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자신이 있다
한진영은 걱정하고 있는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할 것 없어.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데서 이미 관심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관심이 있다면…… 계약을 체결하게 되어 있고…….”
한진영은 자동차 뒷좌석 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울이고 이야기했다.
“내가 부탁하는 게 아니라 내가 기풍에 기회를 주는 거야. 오랫동안 알아 오고 나와 인연이 깊은 회사라서…… 그러니 당당히 찾아가면 돼.”
한진영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조지훈은 살짝 고개를 틀어 한진영을 살폈다.
그리고 한진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괜한 자신감에 내뱉은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회를 주기 위해 찾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는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기풍 본사로 향했다.
“어서 와라.”
차가 오는 곳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성우는 차에서 내린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자주 본다. 너도 와 있었던 거냐?”
“내가 왔으니까 너보고 오라고 한 거지. 빨리 가자. 회장님께서 너 찾으신다.”
이성우는 아직 안 왔냐고 이정훈이 조금 전 전화했던 핸드폰을 한진영 앞에 들어 올리고는 손목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다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미래해운을 인수한다는 거…….”
“알고 연락한 거 아니었어?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정말이구나.”
이성우는 놀랍다는 듯이 한진영을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너는 하여튼 매번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 시점에 갑자기 미래해운이라니?”
“내가 둘째 선물 준다고 하지 않았냐?”
“미래해운하고 선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내가 용선 계약을 이야기했잖아.”
“그러니까 용선 계약하고 둘째 선물하고 무슨 상관인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한진영은 이성우의 등을 두드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말했다.
“안정적인 물류선 확보. 이게 내가 주는 선물이다.”
한진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우를 엘리베이터에 놔두고 홀로 내려서 회장실로 향했다.
몇 번 찾아와서 그런지 이정훈 회장의 회장실로 가는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했다.
걱정이라고는 한진영의 발걸음에서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한진영의 뒤를 따라 회장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다.”
이정훈 회장은 안내를 받아 들어온 한진영을 향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인사했다.
“미국에 가 있었다더니 미국물이 좋은가 봐? 얼굴이 아주 훤해졌는데?”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얼굴이 보기 좋으십니다. 기풍을 이을 장손을 얻으셔서 기쁘신가 봅니다.”
“하하하. 왜 안 그러겠나? 저놈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우리 손주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주 흡족하다네. 아니 글쎄 이놈이 벌써 할아비를 알아봐. 목도 못 가누면서 말이야.”
이정훈 회장은 손자 이야기가 나와서 기쁜 것인지 한진영의 손을 잡고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 직접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한 후 한진영의 곁에 앉았다.
이성우는 자기가 찾아왔을 때와는 아주 딴판인 이정훈 회장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파 한쪽 끝에 스스로 걸어가 앉은 뒤 한진영과 이정훈이 나누는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미래해운을 인수한다고?”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이성우를 돌아봤다.
“저는 미래해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저 녀석이 그러더구먼. 자네가 미래해운을 인수할 것 같다고 말이야.”
“이거 참…….”
한진영은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정훈 회장을 돌아봤다.
“저 녀석이 잘못 예상한 건가? 자네가 분명 미래해운을 가지고 청와대와 담판을 지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말이야.”
이정훈 회장은 모르는 척 떠보는 이야기를 건넸다.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듯이 잠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맞는 건가? 아니면 저 녀석이 잘못 짚은 건가? 얘기 좀 해보게.”
약이 오른 듯이 목소리를 높인 이정훈 회장 앞에서 이성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리고 할 수 없다는 듯이 이정훈 회장에게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냥 용선 계약에 관심이 있는지만 물어보라고 했건만…… 성우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잘못 짚었다는 이야기인가?”
“아닙니다. 회장님. 이건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의 약속을 받아낸 뒤 이성우를 슬쩍 돌아보고 말했다.
“성우가 정확하게 예측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미래해운을 인수하려고 합니다.”
“허어.”
이정훈 회장은 사실이 확인되자 놀란 듯한 탄식을 지었다.
그리고 이성우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저 녀석이 정확히 예측했어?’
이정훈 회장에게는 미덥지 않은 아들이 이번에도 정확히 예측해서 큰 물건을 물어 온 것이었다.
이정훈 회장은 이성우에게 잘했다는 손짓을 건넸다.
이성우는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다 이야기해놓고 이정훈 회장 앞에서 자기를 치켜세우는 한진영을 향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진영은 가볍게 이성우를 향해 웃고는 이제 본격적으로 이정훈 회장과 흥정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다 아시고 저를 부르셨으니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래. 어서 이야기해보게.”
“저희는 미래해운을 인수해서 회사를 정상화한 후 다시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수에 쓰이는 자금을 이번에 모집한 헤지펀드 자금으로 해결할 생각입니다.”
“그걸…… 청와대에서 허락한 건가?”
“네. 허락받고 나오는 길입니다.”
“허허.”
이정훈 회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왔다는 사실은 TV를 통해 이미 확인이 된 사항이었다.
게다가 한진영이 이런 류의 이야기를 가지고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이정훈 회장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믿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정훈 회장은 다시 한번 한진영에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청와대가 자네에게 미래해운을 넘긴다는 이야기인가? 그…… 미래해운을?”
“네. 다음에 갈 때는 함께 들어가시겠습니까?”
“함께 가다니? 어딜?”
“믿기 어려우신 것 같으니 함께 들어가서 직접 물어보시는 게…….”
“아니야. 내가 왜 믿지 않아? 믿어. 됐네. 그만하면 됐어.”
이정훈 회장은 질색하며 손을 휘저었다.
지난 경제단체와의 만남에서 서규철의 깐깐함을 직접 목격하고 느꼈기에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정훈 회장은 손사래까지 치며 싫다는 뜻을 표현했다.
“하아~ 미래해운이 이렇게 되는군그래.”
짧은 탄성을 지른 이정훈 회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진영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이정훈 회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쯤 구체적인 제안을 이정훈 회장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새로운 미래해운의 고객으로 기풍을 청하고 싶습니다.”
“우리와 용선 계약을 맺고 싶다고?”
이정훈 회장이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10년 장기계약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10년?”
가만히 이야기 듣던 이성우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10년이라니? 그렇게 긴 장기계약을 맺자고?”
“운임 기준가는 현재 기준값인 BDI의 10% 할증을 붙여 받겠습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제안에 이정훈 회장이 버럭 화를 낼까 조마조마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이정훈 회장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 한진영의 제안을 들었다.
오히려 한진영의 제안에 좋은 의미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일 정도였다.
“현재 가격의 10% 할증하여 10년 계약을 하자고?”
“네.”
“우리에게 너무 좋은 조건이 아닌가? 이런 제안은 쉽게 해서는 안 되네.”
“좋은 조건이지요. 역대 최저가에 근접한 BDI 지수를 생각한다면 여기에 10% 할증을 해 봤자 5년 전 가격의 1/3밖에 안 되는 가격이니까요.”
“맞네. 지금 해운 상황이 좋지 않아서 계속 가격이 내려가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떨어지기만 하지는 않을 거네. 그렇다면 그때 가서는 10년이라는 계약이 자네의 발목을 잡을지도 몰라.”
“아니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한진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정훈 회장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본 후 자기가 이런 제안을 건넨 이유를 이야기했다.
“BDI 지수가 반등하여 운임 가격이 오르게 됐을 때, 기풍과의 계약이 제 발목을 잡을 일은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저는 미래해운을 기풍에 매각할 생각이니까요.”
“뭐라고?”
“우리에게 미래해운을 매각한다고?”
한진영은 당황한 두 사람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동량이 점차 늘어나는 기풍은 안정적으로 물량을 운반할 곳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맞네. 확실히 우리의 물량이 전과는 달라.”
“지역도 단순하지 않지요. 남미부터 시작해서 오세아니아와 북미까지 넓게 퍼지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맞아. 그래서 안정적인 해운사를 찾는 게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야.”
“그리고 돈도 많이 들 테고요.”
“그래서 자네가 미래해운을 인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자네를 부른 거지.”
한진영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이정훈 회장은 가만히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미래해운을 사야 할 이유가 되지 않아.”
“그렇겠죠. 지금 해운 운임 가격이라면 말입니다.”
“그 말은 운임이 시간이 흐르면 오른다는 이야기인가?”
“운임이 상승한다는 이야기는 조금 전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 아닙니까? 언제까지 지금 가격일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 회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조금 전 자기 입으로 운임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성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성우가 기풍의 미래를 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걸 실어 나를 배를 기풍이 가지게 된다면 시너지가 폭발적으로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남미 광산에서 캐온 리튬을 미래해운에 실어 국내로 가지고 와 기풍철강에서 처리한다. 이게 바로 모든 대기업이 원하는 수직계열화 아니겠습니까?”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미래해운을 손에 넣는다면 매출과 수익이 모두 그룹 내에서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군침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자네 말대로 미래해운을 손에 넣는다면 수직계열화를 완성할 수 있지. 안에서 나온 모든 이득을 우리끼리 나눠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어.”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한진영에게 말했다.
“이렇게 좋은 걸 알려줬으니 우리가 그냥 미래해운을 인수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겠나? 청와대에서는 헤지펀드에 미래해운을 넘기는 것보다 안정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우리를 선택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요. 기풍에서는 ‘지금’ 미래해운을 인수하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왜 미리해운을 인수하지 못해?”
“만성 적자기업을 무슨 명목으로 인수하려 하십니까? 2조라는 돈을 자체 금고에서 꺼내오지 않는 한 금융권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들을 뭐라고 설득하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이정훈 회장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수직계열화하여 내부에서 이득이 도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도 결과론적인 이야기였다.
당장 일 년에도 수천억의 적자를 내는 미래해운을 떠안는다고 했을 때 좋아할 은행 및 투자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농담 삼아 한 말이네.”
이정훈 회장이 민망한 듯이 손을 휘젓자 한진영은 웃으며 이정훈 회장을 설득했다.
“제가 인수해서 잘 가꿔놓겠습니다. 그저 기풍은 10년 동안 안정적인 계약을 맺은 뒤 미래해운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다 마음에 들 때 그때 저희에게서 사가시면 됩니다. 마음에 안 들면 인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 회장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너무 좋은 조건에 기풍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이정훈 회장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한진영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이유는 뭔가?”
“미래해운을 꼭 인수하고 싶어서입니다.”
“그 정도로 자네 눈에는 미래해운이 좋아 보인다는 뜻인가?”
“미래해운이 좋다기보다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자신이 있다고?”
“네. 미래해운을 잘 가꿔서 좋은 회사로 팔아먹을 자신이 있어서 가지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풍이라는 안정적인 장기 계약선을 가지고 간다면 저희의 인수를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미래해운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기풍에 제안한 것이고요. 미래해운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다른 곳들을 통해 손해를 메울 자신이 있기도 했고요. 그리고 좋은 관계가 진행되다 보면 나중에 기풍에서 미래해운을 사겠다고 할 테니 제 입장에서도 좋은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의 말에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 계약하지.”
이정훈 회장은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비서실을 통해 계약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늘은 가계약만 맺고 자네가 미래해운을 인수하는 날 본계약을 체결하도록 하세.”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이 친구…….”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이 마음에 들었던지 한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이성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저 녀석이 제일 잘한 일이 서영이랑 결혼하여 우리 집안의 장손을 낳은 일이고, 두 번째가 한진영이라는 친구를 가졌다는 거야. 그것만으로 저 녀석 밥값은 다 했어.”
이성우는 만족해하는 이정훈 회장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자기가 득달같이 달려와 이정훈 회장에게 이야기한 것이 모두에게 좋은 결과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이정훈 회장 곁에 앉아있는 한진영을 살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정훈 회장만큼이나 만족해하는 한진영을 보고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사라고 하는데 얼마에 사야 하는 거야?’
한진영과 오랫동안 함께하며 보아온 표정으로 저 모습은 작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대여섯 배의 수익을 올릴 때나 보여주는 모습이라는 것을 떠올린 이성우였다.
‘설마 2조짜리를 10조에 사라고는 하지 않겠지? 설마…….’
이성우는 불안한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