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3년이면 충분하다
바비 힉스는 함께 온 레이 젠슨을 내려다봤다.
‘노인네. 매번 이런 건 나한테만 시키지.’
브릿지랜드가 홀리스에 비해 규모가 더 컸다.
그래서 바비 힉스는 레이 젠슨의 이런 행동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아쉬운 소리를 하는 역할만 시키는 레이 젠슨이 얄밉게만 느껴진 바비 힉스였다.
바비 힉스는 레이 젠슨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진영을 향해 애원했다.
“한 회장. 한 회장이 좋은 회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투자했고요. 그러니 한 회장이 이번에 우리 좀 도와주면 안 되겠습니까?”
“좋은 회사였죠.”
레이 젠슨은 한진영의 말에 감았던 눈을 떴다.
“마치 지금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레이 젠슨의 목소리에 한창 한진영을 향해 애원하던 바비 힉스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눈을 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지만 바비 힉스는 꾹 참고 레이 젠슨의 말을 따라 한진영에게 질문했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들립니다. 이제는 좋지 않다는 겁니까?”
“네. 좋지 않습니다.”
“정말…… 정말 그렇게 느껴서 하는 이야기입니까?”
바비 힉스는 당황한 목소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냥 뉘앙스가 그렇게 느껴져 던진 질문인데 진짜로 그렇다는 말에 오히려 당황한 것이었다.
바비 힉스만큼은 아니지만 레이 젠슨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진영의 성격으로 보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이유는 두 분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말고 그냥 이야기해주세요. 도대체 코인 그라운드가 안 좋은 이유가 뭡니까?”
바비 힉스가 괜한 말로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이유나 말하라고 소리쳤다.
한진영은 시간이 갈수록 성격이 급해지는 바비 힉스의 말에 짧게 미소 짓고는 대답했다.
“저와 코인 그라운드가 헤어진 이유 때문입니다.”
“코인 발행?”
레이 젠슨이 한진영의 말에 무심한 듯이 반응했다.
바비 힉스는 레이 젠슨을 잠시 돌아보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정말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까?”
“네. 저는 코인 그라운드가 코인을 발행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바비 힉스는 한진영의 대답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그건 나도 그래요. 아니. 코인은 뭐 하러 발행하겠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코인을 발행하지만 않으면 다시 들어올 생각이 있습니까?”
짜증 섞인 말을 내뱉던 바비 힉스는 레이 젠슨의 말에 한진영을 빤히 바라봤다.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한진영이 다시 코인 그라운드에 투자할 생각이 있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두 쌍의 눈을 번갈아 바라본 후 짧게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레이 젠슨이 한진영의 말에 반가운 모습으로 무릎을 쳤다.
바비 힉스 또한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이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솔직히 싫다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분명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바비 힉스는 마치 한진영이 큰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즐거워했다.
레이 젠슨은 그런 바비 힉스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웃고는 말했다.
“그렇게 결정하셨으니 돌아가서 제가 타일러 버드 CEO를 설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확답을 받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저는 오시기 전까지 돈을 마련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바비 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영을 향해 손을 내밀어 치켜세우는 말을 했다.
“역시 한 회장님은 시원시원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젊은 나이에 어엿한 기업을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한진영은 바비 힉스의 말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바비 힉스는 일어선 채로 고개를 돌려 레이 젠슨을 바라보고 말했다.
“회장님. 어서 가시죠. 지금 떠나야 캘리포니아에 있는 버드 CEO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바비 힉스의 말에 레이 젠슨도 동의했던지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영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금방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비 힉스와 함께 한진영의 사무실을 나섰다.
밖에까지 나와 인사한 한진영의 곁으로 조지훈이 다가왔다.
“회장님. 홍 사장을 연결할까요?”
“홍대민 사장에게 연결한다고? 왜?”
한진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조지훈을 바라봤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코인 그라운드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브릿지랜드와 홀리스가 코인 그라운드의 타일러 버드 CEO를 설득해 온다면 말입니다. 지금 나가는 모습으로 봐서는 가자마자 설득해서 올 것 같은데…… 그렇다면 미리 홍 사장에게 언질을 줘서 준비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혹시…… 제가 너무 앞서간 건가요?”
상사의 심중을 깨닫는 것 이상으로 앞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조지훈은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앞서나가다가는 상사가 불편해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조지훈이 한진영의 눈치를 살피자 한진영은 웃으며 조지훈의 등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조 실장이 잘못 짚었어.”
“네? 제가 잘못 짚었다고요?”
“그래. 금방 돌아온다고? 하하하. 그렇지 못할 거야.”
“설득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한진영은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앞서 걸어가며 이유를 짧게 말했다.
“타일러 버드를 설득하지 못하니까 금방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야.”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바로 사무실로 걸어갔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레이 젠슨 등이 타고 간 엘리베이터를 바라본 뒤 급히 한진영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
한진영의 예측대로 레이 젠슨 등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했다.
조지훈은 브릿지랜드 측으로부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한진영에게 전하며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단순했다.
“욕심이 많다고 했잖아.”
한진영의 간단한 대답에 조지훈은 타일러 버드가 코인 발행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됐다.
레이 젠슨과 바비 힉스가 타일러 버드를 설득하는 도중에도 코인과 코인 그라운드의 가격은 계속 내려갔다.
12,000달러에서만큼은 멈출 줄 알았던 코인 가격은 결국 기준값이라 부르는 10,000선에 도달했다.
코인 그라운드도 하락을 멈추지 못하고 결국 60달러 선을 내주고 말았다.
월가에서는 코인의 탐욕이 끝이 났다는 것으로 코인 시장의 몰락을 기정사실로 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코인의 탈중앙화는 실패로 돌아갔다는 평이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대표 코인의 가격 단위를 바꿔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 매드스톡의 머치 버치킨스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건 미친놈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쾅!
오늘도 미국의 증권방송의 진행자는 나무배트로 머그잔을 부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코인 그라운드.
쾅!
-코인
쾅!
-이것들에 정신 못 차리는 당신들도……
쾅!
-머리가 이렇게 부서져야 정신 차릴 겁니까? 매드스톡의 말을 들으세요. 어디서 사기나 당하면서 평생 노숙자로 살기 싫다면 말입니다.
한진영은 매운맛이 가득 담겨 있는 증권방송을 바라본 채로 곁에 앉아있는 조지훈에게 이야기했다.
“나 사장이 언제쯤 들어온다고?”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이 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창운이 도착한다는 시각과 지금 시각을 계산한 뒤 대답했다.
“2시간 뒤면 공항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뒤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시했다.
“고생 많았으니까 공항에 차 보내서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와서 이야기하자고 해.”
“오늘 보고 받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어. 그동안 보고서 착실히 올라왔잖아? 오늘은 복귀하고 정리하는 자리니까 굳이 오늘 바로 듣지 않아도 돼. 비행기 오래 타서 힘들 테니까 몸부터 회복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지시를 마친 뒤 보고 있던 증권방송을 손가락질하고 말했다.
“저거 재미있네.”
“요즘 인기를 많이 끌고 있는 방송입니다.”
“그래. 인기를 끌 만해.”
“자극적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조지훈도 한진영을 따라 방송을 보면서 말했다.
방송에 나온 진행자는 거침없이 행동했고, 시청자들에게도 거침없이 대했다.
쌍방이 소통하는 방송은 아니지만, 마치 시청자들과 대화하듯이 진행하는 것이 보는 사람이 더욱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더욱 자극적인 게 인기를 끌 거야. 소재도 많아질 테고…….”
한진영은 티비에서 시선을 돌려 조지훈을 바라보고 지시했다.
“저기 방송에 후원 좀 해.”
“후원이요?”
“그래. 광고가 됐건 제작 지원이 됐건 친분을 쌓아가도록 해.”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을 잠시 곱씹은 뒤 질문했다.
“친분을 쌓으라는 말씀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저 방송을 이용할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뜻인가요?”
“이용한다고 하면 좀 너무 노골적인 것 같고…… 우리에게 호의적으로 만들어 두라는 뜻이야.”
한진영은 조지훈을 바라보다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송을 진행하면서 앉아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혼자 스튜디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다 때려 부수며 다녔다.
과거 방송들이 보여주던 정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
“네.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은 방송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먼저 사전 작업을 해놓을 필요가 있어. 지원해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지원해주도록 해. 그리고 요구는 하지 마. 지금은 신뢰를 쌓고 호감을 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조지훈의 대답에 얇게 미소 지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재미있는 상황이 많이 연출될 테고, 그 상황에서 저런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을 테니 지금부터 사전 작업을 해놓는 게 좋지.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조지훈은 한진영의 혼잣말을 들으며 화면을 돌아봤다.
스튜디오는 이제 난장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 어지럽혀져 있었다.
중간에 채널을 돌려 방송을 튼 사람이라면 지금 방송이 증권방송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만한 모습이었다.
조지훈은 저런 방송에 흥미를 느끼는 한진영이 다르게 느껴졌다.
평소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한진영이었기에 방송 또한 정적인 분위기의 분석하는 방송을 좋아할 줄로만 알았던 조지훈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방송은 정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능도 이런 예능 방송이 없을 것처럼 정신없는 화면이 계속 연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숨까지 몰아쉬는 화면 속의 진행자와 그런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한진영을 이상한 눈으로 번갈아 바라봤다.
***
나창운은 조금은 핼쑥해진 얼굴로 한진영 앞에 앉아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나창운의 얼굴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안부를 물었다.
“나 사장님. 많이 힘드셨나 봅니다. 얼굴에서 피곤이 묻어나옵니다.”
한진영의 말에 나창운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힘들긴요. 이번처럼 즐거웠던 적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힘든 건 하나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창운은 자기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얼굴 살이 조금 빠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잠자리를 많이 가려서요.”
한진영은 웃는 나창운의 표정에서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즐거웠다고 말씀하셨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우셨습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나창운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가는 곳마다 국빈 대접을 받았습니다. 장관이 나와 인사하는 건 평범했고, 볼리비아에서는 직접 대통령이 나와 협상을 진행했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제가 외교관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하하. 그 정도였습니까?”
“네.”
나창운은 한진영에게 남미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남미 상황이 심상치가 않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극우와 극좌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이념 싸움에 한창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라가 안정되지 못해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겠습니다.”
“네. 정권을 잡은 쪽에서는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서 미래를 기대하기보다는 당장 성과가 나오는 것을 원했으니까요. 그래야 차기 정권을 다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고요. 투자보다는 바로 사서 창고에 돈이 들어오는 쪽을 선호했습니다.”
“그럴 겁니다. 미래를 준비하다가는 정권 교체가 된 뒤 상대 진영의 공이 되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보다는 지금의 성과가 그들에게는 더욱 필요했을 겁니다.”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이유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창운은 상황을 설명한 뒤 본격적으로 성과를 보고했다.
“니켈 광산 다섯 곳을 인수했습니다. 그중 한 곳은 현재 생산량만으로 세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광산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곳입니다. 나머지 네 곳도 잠재적 보유량이 상당한 곳으로 평가받는 곳들이었습니다. 니켈 광산 외에 망간과 구리 등의 광산도 인수했습니다. 특히, 구리 같은 경우에는 우리 쪽에서 평가한 금액의 1/4밖에 되지 않는 가격에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헐값에 손에 넣었군요.”
“네. 완전 헐값이었습니다. 그리고 금광도 인수했습니다.”
나창운의 말에 한진영은 얼굴에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니켈 광산만을 생각하고 나창운을 보냈는데 생각 이상의 성과를 얻어왔기 때문이다.
“광산 인수 비용에 약 3조 가까운 돈을 투입했습니다. 기대수익으로는 매년 5,000억 이상을 얻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운영비 등을 제외한다면 10년 안에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겁니다.”
한진영은 나창운의 말에 가만히 웃었다.
“10년까지 가지 않을 겁니다.”
“네?”
“3년이면 본전을 뽑고 비싼 값에 물건을 넘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광산 운영에 기풍을 잘 서포트 하도록 해주세요.”
나창운이 10년을 예상한 일이지만 한진영은 3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한진영의 판단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전 세계가 원자재에 관심을 쏟는 데 3년이면 충분하지.’
지난 시절의 경험이 한진영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