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
OPEC+의 감산 합의가 무산된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산유국 간 유가 ‘출혈경쟁’이 일어날 조짐을 보인 게 문제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합의가 무산되자마자 증산과 유가 인하를 예고했다.
러시아가 감산 조치에 동의하지 않자 오히려 증산을 결정하여 치킨게임에 돌입한 것이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긴급으로 보낸 기사에는 사우디가 4월부터 원유 생산량을 기존 일 평균 970만 배럴에서 1,000만 배럴로 올리겠다고 예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가도 3월보다 배럴당 8달러 이상 인하할 계획을 하고 있고, 인하 폭은 역대 최대라고 이야기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목표는 OPEC+의 회원국들이 합심하여 원유를 감산해 유가 하락을 막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감산에 반대하자 원유 시장의 장악력을 확보하기 위해 치킨게임으로 시장을 몰아넣어 버린 것이었다.
러시아는 몇 년간 조성해놓은 170억 달러 규모의 국부 펀드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저유가에 돌입하더라도 큰 손해를 보지 않고 치킨게임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시장은 이제 가격 인하와 증산의 압박이 어디까지 퍼져나갈지에 관해 관심 있게 바라봤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아랍에미리트나 쿠웨이트 등 사우디의 걸프만 동맹국들도 가격 인하와 증산 대열에 합류하는지가 관심사가 됐다.
걸프만 동맹국들이 사우디의 뒤를 따른다면 러시아 또한 대항 세력을 결집하여 본격적인 치킨게임에 돌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양자 세력 간의 싸움이 된다면 20달러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 곳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조차도 희망이 담긴 예측이었다.
양 세력이 브레이크 없이 치킨게임을 벌인다면 가격을 예측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질 만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시장 참여자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오셨습니까?”
홍대민은 세이지 자산운용사를 찾은 한진영의 차 문을 잡고 인사했다.
한진영은 차에서 내리며 홍대민을 향해 말했다.
“바쁜데 뭐 하러 나오셨습니까?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설마 건물 들어가는 법도 잊어먹었을 것으로 생각하신 겁니까?”
한진영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농담에 애써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지만, 그의 표정은 어색하기만 했다.
아직도 주말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어색한 표정을 보고 웃어 보인 뒤 잠시 담배를 피우며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
담배가 반쯤 타 내려갔을 때쯤 한진영의 차가 멈춰 선 곳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한진영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직접 차 뒷문을 열며 안에 타고 있는 레이 젠슨을 향해 말했다.
“주말에 푹 쉬고 계시는데 괜히 나오신 것 아닙니까?”
레이 젠슨은 차에서 내리며 한진영을 올려다봤다.
“알고 있었나?”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떻습니까? 결과만 좋으면 됐지요.”
“흐음…….”
레이 젠슨은 한진영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말했다.
“알고 있었다면 그냥 솔직히 이야기해줬으면 되지 않았나?”
“고문님. 저와 함께 분명 임원회의 때 러시아가 딴지를 걸 거라는 이야기를 같이 듣지 않으셨습니까? 저와 고문님의 차이는 그 보고를 얼마나 믿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한진영이 담배를 조지훈이 내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레이 젠슨의 양어깨를 뒤에서 잡았다.
그리고 레이 젠슨을 건물 방향으로 몸을 틀게 만든 후 말했다.
“이제 결과를 볼 시간이 다 됐으니 들어가시지요. 직원들이 다들 고문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진영이 레이 젠슨을 살짝 안으로 밀자 레이 젠슨이 못 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갔다.
과거 브릿지랜드의 본사 건물이자 지금은 세이지 자산운용사의 본사 건물로 사용하는 건물로, 레이 젠슨과 한진영 등이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짝짝짝짝.
오랜만의 회사에 레이 젠슨이 들어오자 과거 브릿지랜드 직원들이 레이 젠슨을 향해 손뼉을 쳤다.
놀랄만한 성과를 확인하는 날.
직원들은 레이 젠슨의 등장에 모두 기쁜 듯한 표정으로 반갑게 레이 젠슨을 맞은 것이었다.
레이 젠슨은 오랜만에 보는 직원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건물 로비 중간에 잠시 서서 주변에 모인 직원들을 살폈다.
레이 젠슨이 방문한다는 공지가 미리 되어 있던 것인지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도 모두 로비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레이 젠슨을 손뼉으로 반갑게 맞았다.
레이 젠슨은 뭉클한 느낌을 받았다.
수십 년 자기 손으로 직접 키운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음에도 직원들은 레이 젠슨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에 감동한 것이었다.
“젠슨 회장님. 환영합니다.”
“젠슨 회장님. 보고 싶었습니다.”
“젠슨 회장님. 자주 좀 오십시오. 회장님의 호통 소리가 그립습니다.”
레이 젠슨이 로비 가운데 서서 눈시울을 붉히자 브릿지랜드의 직원들이 더욱 열심히 손뼉을 쳤다.
한참 동안 손뼉소리를 듣고 있던 레이 젠슨은 양손을 들어 올려 손뼉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곁에 있는 한진영의 손목을 잡은 후 자기를 보고 있는 브릿지랜드의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알겠나? 내가 왜 세이지의 한진영에게 내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었는지?”
레이 젠슨의 목소리가 로비를 가득 울렸지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만큼은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10만 계약이네. 10만 계약. 그걸 어디서 잡았다고?”
“65달러입니다.”
누군가가 레이 젠슨의 목소리에 큰소리로 대답했다.
레이 젠슨은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잘했다는 제스처를 취한 후 다시 소리 높여 말했다.
“월스트리트에 누가 그 자리에서 10만 계약을 매도 칠 수 있었겠나? 오직 세이지만이, 오직 한진영만이 그 자리에서 매도를 칠 수 있었으니 이제 내가 브릿지랜드를 세이지의 한진영에게 부탁한 이유를 이제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로비가 떠나갈 듯이 브릿지랜드의 직원들이 레이 젠슨의 질문에 목소리 높여 대답했다.
레이 젠슨이 잡고 있던 한진영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 사람이 65달러에 10만 계약을 매도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제자리에서 돌며 로비에 모인 브릿지랜드 직원들에게 한진영을 보여줬다.
브릿지랜드의 직원들은 한진영을 향해 우레와 같은 손뼉 소리를 안겼다.
그렇게 한동안 로비에서 분위기를 끌어 올린 레이 젠슨과 한진영은 직원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 젠슨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곁에 있는 한진영을 향해 짧게 물었다.
“어떤가? 만족하나?”
한진영은 레이 젠슨의 질문에 바로 대답했다.
지금은 모르는 척하는 것보다 바로 대답을 건네는 편이 관계 형성에 있어서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브릿지랜드 직원들의 신뢰가 더 올라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두 고문님 덕분입니다.”
“뭐 만족한다니까 그러면 됐네.”
생각보다 레이 젠슨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은은하게 계속 미소가 머무는 것이 조금 전 브릿지랜드 직원들의 환호가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엘레베이터가 새롭게 마련된 트레이딩 센터에서 멈추자 레이 젠슨은 먼저 내리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그래도 다음번에는 미리 언질을 주게나. 미리 준비해야 자네가 구상한 시나리오에 맞춰 움직일 수 있으니까. 오늘 내 연기는 괜찮았나?”
“저는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레이 젠슨은 한진영을 향해 가볍게 웃고는 몸을 돌렸다.
“연기가 아니라고 느꼈으면 됐네. 그렇다면 나도 만족이야. 가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첫 거래가 얼마에 찍혀서 시작되는지는 확인해야지.”
레이 젠슨의 만족했다는 말이 말뿐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이 느껴지는 몸짓을 보이자 뒤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홍대민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가시지요. 준비를 마쳐 놓았습니다.”
홍대민이 오늘 있을 빅이벤트를 관람하기 위한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트레이딩 센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무실에는 한진영의 사무실에 있는 시스템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뉴스가 나오는 화면과 차트가 보여주는 화면. 그리고 거래 창이 한눈에 들어오게 배치된 곳에 한진영과 레이 젠슨이 편안히 앉을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주말에 나와 이렇게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런 일이라면 주말이 아니라 밤을 새워도 신났을 겁니다. 준비하면서 힘들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다행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진영이 고생했다고 치하하며 자리에 앉자 뒤를 이어 레이 젠슨이 한진영의 곁에 앉았다.
원자재와 선물 시장의 경우 아시아 시장의 시작과 함께 장이 시작됐다.
아직 미국 시각으로는 주말 오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벌써 한 주의 시작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얼마 예상하나?”
아직 예상 호가조차 찍히지 않은 상황에서 레이 젠슨은 한진영에게 가볍게 물었다.
“내 예상은 10% 하락 정도를 예상하네.”
“이번 사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말 일요일 오후에 이렇게 모였으니 더 깊은 하락을 기대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레이 젠슨은 물끄러미 한진영을 바라봤다.
“자네는 도대체 어디까지를 보고 있는 건가?”
한진영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가볍게 20%대 하락 정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가볍게? 20%?”
레이 젠슨이 한진영을 바라보자 한진영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보십시오.”
한진영의 말에도 레이 젠슨은 한동안 한진영을 바라봤다.
앞에 열리는 화면의 내용보다 한진영을 바라보는 것이 시장을 아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이 시작되는 시간이 되었을 때 원유선물 시장이 열렸다.
“32.50 시작!”
한진영이 자리하고 있는 곳 너머에서 한창 시장을 바라보고 있던 직원들의 목소리가 유리창을 뚫고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허허. 정말 20%가 넘게 하락했구먼.”
시초가가 -21% 하락에 잡힌 원유선물이었다.
“이렇게 가다가 정말 20달러대도 가는 것 아닌가?”
레이 젠슨은 말을 하고 은근한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이라면 지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홍대민도 레이 젠슨과 마찬가지로 화면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한진영을 돌아봤다.
홍대민도 레이 젠슨과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문님.”
한진영은 자기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쳐다보는 레이 젠슨과 홍대민을 한 차례씩 바라보고 웃었다.
“그새 또 잊어버리신 겁니까?”
“뭘 말인가?”
“여전히 전략분석실의 분석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신 것 같습니다. 함께 보지 않았습니까? 전략분석실의 예측을 말입니다. 러시아가 딴지를 걸어 협상이 깨졌을 때 치킨게임이 벌어질 테고, 그 결과 어디까지 갈 거라는 것을 함께 보지 않으셨습니까?”
“10달러 언더?”
“네.”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모두 상식과 벗어난 것들인데 유가의 하락 하단 선은 이성적일 거로 생각하신 겁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레이 젠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애초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오스트리아에서 이미 추가 감산이 결정 났겠지.”
레이 젠슨의 말에 홍대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무엇 하나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게 없는 시장에서 10달러 언더가 정상이 아니라고 이루어지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냥 우리는 물량을 손에 쥔 채로 어디까지 빠지나 가만히 지켜보면 됩니다. 축제 기간에는 축제를 즐기면 되니까요.”
한진영이 말을 하고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 속에서의 WTI 선물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모습으로 계속 하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
“정신 바짝 차려! 긴장하고 모니터에서 시선 떼지 마!”
“화장실 갔다 올 사람 빨리 다녀와! 장 시작하고 10분 동안은 숨도 쉬지 못할 테니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진영이 있는 자리까지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조금 뒤 열릴 시장을 준비하는 직원들의 집중은 보는 사람의 피부를 따끔거리게 할 지경이었다.
일요일 저녁 있었던 유가의 움직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일보다 24% 이상 빠져 내려간 유가는 30달러 선을 힘겹게 지켜냈다.
24% 폭락은 지난 1991년 걸프전 이후 최악의 일일 낙폭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런 유가의 여파는 월요일 아침 시장을 차갑게 만들고 말았다.
“회장님. 여기 있습니다.”
조지훈은 직접 타온 따뜻한 라떼를 한진영에게 건넸다.
한진영은 라떼를 맛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다들 시작하기도 전에 흥분에 쌓인 것 같아.”
“왜 안 그러겠습니까? 지금 셰일오일 업체들의 집단 부도 루머가 시장에 흘러 다닌다고 합니다.”
“하하.”
한진영은 라떼를 가볍게 마시며 조지훈의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개장한 아시아와 유럽 시장은 패닉에 빠진 상태입니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11%의 하락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종합주가지수가 11% 하락한 것은 이탈리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에너지기업들에도 안 좋은 이야기가 돌고 있지?”
“네 기존 에너지업체도 10% 이상의 하락이 예상된다는 장전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이대로면…… 시장이 초토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한진영은 따뜻한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트레이드 센터의 모든 직원은 자리에 앉은 채로 자기 앞에 놓인 모니터를 집중해서 바라봤다.
센터 맨 앞에 자리한 커다란 전광판에는 앞으로 1분 뒤 시장이 시작된다는 카운트가 들어간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라떼를 들고 난간에 기대어 커다란 전광판을 바라보고 말했다.
“아직은 초토화를 논하기에는 어려운 시점이지.”
짧게 말을 내뱉은 한진영은 곁에 서 있는 조지훈을 바라보고 물었다.
“조 실장은 바닥인 줄 알았던 곳 밑에 지하실이 더 있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나?”
“주식시장에 오래전부터 돌아다니는 농담 아닙니까?”
“그래. 평소에는 농담과 같이 웃으며 들을 수 있는 말이지. 하지만 그게 현실이 되면 어떨까? 그때도 웃으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한진영은 말을 하고 다시 가볍게 라떼를 마셨다.
한진영이 라떼에서 입을 떼자 증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7%, 8,000선을 단숨에 깼습니다.”
시작하자마자 600포인트가 넘게 빠져 내려간 나스닥 지수의 모습에 조지훈이 당황한 듯이 한진영에게 말했다.
그러나 놀람은 이제 시작이었다.
시작한 지 4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S&P 500이 서킷브레이커를 발동하며 15분 동안 거래가 멈췄기 때문이다.
시장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