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사고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건
서부 텍사스산 원유인 WTI가 4년 만에 가장 낮은 가격인 41달러에 돌입했다.
하루에 10% 이상 하락한 것은 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국제유가가 급락한 이유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수요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감산 합의까지 깨어질 것이 유력해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OPEC의 주장에 러시아가 강하게 반대하며 추가 감산은 물론이고 월말 종료하는 기존 감축량에 대한 기간 연장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현재 OPEC+의 감산 규모는 하루 210만 배럴 수준이었다.
추가 감산 논의가 진전을 보지 못하자 기존 감산 연장 논의까지 중단되어 기존 감산까지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뉴욕증시에서는 추가 감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WTI 기준으로 40달러 선도 무너지지 않겠냐는 전망이 나왔다.
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원유 수요가 상반기에만 하루 평균 200만 배럴 안팎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런 속에서 최소 100만 배럴 이상의 추가 감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30달러대 후반까지 하락을 열어둬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 것이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히자 뉴욕증시가 널뛰기 장세를 연출했다.
실업률이 3.5%로 하락하고 시간당 임금이 전년 대비 3% 늘어나는 호의적인 지표를 선보였지만, 모든 관심은 주말에 있을 OPEC+ 회의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자 장중 4%까지 하락하며 전저점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연일 최저치를 경신하며 채권 가격을 위로 치솟게 했다.
현재 발표되고 있는 지표는 호의적이지만, 장기적으로 미국 경기침체 우려가 채권 가격에 반영된 것이었다.
코로나19의 확산세는 가라앉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 확진자가 10만 명을 넘어섰다.
사망자는 3,400명이었으며 미국 확진자도 260명을 넘어섰다.
미국 내의 항공기 운항 축소와 콘퍼런스 취소 등으로 경제 활동이 마비됐다.
각지에서 휴교령이 내려지고 이동을 금지하고 있지만 확산세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포는 점점 더 크게 시장을 압박해 갔다.
레이 젠슨은 들고 있던 전화를 끊었다.
홍대민은 레이 젠슨이 전화를 끊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뭐라고 합니까?”
레이 젠슨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추가 감산은 합의하지 못하더라도 기존 감산은 유지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온다고 하는군.”
“역시 그렇겠지요?”
홍대민은 가장 합리적인 대답을 들었음에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레이 젠슨은 홍대민의 표정을 보고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전 세계 기름을 손에 쥐고 있는 인물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머리를 맞부딪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네.”
“그래도 일어난다면…… 지금 자리가 아쉽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지. 65달러에 잡아서 41달러까지 끌고 내려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40달러가 깨지는 것을 보고 정리해도 되고, 지금 자리에서 정리해도 충분해. 2,500틱에 10만 계약은…… 나조차도 처음 보는 규모니까. 너무 욕심내지 마.”
레이 젠슨은 고문으로서 홍대민에게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어차피 선택은 홍대민이 할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의 생각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에는 한 톨의 의심도 없었던 레이 젠슨이었다.
홍대민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
한진영이 고개를 돌로 홍대민을 바라보자 홍대민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뭘 말씀이십니까?”
“포지션 말입니다. 슬슬 정리에 들어갈까요?”
홍대민이 한진영을 향해 질문하자 한진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정리에 들어간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그게…… 저…….”
홍대민은 한진영의 반응에 당황하여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레이 젠슨이 홍대민을 대신하여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아 보인다는 거지. 내가 조금 전 OPEC+ 회의가 진행되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관계자에게 확인을 해봤네. 거기서 나온 소리가 그래도 기존 감산은 유지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거야. 그렇다면 40달러야 깨지겠지만 38달러 선은 지키지 않겠냐는 시각이 맞지 않겠어? 38달러까지 지켜보고 정리할 수는 없으니 40달러부터는 정리하는 게 맞지. 10만 계약을 정리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정리라니요?”
레이 젠슨이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한진영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레이 젠슨을 향해 물었다.
레이 젠슨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리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자네가 몰라서 지금 물어보는 건 아닐 테고…… 설마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레이 젠슨의 질문에 한진영은 살며시 웃고는 홍대민을 향해 질문했다.
“홍 사장님.”
“네. 회장님.”
“제가 처음 원유 선물 매도 들어갈 때 언제 정리한다고 했지요?”
홍대민은 한진영의 질문에 잠시 레이 젠슨을 슬쩍 바라본 뒤 대답했다.
“분명 회장님께서는…… 만기까지 들고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만기가 왔나요?”
“아닙니다.”
“만기가 보이는 자리에 오기라도 했나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정리하는 걸 물어보는 겁니까? 저와 일하며 제가 한 번 정한 걸 바꾸는 걸 본 적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려 한진영에게 질문한 자기가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 원래 계획대로 가면 됩니다. OPEC+회의가 어쩌고저쩌고할 것 없이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매매 프로그램에 마이너스 거래가 되는지 확인하는 자리에서 분명 미하엘 퍼터와 박도하에게 미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말했던 홍대민이었다.
그러나 막상 40달러 자리가 깨질 것이 확실해 보이자 이쯤에서 빠지는 것이 어떠냐는 마음이 솟아나고 만 것이었다.
한진영은 붉어진 얼굴의 홍대민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홍 사장님도 사람이니까요. 40달러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정리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솟아나는 건 당연한 겁니다. 40달러를 기준으로 우리가 얻은 수익이 얼마지요?”
괜찮다고 말한 한진영은 홍대민에게 지금까지 올린 수익에 관해 물었다.
홍대민은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채로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2,500틱에 10만 계약이므로…… 25억 달러 수익이 예상됩니다.”
“25억 달러…… 이 정도만 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고문님. 그렇지요?”
한진영이 레이 젠슨을 돌아보고 묻자 레이 젠슨이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쁜 정도가 아니지. 25억 달러 수익을 원유 선물에서 한 포지션으로 올린 곳이 지금까지 있나 싶은 정도라네.”
“하지만 저는 더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진영이 레이 젠슨을 향해 포지션을 알리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자기의 의중을 레이 젠슨을 향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가 한진영에게 건넨 브릿지랜드가 바로 WTI 선물 매도 10만 계약을 들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레이 젠슨을 존중하고 그가 한진영의 생각을 지지한다면 브릿지랜드 내부에서의 반발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 젠슨은 쉽게 한진영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한진영의 생각은 이성적인 판단을 까마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진영의 말에 레이 젠슨이 그동안 참았다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홍 사장하고 이야기하는 걸 가만히 들었네. 그리고 자네가 조금 전의 말대로 더 깊은 곳을 보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조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겠나? 40달러만으로도 충분히 하락한 거라네. 단숨에 고점 대비 30% 넘게 하락한 자리야. 여기서 더 빠지는 건 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네. 그리고 지금 오스트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든 해결을 하려 할 테고…… 만약 이번에 해결이 불가능하더라도 길을 만들어 놓고 마무리할 것만큼은 확실하네. 그게 아니라면 ‘파국’일 테니까.”
레이 젠슨 또한 지난 자리에서 홍대민이 떠올렸던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만큼 지금 자리가 깨졌을 때 파급이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말을 가만히 들은 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지훈을 불렀다.
“조 실장. 김 실장에게서 연락이 왔나?”
“네. 바로 화면에 띄우겠습니다.”
조지훈이 한진영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고 화면에 전략분석실이 예상한 내용을 띄웠다.
한진영은 전략분석실의 보고를 바라보고 레이 젠슨을 향해 말했다.
“전략분석실에서는 지난 전체 임원회의 때와 같은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이번 회의는 아무런 소득 없이 정리될 것이고 유가는 큰 폭으로 하락한다고 말입니다.”
“저게…… 말이 안 되지 않나? 솔직히 말해보게. 이 회의가 깨질 거라는 생각이 드나? 홍 사장. 그렇게 생각해?”
홍대민은 잠시 한진영의 눈치를 살핀 뒤 자그마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이 젠슨은 그런 홍대민의 모습을 보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보게. 홍 사장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지 않나? 이건 벌어지지 않을 일이야. 그런데 벌어지지 않은 일을 가지고 계산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고문님. 전략분석실의 분석은 사람의 감정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겁니다.”
한진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조지훈이 화면에 띄워 놓은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저것만큼 냉철한 분석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럼 자네도 이번 회의가 깨질 것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인가?”
한진영은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답을 알고 있다고 해도 알게 된 경위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것으로 레이 젠슨을 설득했다.
“제가 생각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회사의 기준은 바로 저겁니다. 저 분석에 따라 투자를 하고 거기에 따라 수익을 올리면 됩니다. 기준이 무너지지 않는 한 저희는 그대로 갈 겁니다.”
레이 젠슨은 한진영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이해하네. 아직 완벽히 융화가 되지 않은 브릿지랜드 내부에서 반발이 나올 것을 걱정하여 그런 것 아닌가?”
“네. 고문님께서 저를 지지해주십시오.”
“하아~”
레이 젠슨은 한진영의 말에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지훈이 띄워 놓은 화면과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본 후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릿지랜드를 넘긴 순간 자네를 따르기로 했네. 그저 고문으로서 가만히 지켜볼 수만 없어 이야기한 것이네. 자네의 결정을 따르겠네.”
“감사합니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회의가 이틀 뒤에 있으니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한진영이 자신을 지지해준 레이 젠슨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홍대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이 지시하고 홍대민과 레이 젠슨이 한진영의 손을 들어줬으니 브릿지랜드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브릿지랜드의 전 주인과 현 주인 그리고 브릿지랜드를 운용하는 세 사람의 의견이 모두 모였기 때문이다.
레이 젠슨은 만족해하는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다시 조지훈이 띄워놓은 화면을 바라봤다.
장황하게 쓰여있는 분석들 속에서 레이 젠슨의 눈에 한 가지 내용이 들어왔다.
[만약 회의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면 OPEC+ 회원국들은 치킨게임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유가는 사상 초유의 가격에 도달할 수 있다. 10달러 혹은 그보다 더 낮은 가격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10달러 언더? 허허.’
레이 젠슨은 80년대 중반 아주 잠시 10달러 언더 가격을 갔던 유가를 떠올렸다.
당시 풋내기에 불과했던 레이 젠슨은 30달러에서 10달러를 살짝 깨는 가격까지 내려간 유가를 보고 패닉에 빠졌었다.
그런데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 65달러에서 10달러 언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인플레를 생각한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그것도 두 배나 더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린다고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조차 컴퓨터가 계산할 수 있는 최대였음을 레이 젠슨은 알지 못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컴퓨터조차 예상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사고’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결국 OPEC+ 회의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OPEC 회원들과 10개 비회원국으로 이뤄진 산유국 연합체 OPEC+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원유 추가 감산을 논의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OPEC 사무총장은 비회원국 한두 곳이 제안된 추가 감산량에 동의하지 않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비공식 논의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자세한 설명이 없어 과연 비공식 논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했다.
사무총장이 말한 제안에 동의하지 않은 나라가 러시아란 것은 이미 논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기자들이 러시아 에너지 장관을 찾아 지금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 노박 러시아 에너지 장관은 출혈을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합의가 깨진 탓을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돌렸다.
“정말 합의가 되지 못했네요.”
주말 사무실에 나온 한진영에게 함께 사무실을 찾은 조지훈이 말했다.
한진영이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전략분석실에서 내놓은 이야기이기에 그렇게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 합의에 이르지 못한 현실에 조지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되면 40달러가 깨지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40달러? 조금 더 지켜봐 봐. 아직 뉴스는 끝나지 않았어.”
한진영은 코웃음을 치고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에는 속보들로 가득 채워져 갔다.
보통 주말에는 뉴스가 많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이야기가 올라오거나 간혹 유명인이 죽었을 때 속보 형식으로 뉴스가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사람도 쉬고, 기자도 쉬고, 기사를 읽는 고객도 쉬는 때가 주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주말 사이 뜻밖의 뉴스가 나오자 기자들이 쉬지 않고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회장님.”
조지훈은 당황한 표정으로 기사가 올라가는 화면을 바라보고 손을 들어 가리켰다.
“보셨습니까?”
“봤지. 거봐. 내 말 대로지? 뉴스는 이제 시작이야.”
조지훈은 놀란 표정으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은 태연한 표정으로 조지훈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제 내가 왜 그렇게 자신 있어 했는지 알겠어?”
조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니터링 화면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증산 결정]이라는 글자가 크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