을 싱크대에 넣고는 천천히 옷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 전 통화했던 내용을 다시 조지훈을 향해 확인했다.
“그러니까 브릿지랜드의 레이 젠슨 회장하고 홀리스 인베스트먼트의 바비 힉스 CIO가 회사로 찾아왔다고? 이 시간에?”
“네.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회사로 왔다고 했답니다.”
“어디 있다가 왔다고 해? 미국에서 온 거는 아닐 것 같은데 말이야.”
한진영은 슬쩍 조지훈을 돌아보고 물었다.
“본인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그들의 마지막 행선지가 일본이었습니다. 아마 일본에서 바로 넘어온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바로 넘어왔다. 이 시간에?”
한진영은 옷방 앞에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벌써 2시를 넘어가는 중이었다.
조지훈에게 레이 젠슨 등이 회사로 찾아와 뵙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가 30분 전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최소 10시가 넘은 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고 내일 와도 되는데 굳이 밤에 비행기를 타고 나를 만나러 이 시간에 왔다?”
한진영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옷장에서 조지훈이 건네준 옷을 몸에 걸쳤다.
그리고 거울에 옷을 비춰보고는 조지훈을 향해 웃었다.
“급한 모양이니 거기에 맞게 움직여 줘야지. 가자.”
“그들이 어떤 이유로 온 건지 혹시 알고 계신 겁니까?”
여유로운 한진영의 모습에 조지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헤지펀드의 두 거두가 한진영을 이렇게 다급하게 찾은 이유를 비서실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가며 말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뻔하지. 나한테 부탁하기 위해서 아니겠어? 그것도 이런 시간에 찾은 것을 보니 매우 중요한 부탁일 것 같고…… 헤지펀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할 만한 게 뭐겠어?”
“돈이요?”
“그래. 잘 아네.”
한진영이 문 앞에 서서 몸을 돌려 조지훈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럼 답은 나왔잖아. 저들은 돈을 부탁하러 나한테 온 거다. 그것도 이 시간에 찾아올 만큼 다급하게…… 그리고 저들은 지금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럼 설마 저들도 증권사 협회와 마찬가지로 지수 부양을 중지하길 바라서 그러는 건가요?”
“하하하. 이 사람아. 상대를 봐가면서 그런 말을 해야지. 천하의 브릿지랜드 레이 젠슨 회장이 새벽에 나를 찾아와서 그런 부탁을 하겠어?”
“그럼…….”
“급전이 필요해서겠지. 그리고 급전이 나올만한 것과 나와 관련이 있을 테고…….”
한진영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진영이 움직이자 조지훈은 김 기사에게 차를 준비하라는 연락을 하고는 한진영의 뒤를 급히 따랐다.
***
새벽녘의 도로는 한산하기만 했다.
서울숲 근처에 자리한 한진영의 집에서 회사까지 막히는 것 없이 단숨에 달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진영이 아무리 조지훈의 연락에 바로 준비하고 나왔다고 하더라도 기다리던 사람 입장에서는 시간이 더디게만 지나가는 듯했다.
세이지증권의 회의실에서 기다리던 바비 힉스는 조바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회의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거참. 이제 그만 좀 앉게. 30분이면 온다고 하지 않았나? 얼추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앉아.”
“회장님. 세이지 한 사장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그거야 한 사장 마음이니 내가 알 수가 있나.”
“회장님.”
바비 힉스는 답답한 표정으로 레이 젠슨에게 다가가 양손을 내보였다.
그러나 레이 젠슨은 그런 바비 힉스의 모습에도 태연한 모습을 유지한 채 문만을 바라봤다.
바비 힉스는 레이 젠슨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회의실을 서성였다.
그렇게 약 5분 여가 흐르고 나자 레이 젠슨과 바비 힉스가 기다리던 한진영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한진영은 반가운 표정으로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아닙니다. 우리가 예의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시간에 온 게 잘못이지요.”
레이 젠슨은 오전에 일본 측을 만났을 때와 다른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살갑게 웃었다.
바비 힉스는 레이 젠슨의 말투와 표정에 잠시 멈춰 그를 바라보다 한진영에게 달려들었다.
“한 사장님. 보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새벽 3시에 바비 힉스 CIO께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군요. 우선 앉으시지요.”
한진영은 바비 힉스와 손을 잡은 채로 의자 근처로 다가가 자리에 앉게 한 후 레이 젠슨에게도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에 앉으며 두 사람을 향해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이 시간에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한진영이 말을 하고 시계를 바라보자 레이 젠슨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군요. 새벽 3시에 누구를 찾아가기는 저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아닙니다. 시간은 뭐 중요한 게 아니지요. 대한민국에서 투자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한 달에 두어 번 이 시간에 일어나 뉴욕시장을 바라보고는 했으니까요. 아시겠지만 논팜과 같은 실업률 지표나 금리 결정 같은 빅 이벤트 때는 그쪽 시각에 맞춰 움직여야 하니까요.”
한진영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레이 젠슨을 향해 물었다.
“이곳에 오신 이유가 저는 많이 궁금합니다. 쉬지도 못하고 두 분을 이곳으로 오게 한 이유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레이 젠슨이 살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바로 본론을 이야기해야겠군요.”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인 레이 젠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기풍 등에 투자한 RCPS를 세이지가 인수해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상환전환우선주를요?”
한진영은 뜻밖이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실 한진영은 그들이 자기를 찾기 전부터 그들에게 선택권은 상환전환우선주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장 현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게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받아줄 사람 또한 자기밖에 없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레이 젠슨을 바라보고 물었다.
“상환우선주를 저보고 사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두 분이 보유하고 있는걸요?”
한진영의 질문에 바비 힉스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걸 인수해 주시고…… 거기에 더해.”
“더해? 뭐가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채널을 세이지에서 인수해 주십시오.”
“홀리스 인베스트먼트의 아시아채널을요?”
한진영의 말에 잠시 가만히 있던 레이 젠슨이 입을 열었다.
“홀리스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것도 넘기고 싶습니다.”
“브릿지랜드도요?”
한진영은 놀란 얼굴로 몸을 잠시 뒤로 물리고 레이 젠슨과 바비 힉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시아 채널을 넘긴다는 뜻은 그동안 아시아 쪽에 구축해놓은 모든 인프라를 넘긴다는 뜻이었다.
자회사는 물론이고 아시아 파트를 키워내며 일궜던 인력과 각국 정부와 만들어 놓은 라인까지 모든 걸 다 세이지증권에 팔겠다는 이야기였다.
한진영은 착잡한 표정의 레이 젠슨과 바비 힉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한순간의 실패로 너무 많은 것을 잃은 표정의 두 사람의 얼굴에서 이제는 피곤함마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