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모든 순간을 기회로 만드는 사람
조지훈은 한진영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
처음 기사를 접했을 때 자기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한진영을 향해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사 언론대응팀에서 분석하기로는 타 증권사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언론을 통해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위기의식? 자기들이 뭐라고 위기의식을 느껴?”
“세이지가 커다란 자본을 가지고 자기들을 위협하면 대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꿈도 야무지네. 내가 자기들하고 놀아줄 거로 생각한다 이 말이지?”
한진영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렸다.
한진영의 목표는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목표로 삼았다면 이곳에 인베스트먼트가 뿌리를 내리게 만들고 자산운용을 대한민국에서 미국으로 넘겨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비록 본사는 대한민국에 있지만 한진영이 목표로 하는 곳은 뉴욕이었다.
그런데 얼토당토않게 한국에 있는 회사들이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세이지의 칼날이 자기에게 향할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세이지가 움직이기 전에 자기들이 먼저 움직여 불안의 싹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조지훈은 신문을 말아 쥔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런 움직임에 동조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동조해?”
“네.”
조지훈은 소파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바로 이 보고서 때문에 잠이 덜 깼다는 한진영을 향해 혼날 걸 각오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한진영은 조지훈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고 표지를 바라봤다.
“공정거래위원회 내부 문건? 이게 뭔데?”
“우리와 브릿지랜드의 합병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심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문건입니다.”
“뭐를 해?”
한진영은 서류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뭘 한다고?”
한진영은 자기가 잘못들은 게 아니냐는 생각으로 조지훈을 향해 다시 물었다.
조지훈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다시 이야기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브릿지랜드와의 합병 과정에서 이상이 없었는지, 이상이 없다면 합병 뒤에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해 심사하려 하는 준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걔들이 그걸 왜 심사해?”
“그뿐이 아닙니다.”
“뭐가 또 있는데?”
한진영은 이제 잠은 모두 달아난 느낌을 받았다.
조지훈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든 채로 소파에 앉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으려 자세를 취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맞은편에 앉으며 바다 건너 본사에서 들어온 이야기들을 한진영에게 펼쳐놨다.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이차전지 연합이라 부르는 기풍 등의 기업들도 위기감을 느낀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또한 산업 전반에 걸쳐서 우리가 침투했을 때 흔들리는 부분이 있는지 은밀히 확인해 보라는 지시가 경제부처에서 각 기업으로 전달됐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이것들 뭐 하는 짓이야? 우리가 무슨 암 덩어리야? 뭐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한진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본사에서 분석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헤지펀드에 불안감을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헤지펀드를 출시했다는 이야기에 그 위기감을 더 크게 느끼는 듯합니다.”
“어울리지 않게 자기들이 무슨 큰 먹잇감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대? 우리가 헤지펀드를 출시해서 자기들을 먹어 치우기라도 하는 줄 아나 봐?”
“네. 그것 때문에 굉장히 마음 졸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삼선전자조차 투기 세력이 침투했을 시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내부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고 합니다.”
“얼씨구.”
한진영은 시가총액이 수백조에 달하는 기업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에 황당함마저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만큼 국내 기업들이 투기 세력에 취약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외국계 헤지펀드들의 흔들기에 그룹 전체가 흔들린 곳이 나왔기 때문이다.
“본사 차원에서 언론 대응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에 회장님의 지시를 기다린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회장님께서 쉬시는데도 보고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잘했어.”
한진영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이런 것까지 보고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어. 잘했어. 이런 건은 깨워서라도 이야기해야지.”
한진영은 사과하는 조지훈을 향해 잘했다는 뜻을 전하고 턱을 쓰다듬으며 대응책에 관해 물었다.
“분석 뒤에 나온 대응책은 뭐가 있어?”
“우선 우리는 국내 기업들을 흔들 의지가 없다는 뜻을 명확히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헤지펀드의 투자처를 명확히 해서 불안감을 씻어주는 것이 그다음 해야 할 행동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의지가 없고, 투자처를 명확히 하라? 그럼 헤지펀드가 아니잖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정부까지 나선 마당에 계속 우리 고집대로 밀고 나가다가는 괜히 미운털이 박혀 부당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조지훈의 말에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정부가 밀고 있는 게 경제민주화지?”
“네. 소득 재분배와 독점규제에 초점을 맞추고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자본주의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헤지펀드가 정부 눈에도 좋게 보일 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500명이라는 소수 인원의 고액 투자금을 받아 진행하려 한다는 게 더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달 벌어 먹고살기도 어려운 대다수의 국민과 달리 고위험투자에 수십억을 내놓는 게 아무래도…….”
조지훈은 말끝을 흐렸다.
한진영이 세운 기준을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조지훈과 달리 문제의 핵심을 담담한 얼굴로 받아들였다.
“하긴 그럴 수 있어.”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조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럼 본사 대응대로 진행하라고 허락할까요? 대응팀에서는 광고를 통해 우리의 헤지펀드는 대한민국을 겨누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후속 보도로 미국이나 유럽권의 회사에 투자할 거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다면 해결될 거라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조지훈의 말에 한동안 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던 한진영이 고개를 저었다.
“우선 대기하라고 해.”
“우선 대기요? 그럼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어. 지금 막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조지훈은 한진영의 대답에 대단하다는 눈빛을 지어 보였다.
처음 조지훈이 보고받고 본사 대응팀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대응 방안을 세우는 데까지 수일의 시간이 걸렸었다.
그것도 팀원 십여 명이 머리를 맞대고 나서야 겨우 그럴듯한 방안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한진영은 이야기를 듣고 생각까지 겨우 십여 분이 흘렀을 뿐인데, 바로 대응 방안을 세운 데 조지훈은 역시 한진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조지훈이 궁금하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본사 대응 방안하고 다르지 않아. 다만 대응 방법에서 차이가 있는 거지.”
“대응 방법의 차이요?”
“그래. 어떤 방식이건 확실하게 우리가 모은 돈 가지고 할 걸 정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안 그래?”
“어…… 네. 그렇게만 한다면 해결이 될 문제이기는 합니다.”
세이지증권에서 내놓은 방식과 한진영이 내놓은 방식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다르다는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어떤 방법이 있다는 것인지 한진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 살만한 물건이 있어. 그거 사면 돼.”
“살만한 물건이요?”
“그래. 이맘때쯤 나와서 주인 찾지 못하는 거. 그거 사겠다고 하면 정부가 알아서 기업들하고 언론 정리해줄 거야.”
“정부가 알아서 정리해줄 정도라면…… 국내기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미래해운. 그거 사면 돼.”
“네? 미래해운을 사신다고요?”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한진영의 곁에서 한진영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조지훈이 하는 일이지만,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조지훈도 웬만한 증권가의 사람보다 넓은 정보력과 치밀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조지훈이 알고 있기에 미래해운은 정부의 골칫덩이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골칫덩이라는 것이었다.
미래해운이 매물로 나온 지 수 년이 지났건만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비친 곳이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도 없었다.
인수가격을 깎아주고 납입일을 연장해주는 조건을 걸었음에도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로 미래해운은 답이 없는 곳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대로 기업을 유지하는 게 국민의 세금을 깎아 먹는 것밖에 되지 않기에 이참에 회사를 정리하고 자산을 매각하여 다만 몇 푼이라도 건지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의 회사였다.
바로 그런 곳을 한진영이 인수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헤지펀드는 고위험 고수익의 상품이야. 그런 의미에서 미래해운이야말로 딱 맞는 물건이지. 고위험, 고수익.”
“고위험은 알겠는데…… 고수익은…….”
조지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표정을 지으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해운 운임이 연일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래해운이 가지고 있는 채무에 딸린 이자가 계속 불어나는 중이기도 하고요. 미래해운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평가에서 매년 기준치를 넘기지 못해 청산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나올 정도로 미래해운의 분위기가 안 좋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곳이 고수익이 나려면…….”
“쉽지 않지. 그러니까 헤지펀드 자금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안정성을 요구하는 펀드 같은 경우에는 지금 미래해운에 투자하겠다고 하면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나올만하니까.”
“말씀이 맞기는 하는데…….”
한진영은 여전히 걱정이 풀리지 않은 모습의 조지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잘 됐어. 이 기회를 이용해서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으니 우리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아.”
“지금 상황이 우리에게 좋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그래. 평소라면 우리가 미래해운을 먹겠다고 했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한진영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지금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어려움을 무마하기 위해 무리해서 인수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리고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 골칫덩이를 떠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테고……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미안해서 우리 입장을 대변해주려 할 테니 얼마나 잘 된 거야? 꿩 먹고 알 먹기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거 아니겠어?”
조지훈은 연신 잘됐다고 말하는 한진영을 보고 뭐가 잘됐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미래해운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전용기 준비시켜. 바로 한국으로 넘어갈 테니까.”
“바로요?”
“어. 그리고 나 사장도 지금 하는 일 올 스톱하고 나와 함께 한국으로 넘어가자고 해.”
“나창운 사장까지 말입니까?”
“당연하지. 인수 협상 의사야 내가 청와대와 담판을 짓겠지만 나머지는 나 사장이 진행해야 할 일들이잖아.”
“나 사장이 넘어가는 거라면 인수까지 단번에 마무리 짓겠다는 뜻인가요?”
“그래. 기회가 왔을 때 잡아채야지.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기회가 또 올지 몰라. 나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조지훈은 한진영과 대화하면 할수록 놀라운 이야기들에 자기가 제대로 보고를 한 것인지 조금 전 대화를 복기하기까지 했다.
분명 한국 내에서 문제가 될만한 이야기들이 나왔고, 그걸 해결해야 하는 일 때문에 한진영에게 보고한 조지훈이었다.
이야기들은 세이지에 매우 불리한 것들이었다.
동종업계는 물론이고 언론과 정부로부터 압박받고 있다는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법들을 준비해왔지만, 한진영은 그 방법이 아닌 전혀 다른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해결 과정에서 마치 큰돈을 벌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부채만 수조 원을 떠안고 있는 부실 덩어리 기업인 미래해운을 통해서 말이다.
한진영은 조지훈이 건넸던 서류들을 소파에 내려놓고 조지훈을 향해 턱짓했다.
“뭐해? 정신 차려. 시간이 없어. 빠릿빠릿 움직여야 해. 난 오후 비행기로 바로 여기서 뜨고 싶으니까 그렇게 준비해. 그래야 노인네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오늘은 이상한 모임에 안 나가도 되니까 말이야.”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해결할 문제가 한가지가 더 있음을 깨달았다.
“레이 젠슨 회장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릴까요? 당장 점심때부터 일정이 있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100억 달러짜리 돈 벌러 한국에 간다고 이야기 드려. 그럼 노인네도 더는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네? 뭐로 얼마나 버신다고요?”
한진영은 100억 달러라는 말에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하는 조지훈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었다.
“마침 2조라는 돈을 모아서 어디다 쓸까 고민했었는데 잘 됐다. 기회가 이렇게도 찾아오네.”
조지훈은 한진영을 바라보고 어처구니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진영에게는 위기 뒤의 기회라든지 어둠 속에서 한 가닥 빛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모든 순간이 기회였고, 모든 상황이 다 돈을 벌기 위해 이루어진 시간이라는 듯이 움직였다.
한진영이 돈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돈을 버는 것에 귀신 같은 감각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진영이 깨어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을 걱정하던 자기 자신이 초라해짐을 조지훈은 다시 한번 느꼈다.
***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나창운은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조지훈은 나창운의 앞에 앉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나창운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나창운의 표정으로 보아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상이 됐던 조지훈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이 100억 달러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지훈은 나창운보다 더 긴장한 얼굴로 나창운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걸…… 정말 인수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러니까 어떤지…… 나 좀 말씀해보세요. 가능성이 있습니까?”
조지훈은 고개를 돌려 앞자리에서 안대를 끼고 누워있는 한진영을 슬쩍 훔쳐봤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나창운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창운은 그런 조지훈과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휴우~”
“많이 안 좋습니까?”
“많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회사예요.”
나창운도 한진영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