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팔 수밖에 없는 명분을 만든다
언론에서는 세이지증권이 출시한 헤지펀드 계열의 상품이 가입자들의 해지 신청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쏟아져 나왔다.
계속된 업계의 부정적인 시선과 정부의 대처가 가입자들의 불안을 가중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세이지증권의 한진영 회장을 대한민국으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로 번져갔다.
언론은 헤지펀드 계통은 대한민국 실정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세이지증권이 새드엔딩을 맞을 것을 예상했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보이는 만큼 세이지증권은 더는 퇴로가 없다는 것이 언론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엔딩은 결국 세이지증권을 위기로 몰아가게 될 거라는 사설을 내보내기도 했다.
부정적인 이야기가 각 신문사의 경제면을 뒤덮고 있었다.
“저희라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실어드릴까요?”
문서영이 한진영을 향해 먼저 제안을 건넸다.
이성우도 문서영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래. 서준일보에서만이라도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면 여론이 조금은 호의적으로 변할지도 몰라.”
이성우는 잠시 문서영의 눈치를 살피고는 한진영을 향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분위기가 많이 좋지 않아서 네 편을 들어주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는 네가 돌아왔으니…… 그렇지? 진영이 편을 들어주기 훨씬 나은 상황이잖아.”
이성우는 마지막 말을 문서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문서영은 이성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금은 훨씬 수월한 상황이죠. 진영 씨가 돌아왔으니 거기에 맞춰서 서준일보가 힘을 실어드릴 수 있어요. 다만 그 전에 세이지증권이 움직이는 방향은 먼저 알려주시는 편이 좋아요. 그래야 손발을 맞출 수 있으니까요.”
한진영은 이성우와 문서영의 말을 들으면서도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성우는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는 한진영을 보고 답답했던지 소리 높여 한진영을 불렀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쉿.”
한진영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들 깨겠다. 목소리 좀 낮춰.”
“어?”
한진영의 모습에 이성우는 급히 목소리를 낮추고 다시 물었다.
“지금 애기가 깨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 걱정은 하지 마.”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 걱정이 안 돼? 지금 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
“알고 있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뉴욕에서 온 거고…….”
한진영은 이제 막 잠이 든 이성우의 둘째 아들의 이마를 살며시 어루만지고는 방에서 나갔다.
이성우와 문서영은 그런 한진영을 따라 거실로 나왔다.
이성우는 문서영을 슬쩍 돌아봤다.
그러자 문서영이 이성우를 대신하여 앞에 나서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저에게 부탁하러 오신 거 아니셨어요?”
“부탁이라니요?”
“서준일보에서 기사를 좀 써달라고 오신 거…… 아니었어요?”
한진영은 문서영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제가 그래서 찾아왔겠습니까? 친구가 둘째 조카를 낳았다고 하니 기쁜 마음에 조카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거지요. 아! 물론 겸사겸사 온 김에 할 말이 있기는 했습니다.”
한진영은 오해한 것에 부끄러웠던지 살짝 얼굴을 붉히는 문서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성우를 바라보고 말했다.
“회장님께 새로운 용선 계약에 관심이 있는지 한번 여쭤봐.”
“용선 계약? 배 빌리는 거 말하는 거야?”
“어 맞아. 너희같이 원자재를 다루는 곳은 용선 계약이 중요하잖아. 용선 계약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수익구조가 바뀔 정도니까.”
“그거야 그렇지.”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석 형태로 물건을 팔아먹을 수는 없었다.
광석을 처리하여 그 안에서 필요한 물질들만 추출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광석을 처리하는 공장이 있는 곳까지 배를 통해 광석을 옮겨야만 했다.
그리고 그 양은 어마어마했다.
365일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의 경우에는 운용비용을 쉽게 산출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그때그때 달라지는 용선 비용은 기풍과 같은 곳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항상 골치를 썩이게 만들고는 했다.
이성우는 골치 아픈 문제인 용선 이야기를 왜 한진영이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용선 문제는 상선회사 같은 곳과 계약을 맺는 것이지 세이지와 같은 증권회사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도대체 한진영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몰라 눈만 끔벅이는 이성우를 향해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첫 조카 태어났을 때 선물 줬는데, 둘째한테 선물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조카가 커서 섭섭해하지 않겠어? 게다가 이 녀석이 나중에 기풍의 주인이 될 놈인데.”
“선물? 갑자기 용선 계약을 이야기하다가 선물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용선 계약이 바로 둘째 선물이야. 가서 회장님께 말씀드려. 조카를 위해 내가 선물을 준비했으니 원하시면 말씀하시라고 말이야.”
“용선 계약이 선물이라고? 선물이 맞아?”
따르릉.
이성우가 한진영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려 할 때 벨 소리가 들렸다.
한진영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
한진영은 간단한 말로 전화를 끊고는 이성우와 문서영을 향해 사과했다.
“와서 제대로 차도 한잔 마시지 못하고 가야겠다. 청와대와 약속이 되어 있어서.”
“지금 청와대로 들어가시는 거예요?”
문서영은 한진영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청와대에 들어가 나눌 대화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떠나기 위해 문을 향해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지금 문제를 해결할 생각입니다.”
“혹시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특종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한진영의 모습에 문서영은 노골적으로 한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진영은 그런 문서영의 모습에 살며시 웃은 뒤 문손잡이를 잡고 대답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야기라 어떤 방법을 쓰는지는 말씀드리기 어렵고…… 제가 정부가 골치 아파하는 것을 처리해주는 조건으로 지금 상황을 정리하려 한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그게 조금 전 이야기한 용선 계약과 관련이 있나요?”
이성우는 문서영의 말에 놀란 듯이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시선을 받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딴짓 못 하겠다. 제수씨가 이렇게 감이 좋으니 말이야.”
“나야 밖에 나가서 딴짓할 생각 전혀 안 하지.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알지. 제수씨. 성우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나가기 전에 마지막 말을 전했다.
“제수씨가 한 질문에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저는 노코멘트를 긍정으로 받아들일 생각인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것도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서영을 향해 미소 짓고는 이성우에게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한진영이 건물 밖으로 나가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조지훈이 다가와 인사했다.
“잘 마무리하셨습니까?”
“어. 생각대로 제수씨가 촉이 좋아서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어.”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 있었을까요? 청와대와 이야기가 마무리된 뒤 언론에 내용을 배포하면 될 일인데 말입니다.”
“청와대와의 협상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만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필요한 건 기풍과의 계약이야.”
“용선 계약 때문에 이 사장님을 찾아가신 겁니까?”
“그래.”
한진영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탄 후 마저 설명했다.
“아무리 미래해운이 청와대의 골치를 썩이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돈 주고 사겠다고 해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청와대가 팔고 싶다고 해서 팔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명분이 필요해. 우리 같은 금융사에 팔아먹기 위한 명분.”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을 이해했다.
정부에서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살려놓은 회사를 팔 때는 따져야 할 것이 많았다.
단순히 가격이 맞는다는 것만으로 사고팔기에는 세금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여러 가지 걸림돌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진영은 청와대가 자기에게 미래해운을 팔 수밖에 없는 명분을 들고 협상 자리에 들어가려 한 것이었다.
조지훈은 청와대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풍에서 회장님의 뜻대로 움직여 줄까요?”
“내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잖아. 제수씨 촉이 좋다고 말이야. 움직일 거야. 그렇게 믿어도 돼.”
한진영은 문을 닫을 때 문서영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한진영이 떠난 집에서 문서영은 거실을 잠시 서성였다.
이성우는 한쪽에 떨어져 서서 문서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괜히 문서영이 생각하는 중간에 끼어들었다가는 욕을 먹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던 문서영은 이성우를 돌아봤다.
“어서 아버님께 가보세요.”
“아버님께?”
“네. 가서 진영 씨와 지금 나누었던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말고 아버님께 전하세요. 그리고 미래해운과 용선 계약을 체결할 준비를 하시라고요.”
“미래해운? 미래해운은 무슨 소리야?”
“세이지에서 미래해운을 인수할 생각인 것 같아요.”
“세이지가 미래해운을 인수한다고?”
이성우는 한진영과의 대화에서 미래해운에 ‘미’ 자도 나오지 않았는데 어째서 미래해운의 인수까지 이야기가 흘러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문서영은 지금은 설명이 먼저가 아니라는 듯이 이성우의 어깨를 잡고 문밖으로 밀어냈다.
“가서 무조건 아버님을 설득하셔야 해요.”
이성우는 자기도 모르겠는 일을 어떻게 설득하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문서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문서영은 방법과 이유를 알려주지도 않은 채 이성우를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서준일보의 편집국장에게 전화했다.
“지금 세이지증권의 한진영 회장이 청와대에 들어갔으니 출입 기자에게 청와대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확인하세요. 그리고 경제부 담당에게 이야기해서 미래해운에 관련된 기사를 준비하라고 하세요.”
-미래해운의 어떤 걸 준비하라고 할까요?
“미래해운의 매각과 관련된 논의가 청와대에서 이뤄진다는 정보가 있어요. 그러니 미래해운의 현재 상태와 세이지로 매각됐을 때의 진행 상황과 매각 후의 예상 등을 준비하시면 돼요.”
-미래해운의 매각이요? 그것도 세이지로 넘어간다는 말씀이십니까?
편집국장은 놀란 목소리로 문서영에게 되물었다.
서준일보에서도 냄새 맡지 못한 정보를 뜻밖에도 발행인인 문서영 대표의 입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세이지증권의 한 회장이 지금 우리 집에서 나가며 한 이야기니 믿으셔도 돼요. 미리 준비해놨다가 정식 발표가 나오면 제일 먼저 보도할 수 있게 준비 마쳐놔야 해요.”
-세이지증권의 한 회장이 왜…….
편집국장은 왜 문 대표의 집에서 나갔냐고 질문을 하려다 문 대표의 남편과 한진영이 막역한 사이인 걸 깨닫고 질문을 멈췄다.
문서영은 편집국장이 준비해놓겠다는 대답을 들은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 양반이 아버님을 잘 설득해야 하는데…….”
억지로 등을 밀어 집 밖으로 내보낼 때까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이성우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 문서영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TV를 바라보고 다시 혼잣말을 내뱉었다.
“할 수 없지. 조금 도와줘야지.”
문서영은 TV서준의 보도국장을 향해 전화를 걸었다.
***
오랜만에 도착한 청와대는 주인이 바뀌어서 그런 것인지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분위기가 조금은 부드러워졌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손님께서 오실 때 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도록 신경 쓰라고 하셨습니다.”
“좋네요. 가을 단풍도 좋고…….”
청와대의 비공식 회의 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상춘재로 가는 길에 흐드러지게 핀 낙엽이 운치를 더했다.
“잠시 기다리시면 대통령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상춘재까지 한진영을 안내한 비서관은 한진영이 자리에 앉는 것까지 확인하고 상춘재를 나갔다.
비서관이 나간 지 10여 분이 흘렀을 때쯤 상춘재로 대통령이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들기름 냄새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하하. 어떻습니까? 냄새가 좋지요? 니스칠을 벗기고 나무에 들기름을 입혔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전통 방식이라고 해서요.”
대통령은 은은한 들기름 냄새가 풍겨 나오는 나무 기둥을 손으로 두드리며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작업을 마치고 이곳에 처음으로 손님을 맞은 겁니다. 그만큼 제가 한 회장님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감사합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다.
대통령은 그런 한진영을 은근한 눈으로 바라본 뒤 조금 전까지 한진영이 자리에 앉아 기다리던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앉으시지요.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네.”
한진영이 자리에 앉자 상춘재의 문이 열리고 차가 나왔다.
대통령은 한진영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마실 것을 권하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네. 그것 때문에 급히 뉴욕에서 귀국했습니다.”
서 대통령은 한진영을 단호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우선 이번 펀드와 관련된 일이라면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저는 헤지펀드가 우리나라에서 싹트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 말입니다.”
“헤지펀드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다고요?”
“네.”
한진영은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이 펀드는 헤지펀드가 아닌 정상적이고, 저 펀드는 나쁜 펀드인 헤지펀드이다’라고 말할만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투자의 방법에 따라 다른 것뿐이지요.”
한진영의 말을 가만히 듣던 서 대통령은 처음 보여줬던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이지가 이번에 모집한 펀드에 대한 금감원의 조사를 지시할 생각입니다. 투자자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어떻게 그 많은 금액을 투자할 수가 있었던 것인지 철저히 조사하라고 할 계획입니다. 만약 그중에 공직자가 있다면…… 재산 형성 과정을 낱낱이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서 대통령이 서슬 퍼런 말을 내뱉었지만, 한진영의 얼굴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말에도 표정 변화가 없는 한진영의 모습에 서 대통령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