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487화 (487/650)

487화 브릿지랜드를 맡기겠다

한진영과 레이 젠슨의 나이 차이는 한진영의 나이에 2를 곱한다고 하더라도 레이 젠슨의 나이가 더 많은 정도로 큰 차이를 보였었다.

레이 젠슨은 70이 넘은 나이에 이제는 노회한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도 레이 젠슨은 항상 한진영을 향해 높임말이 없는 영어 속에서도 경어체를 쓰며 한진영을 존중해줬었다.

기업 대 기업으로 만나 거래하는 입장이라서 레이 젠슨이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뜻을 레이 젠슨이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즈니스적인 관계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다.

레이 젠슨이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가 바로 이것이라고 한진영은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레이 젠슨은 한진영을 향해 먼저 편하게 말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한진영은 자기보다 까마득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하는 제안이라 싫다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진영 입장에서도 협상 자리가 아닌 이런 평범한 자리에서까지 경어를 듣는다는 것이 불편하여 레이 젠슨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상한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오늘 자리는 레이 젠슨과 같은 추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기 힘든 자리였다.

그런데 그런 곳에 레이 젠슨이 직접 시간까지 내주어 함께 온 것에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네 말대로 오늘 자리는 만남이 중요해.”

잠시 레이 젠슨이 자기를 이 자리에 데리고 오고 편하게 대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던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레이 젠슨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1년에 한 번 만남을 가지며 남부 지방의 은행들은 서로의 돈독함을 유지하려 하지. 자네는 우리 미국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나?”

“대략적인 중요 사건을 알고 있는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시험을 치기 위해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연도와 사건만 기억할 뿐 그 안에 깊숙이 담겨있는 의미까지는 완벽하게 알기는 어려우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레이 젠슨은 은근히 미소 지었다.

“모르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 말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아.”

“아닙니다. 남부 지역의 사람들의 유대감이 깊다는 것은 들은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 정도면 다 알고 있구먼.”

레이 젠슨은 한진영의 말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래. 전쟁 전에도 유대감이 깊었지만 패배한 이후 그것이 더욱 돈독해졌지. 그래서 산업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특히, 이런 자본과 관련된 일에 관해서…… 저들의 결집력은 무서울 정도지.”

레이 젠슨은 말을 마치고 다시 한진영을 돌아봤다.

“자 이제 내가 자네를 왜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알겠나?”

한진영은 단상을 바라본 채로 레이 젠슨의 말에 대답했다.

“이곳에 와서 할 일이 무엇인지는 이해했습니다. 저들과 친해져 저들에게 투자받을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젠슨 회장님께서 저를 이곳에 왜 데리고 왔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한진영은 마지막 말을 내뱉으려 레이 젠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저를 왜 이곳에 데리고 오신 겁니까?”

단상에서는 은행들의 재무 건전성을 높여야 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은행 간의 네트워크를 더욱 돈독히 하여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중이었다.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 때 겪었던 은행들의 도미노 파산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의 귀에는 그런 이야기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은 레이 젠슨에게 자기를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를 무조건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온통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 젠슨은 집착에 가까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웃었다.

“그렇게 눈에 힘주지 않아도 이야기해줄 테니까 그 눈 좀 풀게. 젊은이의 눈빛은 나이 든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이니까.”

“죄송합니다.”

한진영이 급히 사과하고 눈을 풀었다.

레이 젠슨은 눈을 비비는 한진영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쉬워.”

“네? 뭐가 아쉽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딸이 자네 또래였다면 결혼을 주선했을 거야. 손녀가 나이를 조금 더 먹었다면 손녀라도 붙여줬을 텐데 나이가 너무 애매해.”

“손녀분이 이제 고등학생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와 짝을 지어줄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래. 내 아들이 너무 늦게 결혼해서 아이를 늦게 낳은 걸 아쉬워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레이 젠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원망하는 말투로 말했다.

한진영은 생뚱맞게 딸과 손녀와 자기를 짝지어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레이 젠슨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그것과 여기에 온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오늘 자리가 커플만 입장할 수 있고 그래서 그런 겁니까?”

한진영의 말에 레이 젠슨은 가볍게 웃고는 고개를 돌려 단상을 바라봤다.

회의가 마무리되는 모습을 보이는 단상을 바라본 레이 젠슨은 무심한 듯이 한진영을 향해 이곳에 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브릿지랜드를 자네에게 맡길 생각이네.”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말을 듣고 눈을 찌푸렸다.

자기가 잘못들은 건 아닌데 너무 황당한 말이라 들리는 것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기에도 민망스러운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레이 젠슨을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오가자 레이 젠슨에 고개를 살짝 돌려 몸까지 틀어 앉은 한진영을 돌아봤다.

“왜 그런가? 별로 탐탁지 않나?”

“그게 정말입니까?”

먼저 말을 꺼내자 한진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레이 젠슨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농담이나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가?”

“농담이 아니라고 하면 더 이상합니다. 왜? 저에게? 왜?”

“하하하. 자네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네. 언제나 차갑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 로봇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는데…… 자네도 사람이었구먼.”

“로봇을 가져다 놔도 회로가 타 버렸을지 모를 겁니다.”

“하하.”

레이 젠슨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밖으로 웃음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한진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진작에 자네와 가까이 지낼 걸 왜 안 그랬나 후회하고 있어. 업무적으로 엮일 때와 다른 자네의 모습을 조금 더 일찍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자네는 생각보다 더 인간적인 사람이야.”

한진영은 레이 젠슨이 지금 하는 말들이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다.

레이 젠슨은 진지했고 정말로 브릿지랜드를 한진영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한진영은 1,20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브릿지랜드가 자기 손에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레이 젠슨은 그런 한진영을 바라보고는 조금 전까지 보여주던 모습을 완전히 지운 채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내 나이가 너무 많아. 이번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피부로 확실하게 느꼈다네. 나는…… 나이를 너무 먹었어.”

한진영은 레이 젠슨을 가만히 바라봤다.

레이 젠슨은 회한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했다.

“이제는 전처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나를 대신해서 움직여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됐고…… 차라리 후계자로 삼을 사람을 일찍 찾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어.”

후회가 담긴 목소리를 하고 이야기하던 레이 젠슨은 희망을 담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제 와서 사람을 찾기에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내 가까이에 제일 적당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네. 바로 자네. 자네가 내 후계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제가 말입니까? 이렇게 갑자기요? 저를 잘 알지 못하지 않으십니까?”

“왜 내가 자네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

레이 젠슨의 반박에 한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레이 젠슨이야말로 한진영을 가장 잘 아는 사람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레이 젠슨이 직접 이야기하여 증명했다.

“인연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자네와 함께 일을 하며 한진영이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네. 그리고 많은 것을 알아봤고…… 자네가 대학을 나와서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대학을 나오기 전에 어떤 학창 시절을 보냈는지까지…… 모두 알아봤네.”

“바다 건너에서 알아보신 겁니까?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왜 이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는 잘 알 텐데 왜 그런 걸 물어보나? 돈이면 다 된다는 것을 자네는 잘 알고 있지 않나?”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말에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자기에 대해 알아봤다는 것이 사실임을 조금 전 몇 마디 말로 바로 한진영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못 하는 일이 있다면 돈이 부족해서 못 하는 것일 뿐이다.

한진영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저에 대해 정말 제대로 알아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제가 브릿지랜드의 자산운용을 맡아주길 바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한진영의 말에 레이 젠슨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산운용을 맡긴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분명 조금 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브릿지랜드를…….”

한진영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레이 젠슨이 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레이 젠슨은 한진영의 표정을 보고 살며시 웃었다.

“그래. 이제 알겠나? 나는 브릿지랜드의 자산을 자네에게 맡기려는 게 아니야. 브릿지랜드를 맡기려는 거지.”

잠시 말을 멈춘 레이 젠슨은 한진영의 손을 잡고 부탁했다.

“브릿지랜드를 세이지에 넘기겠네. 싫다는 말은 하지 말게. 나에게는 자네밖에 선택권이 없으니까. 그리고 자네가 적임자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자네도 아는 사실이네. 자네에게 팔겠다는 것도 아니니 나에게 얼마를 내어줘야 하나 걱정할 필요도 없네. 그저 브릿지랜드라는 펀드만 살려주게. 나는 그거면 충분한 사람이야.”

레이 젠슨은 주름진 손에 힘을 주어 한진영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

조지훈은 녹초가 되어 돌아온 한진영을 향해 물을 건넸다.

“고마워.”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인사하고는 건네받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갈증이 사라지자 겨우 한진영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다.

조지훈은 다 마신 물컵을 건네받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 시간 휴식 뒤 엠파이어 호텔에서 있는 파티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엠파이어 호텔? 파티?”

한진영은 얼굴을 찌푸리고 조지훈을 바라봤다.

마치 학원에 끌려가는 아이와 같은 표정을 한 한진영은 조지훈을 향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가면 안 될까? 이제 막 회의에 참석하고 온 사람한테 뭔 파티야? 냉탕과 온탕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 감기만 걸린다고.”

조지훈은 한진영의 표정에 안타까운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할 일은 해야 했다.

“브릿지랜드 측에서 이번 파티는 꼭 참석하셔야 한다고 전해왔습니다. 이번 파티에 보스턴 연은 총재인 로라 콜린스 총재도 참석한다고 합니다.”

“하아~”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한 시간 여유는 있는 거네?”

한진영은 화상회의용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서울에 연락 넣어서 홍 사장 좀 연결해. 그리고 조 본부장도 대기하라고 하고…… 보고서는 받았지만 얼굴 보고 직접 목소리로 이야기 듣고 싶다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에 비어 있는 컵을 든 채로 한진영의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밖에 나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는소리는 그냥 투정이었네.”

조지훈 기준에 한진영은 괴물이었다.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잠시 짬을 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조지훈은 함께 다니는 것만으로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게 힘든 자기 몸을 더욱 채찍질했다.

한진영조차 저렇게 버티고 있는데 옆에서 심부름만 하는 자기가 먼저 쓰러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연락 넣어서 조 본부장 연결해. 홍 사장과 통화가 끝나면 내가 직접 조 본부장에게 말할 테니까 연결하고 대기하고 있어.”

조지훈은 바로 비서실에 도착하자 직원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전화기를 붙잡고 세이지 자산운용의 홍대민에게 전화를 넣었다.

한진영은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는 조지훈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고 화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화면에는 홍대민이 먼저 나와 한진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회장님.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게 화면으로 보입니까?”

-네. 화면으로 보일 정도라서 더 걱정입니다. 괜찮으십니까?

홍대민은 화면 너머에서 느껴지는 고단함에 걱정스러운 말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말에 괜찮다는 듯이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요즘 살이 빠져서 더 얼굴이 상하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뉴욕에 막 왔을 때보다 7kg이나 빠졌으니까요.”

-회장님. 몸 좀 챙기면서 일하세요. 회장님이 쓰러지면 세이지도 쓰러집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한진영은 대충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누는 가벼운 대화가 끝이 났음을 깨닫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요? 브릿지랜드의 자산 파악은 끝이 났습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홍대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고를 시작했다.

-네. 브릿지랜드에서 넘겨준 자료를 바탕으로 자산관리팀이 파악한 내용으로는 현재 브릿지랜드의 자산은 1,275억 달러로 확인됐습니다. 주식에 700억 달러, 채권에 300억 달러, 리츠에 200억 달러…….

한진영은 홍대민의 보고를 들으며 홍대민이 보내준 보고서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과 홍대민의 말소리를 대조하며 확인을 이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