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시장의 지배자가 돼라
레이 젠슨은 기운이 빠진 듯한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말없이 미소 지은 후 말했다.
“이곳은 미국이야. 청교도가 세운 나라. 외부에서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미국만큼 보수적인 나라를 찾는 건 어려울 정도로 사회 깊숙이 보수의 색채가 씌워져 있어. 보게나.”
레이 젠슨은 엠파이어 호텔의 파티장을 손으로 쓸어내고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오늘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동양인이 자네 말고 또 있는가?”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제야 오늘 있는 파티 자리에 동양인이라고는 자기 혼자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레이 젠슨은 살짝 놀란 듯한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있는 파티 자리는 특별한 파티가 아니야. 그런데도 동양인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흑인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자네는 앞으로 로라 콜린스 총재가 보여준 태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거네. 어떤가? 할 수 있겠나?”
레이 젠슨은 질문을 던지고 넌지시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주변을 둘러보고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대답했다.
“뭐 해결책을 아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해결책을 알아? 정말로 이곳에서 살아남는 해결책을 안다는 말인가?”
레이 젠슨은 한진영의 말에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들이 저에게 먼저 다가올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되겠지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회장님의 1,200억 달러라는 돈과 함께 있으니 보스턴 연은 총재가 동양인 꼬마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까? 별로 내키지 않았음에도 말입니다.”
한진영은 말을 하고는 레이 젠슨을 향해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멀리 보이는 로라 콜린스를 향해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저에게 먼저 와서 인사하게 될 겁니다. 마치 처음 본다는 듯이 말입니다.”
“정말 그럴 거로 확신하는가?”
“네. 제가 그렇게 만들 작정이니까요.”
한진영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이 젠슨 회장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내가 사람은 잘 본 것 같아.”
“이번 투자는 실패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하하. 자신감 하나는 참 대단하구먼.”
“자신감이 실력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레이 젠슨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마음에 든다는 듯이 한진영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그 모습을 꼭 보고 싶구먼.”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하늘을 쳐다봤다.
밤에는 서늘해져 오는 것이 어느새 맑은 가을하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진영이 기다리고 있는 때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한진영은 계절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하지만 우선은 나와 함께 자네 얼굴을 알리는 게 먼저라네.”
하늘을 바라보던 한진영은 고개를 내려 레이 젠슨을 바라봤다.
“내일도 시간 비워놓게 내일은 서던스 호텔에서 만찬이 있으니까.”
조금 전까지 기세 좋던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말에 다시 울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내일도 또 저녁에 이런 자리에 와야 하는 겁니까?”
“그렇게 죽는소리하지 말게. 모레는 조찬도 있으니까. 집에서 여섯 시에는 나와야 하네.”
“회장님.”
한진영은 레이 젠슨을 향해 사정하듯이 말했다.
“만찬이 빨리 끝나봐야 열 시 아닙니까? 거기에 만찬 자리에 오기 위해서 회사 일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로 나오는 거라 만찬이 끝난 뒤마저 회사 일을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찍 일을 끝내봐야 새벽 한두 시인데…… 새벽 여섯 시에 집에서 나오려면 저는 잠을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하게 됩니다. 이건…… 스케줄이 너무 하드 합니다.”
한진영의 투정에 레이 젠슨이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면서 한진영을 돌아봤다.
“자네를 알리는 자리야. 이런 곳에 자네가 초대받으려면 앞으로 빨라야 4~5년, 늦으면 아예 자네 같은 사람을 부르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 곳을 나를 통해 바로 뚫어내는 건데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죽는소리를 해야 하겠는가?”
“아니. 회장님. 회장님께서도 솔직히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연세가 있으셔서 새벽잠이 없다고 하지만 새벽 여섯 시는 회장님께도 힘든 시간 아닙니까?”
“그래. 나도 힘든 시간이 맞아.”
한진영은 웬일로 자기 말에 동의하는 레이 젠슨을 보고 자기 말이 맞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레이 젠슨은 그런 한진영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힘들어서 나는 가지 않을 생각이네.”
“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그 자리는 내가 없어도 괜찮은 자리니까 자네 혼자 가도 돼. 내가 이야기는 다 해놨네.”
“회장님.”
“그렇게 죽는소리하지 말게.”
레이 젠슨은 한진영의 투정을 단호한 목소리로 끊어내고 한진영을 향해 지금 자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앉아서 기업의 재무제표를 보고 차트를 보는 것만으로 돈을 버는 단계를 자네는 이미 지났어. 시장의 흐름을 보아야 하는 시기야.”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더는 투정 섞인 말을 하지 않았다.
레이 젠슨은 조용해진 한진영의 모습에 조금은 부드러워진 말투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그리고 흐름을 만드는 것을 준비해야 하는 때이기도 해.”
“흐름을 만들라고요?”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말에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레이 젠슨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의 한진영을 바라보고 계속 이야기했다.
“시장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하지만 시장을 내가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시장을 내 쪽으로 끌고 온다면 어떻게 되겠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겠지요.”
“돈이 문제가 아니야.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야.”
한진영에게 이야기하며 레이 젠슨의 눈은 점점 불타올랐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시장의 흐름을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저 사람들이야.”
한진영은 여전히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로라 콜린스를 향해 턱짓했다.
“FOMC의 멤버. 시장의 금리를 결정하는 사람. 통화정책을 정하고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
레이 젠슨은 로라 콜린스 보스톤 연은 총재를 가만히 바라본 채로 이야기했다.
“업종을 선점하고 산업의 흐름을 먼저 바라봐봤자 한계가 있어. 시장의 흐름. 시장을 내 쪽으로 당겨오는 것. 그것을 해냈을 때야 진정한 시장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거야.”
한진영은 레이 젠슨을 향해 살며시 시선을 돌렸다.
70대 노인임에도 말을 하면 할수록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이 레이 젠슨의 얼굴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쇠한 몸이 열정을 태우기에는 담고 있는 에너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 젠슨은 조금은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1년에 8번 펼쳐지는 회의에 전 세계가 숨죽여 지켜보는 게 바로 FOMC 회의야. 그곳에서 금리가 결정되고 그곳에서 앞으로의 통화정책이 결정돼. 그리고 그 결정을 통해 전 세계의 금융시장이 움직이는 거지. 거기에 내가 힘을 가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가능합니까?”
한진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레이 젠슨을 향해 물었다.
레이 젠슨은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웃었다.
“불가능하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냐는 말에 불가능하다는 말로 대답한 레이 젠슨이었다.
한진영도 레이 젠슨의 대답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에서 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 약간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레이 젠슨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FOMC는 7명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임원들과 지역연방준비은행 총재 5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지역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당연직인 뉴욕 연은 총재 1명 외에 4명이 순번제로 1년씩 돌아가며 맡고 있고…… 이들이 투표하고 투표 결과와 경제전망에 따라 세계 시장이 요동치는 만큼 힘을 가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이론적으로는…….”
레이 젠슨은 말끝을 흐리고는 한진영을 바라봤다.
말을 하면서 번갈아 로라 콜린스와 한진영을 바라본 레이 젠슨이었다.
그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자네라면 그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내가 이렇게 부지런히 자네를 뉴욕의 중심에 소개하는 거라네. 공매도를 풀어달라며 연방정부의 인사들이 사정하게 했던 리버모어나 하느님이 발행한 채권이더라도 내가 신용하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다고 말한 모건이나…… 자네라면 그들처럼 시장을 지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내 힘을 이용하여 시간을 단축하고 있는 거라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자네라면…… 나는 하지 못했지만, 동양의 소년인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점점 기대에 찬 레이 젠슨의 목소리에 한진영이 웃고 말았다.
“알았습니다. 더는 투정할 수도 없게 못을 박아 버리시네요. 좋습니다.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은 별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대답하고는 레이 젠슨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회장님께서 고생하신 걸 허투루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해야겠습니다. 그 시장의 지배자인지 뭔지 말입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로라 콜린스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주변에 모여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로라 콜린스 근처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레이 젠슨보다 못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FOMC 위원이라는 것이 그만큼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로라 콜린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잘 보여줬다.
“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편안히 지펴보고 계세요. 제가 그 자리에 올라가는 날 제 옆자리는 회장님의 차지가 될 테니까요.”
“하하하. 그래. 허풍이더라도 그렇게 자신 있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네. 그런 의미에서 따라오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레이 젠슨은 이야기하느라 멈췄던 소개 시간을 다시 시작하려 했다.
한진영은 레이 젠슨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조금 더 사이즈를 키워야겠네.’
레이 젠슨에게 한진영은 허풍을 떤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될 자신이 있었다.
물론 레이 젠슨이 말하기 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꿈도 꾸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 젠슨이 꿈을 꾸게 만들어줬고, 한진영도 그 꿈이 마음에 들었다.
한진영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겠다는 계획에서 사이즈를 조금 더 키워 시장을 지배하는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생각하게 됐다.
이 꿈을 완성할 방법을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바로 10년에 한 번, 100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기회가 곧 시장을 덮쳐 온다는 것을 지난 시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을 완성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레이 젠슨이 건네준 상태였다.
‘1,200억 달러를 받았는데 못한다고 할 수는 없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돈에 레이 젠슨이 건네준 자금까지 1,500억 달러를 손에 쥔 한진영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커다란 물결에 1,500억 달러를 손에 쥔 채로 파도를 타게 된다면 분명 레이 젠슨이 원하는 위치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 한진영이었다.
“인사드리게. 텍사스주의 재무장관인 그라이너 장관이시네.”
“처음 뵙겠습니다. 세이지의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한진영은 활짝 웃는 얼굴로 그라이너 장관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힘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한진영에게 지금의 자리가 가장 곤욕스럽기만 했다.
특히,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웃는 모습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자리를 마련한 레이 젠슨의 의도와 그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라면 이런 것쯤은 참을 수가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들은 몇 곱절로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번에도 더러운 물건을 보는 듯한 그라이너 장관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한진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운을 걸친 채로 거실로 나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조지훈이 거실에서 신문을 보며 한진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조지훈을 향해 손을 들어서 막았다.
“됐어. 일어나지 마. 나 아직 일어난 거 아니야. 목말라서 나온 거니까 그냥 모른 척해.”
한진영은 반쯤 감긴 눈으로 부엌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물컵에 물을 한가득 담아 마시고는 거실로 다시 나왔다.
“회장님. 이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진영은 물컵을 든 채로 조지훈이 내민 신문을 내려다봤다.
“뭐길래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나에게 보라고 그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건 꼭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뭔데 그래?”
한진영이 깨우지 말라는 말을 했음에도 신문을 내민 조지훈이었다.
한진영은 신문안에 쓰여있는 내용이 평범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신문 기사를 내려다봤다.
“헤지펀드가 우리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건네받은 신문 상단에 쓰여있는 기사 제목을 읽어본 뒤 조지훈을 올려다봤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시선에 기사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노골적으로 우리를 겨냥한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런 기사가 약 2주 전부터 급속히 한국 언론을 통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것이 바로 일주일 전 기사입니다.”
“우리를 노리고 기사를 쓰고 있다?”
“네. 세이지가 미국의 자본에 흡수되어 대한민국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내용의 것들입니다. 처음에는 의문만 내보이던 기사들이 지금은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짜인 채로 기사가 나오는 중입니다.”
“그래?”
한진영은 조지훈을 통해 간략한 정보를 얻은 뒤 기사를 직접 읽어 내려갔다.
“다른 것 또 있나?”
선 채로 기사를 다 읽어낸 한진영은 다른 기사를 또 보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의 손에 다른 신문을 건넸다.
“이건 사흘 전 기사입니다.”
“세이지, 대한민국을 공격하려 한다? 하~ 참”
한진영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기사 제목을 읽어낸 뒤 안에 쓰인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그리고 중간중간 혼잣말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것들 우리를 뭔 악마로 표현했네. 얘네 왜 이래?”
한진영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신문을 구긴 채로 조지훈을 향해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